업과 다운이 있고, 조와 울이 교차하며 농과 진이 섞여 있는 50대의 이야기
건강 염려증 시리즈 2편50대 남성들이 모여 대화를 나누면 반드시 등장하는 네 가지 공통 주제가 있다. 운동·레저, 부모님, 재테크 그리고 건강이다. 그중 압도적 비율을 차지하는 것이 건강이다. 운동·레저나 부모님에 관한 이야기 모두 결국 건강 문제로 귀결되기 십상이어서 더 그렇다.
대부분 이들의 첫인사는 이른바 ‘외평(외모 평가)’으로 시작된다. “오~ 배가 쑥 들어갔어”, “혈색 좋아졌는데”, “이제는 염색 안 하고 다니시나”, “자네 눈썹 문신했구먼” 등등. 하지만 이것을 ‘라떼’의 전형적 구태로 몰아가는 것은 온당하지 않다. 이들의 외평은 서로의 안색이나 체격 변화를 지켜봐 주는 관심의 품앗이 성격이 짙기 때문이다.
좀 더 확대하자면 중년 또래 집단의 외평은 비전문인들 간의 조기 경보 상조 같은 것이다. 더군다나 관심에 기초한 ‘구두 개입’은 일방적이지 않고 상호적이어서 굳이 외평에 대해 부정적인 사회 일반의 잣대를 들이댈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설령 그 외평이 상대방의 건강 관리에 대한 질책으로 이어지더라도 그것에서 느껴지는 적절한 훈기가 있기에 군말 없이 수용된다.
“무릎 안 좋다더니 병원엔 가 봤나.” “지난 달에는 담배 끊었다더니 벌써 다시 피우네.” “그런 저질 체력으로 이번 산행에 어떻게 따라오려고 해.” 가끔 핀잔과 조롱이 가미되지만 서로의 건강에 대한 훈수꾼과 파수꾼 역할을 자임하는 것에 대한 고마움이 느껴진다.
물론 외평은 상대에 대한 관심과 애정을 전제하지만 실상 자기 자신의 몸 상태에 대한 경각심도 저변에 깔려 있다. “요즘 무슨 약을 먹었길래 얼굴이 그렇게 훤해졌나. 나한테도 좀 알려줘 봐.” “살 많이 빠졌네. 아휴~ 나도 빨리 운동 시작해야 되는데…” 등등. 다시 말해 중년남들의 외평에는 자기 모니터링이라는 숨겨진 심리 기제가 있다는 것이다.
흰머리 외평, 처세로서의 건강 관리
흥미롭게 다가온 중년남의 외평 현상이 또 하나 있다. 탈모보다 더 촉각을 곤두세우는 부분이 머리 색채라는 사실. 경험 통계상 50대 남성들 (추측하건대 여성들도 크게 다르지 않으리라) 십중팔구는 염색을, 그것도 시커먼 숱검정색으로 하고 다닌다는 것이 신기할 따름이다.
사이에서 검은 머리와 흰머리에 대한 시각은 대략 삼분된다. “염색 좀 하고 다녀라. 너무 추레해 보인다”라고 압박하는 관리파. 이에 맞서 “뭘 그런 것 신경 쓰고 살아. 이젠 그냥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야지” 하는 자연파. 둘의 대결 구도 틈 사이로 “완전 백발만 아니면 희끗희끗한 게 더 중후하고 있어 보이지 않나” 하고 파고드는 중도파.
“와~ 너는 어떻게 흰머리가 하나도 없냐”며 누군가 칭찬을 하면 상대는 즉각 머리 속을 들춰 보이며 “아니야, 밑은 완전 허옇지” 하며 부러워하는 이를 다독인다. 그러면 옆에 있던 친구들도 “열흘에 한 번 염색해 그렇지 나도 완전 백발이야”라며 외형과 실체 사이 간극을 실토한다. 간혹 “집안 유전인가…. 다른 곳은 다 허연데 머리카락은 아직 괜찮네”라고 에둘러 자랑질을 하는 친구는 야유 폭격의 대상이 된다.
머리 모양이나 색깔에 따라 얼굴 인상이 크게 좌우된다는 점은 인정된다. 흰머리가 가장 두드러지는 시각적 노화 지표라는 점도 감안할 수 있다. 그렇더라도 좀 과민한 것 아닌가 하는 인상을 지울 수 없었던 차에 얼마 전 동년배 친구에게 들은 이야기는 검은 머리 염색의 절박성에 대한 하나의 단서가 됐다.
알 만한 대기업 임원으로 있는 그는 회사 사람들의 눈치를 자신의 준강제적 염색 사유로 지목했다. “우리 나이에 아직 회사에 있으면 눈치 보여. 나갈 나이가 됐는데도 아직 자리 차지하고 버티고 있으니까. 언제 방출될지 모르는 불안불안한 상황인데 흰머리 휘날리고 다녀봐. 확실히 눈에 띄는 표적이 된다니까.” 그래서 그 ‘고령’을 상기시켜 주는 시각적 지표들에 약간의 ‘터치’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아, 이렇게 깊은 사연이 있을 줄이야. 신체 외모 하나하나에 이렇게 섬세한 심리와 생활의 기술이 뒤엉킬 줄이야. 그렇게 생각하니 나이가 단지 숫자에 불과하다는 주장은 다소 비현실적일 수도 있겠다 싶다. 한국 같은 ‘장로 사회’에서는 그 숫자가 사회 집단과 조직 내 직급·연봉·지도력·기대치들과 밀도 있게 직조돼 있을 테니까.
그런 의미에서 중년남들의 외평은 건강에 관여된 것만이 아니라 이른바 ‘처세’와 깊게 연동돼 있는 것 아닌가 추정된다. 따라서 뱃살·백발·주름·눈꼬리 처짐 등의 외모 관리를 건강 관리와 등치할 것이 아니라 생활의 기술 혹은 사회적 자아 관리로 볼 수 있겠다는 단상이 스친다.
건강 톡의 지정 코스들
중년남의 건강 톡은 외평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보다 본격적인 건강 톡은 누군가의 건강 ‘고해성사’로부터 출발한다. “겨울이라 볼(골프) 치러 못 나가니 1주일 동안 1만 보도 못 걸었네” 같은 가벼운 실토에서부터 무슨 자랑이라도 되듯 “난 주말도 못 쉬고 1주일 내내 달렸어” 하는 경과 보고가 이어진다. ‘이러면 정말 안 되는데…’ 하는 자기 질책이 기본적인 톤(tone)을 이루지만 달리 돌파구가 없다는 초조함도 배어 있다.
지인들의 근황도 건강 이야기 중심으로 정리된다. “XX는 어지럼증이 도져 오늘 못 나왔어. 이석인지 이명인지 그거 한 번 시작되면 고치기 힘들다고 하던데….” “YY는 이번에 스텐트 하나 또 박았다더라구.” “그러게 우리 나이에 그렇게 무리해서 산에 다니면 심장에 무리가 가서 안 된다니까”라며 핀잔과 한탄이 오간다.
오십견·무릎 관절·임플란트·백내장·당뇨약·노안·수면 장애·간수치·빈뇨 등 각종 중년 질병 이야기 코스를 한 바퀴 돌면 평소 조용하던 친구들도 의자를 끌어당기며 적극적으로 나선다. 가끔은 침 튀기는 갑론을박도 벌어지면서 자신이 경험한 병원이나 약품 혹은 의사를 거의 신앙 수준으로 승화시키는 친구들이 득세한다. 물론 압박적 권유 혹은 부담스러운 ‘전도’가 뒤따르기 마련이다.
건강 톡이 무르익으면 진부하지만 빠짐없이 등장하는 대사가 있다. “이러다 한 방에 훅~ 가는 수가 있다”가 그것이다. 얼추 3분의 1 정도는 이 묵시록적 공갈 앞에 모호한 웃음만 짓는다. 그러다 누군가가 “아 몰라, 걍 이렇게 살다 갈래”라고 되받아 치면 분위기는 다시 활기를 되찾는다. 이렇게 중년남의 건강 톡에는 업과 다운이 있고 조와 울이 교차하며 농과 진이 섞여 있다.
‘한 방에 훅~” 이야기가 나오면 자연스레 흡연에 대한 상호 간섭질이 시작된다. 흰머리 사례와 마찬가지로 대략 세 가지로 갈라진다. “피울 만큼 피웠잖아. 이제는 좀 끊자”의 관리론, “어차피 갈 사람은 다 가게 돼 있다”의 운명론, “그래도 좀 신경은 써야지”의 절충론. 관리론자들은 금연을, 운명론자들은 아직 연초를, 절충론자들은 전자담배를 선택하는 경향이 강하다.문상의 빈도, 죽음과의 거리 측정
중년남 건강 톡의 클라이맥스는 뭐니 뭐니 해도 부모님에 관한 이야기다. 부모님들의 평균 연령이 80대에 놓여 있다 보니 당신들의 노화와 질병에 참여적 관찰 혹은 간접 체험이 늘게 된다. 그래서 각자 채집한 정보와 소회들로 이야깃거리가 늘 풍성하다.
요즘 제일 ‘핫’한 화두는 치매가 아닐까 한다. 부모님들의 치매 에피소드에서 출발하지만 대략 중반부부터는 자신의 황당 치매끼 자랑질로 전락한다. 각자 치매 전조 증상을 늘어 놓으며 농을 주고받다가 서로 중증 치매라고 누명을 씌우기도 하면서 치매 검사나 치매안심센터에 대한 정보를 강권하며 토닥거린다.
치매만큼이나 자주 언급되는 주제가 상조회사·간병인·병원·장애 등급인 것 같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이런 정보 대방출 수다가 진행되다가도 돌연 대화가 묵직한 방향으로 선회할 때가 있다는 사실이다. 예를 들면 자신과 생의 마지막 구간과의 거리를 가늠해 보는 이야기가 그렇다. 부모님의 노화와 죽음에 대한 감정 이입은 물론이고 “아 나도 멀지 않았구나” 하는 ‘현타’에 덜컥 사로잡히는 경우가 잦기 때문일까.
반면교사를 포함한 깨달음의 양만큼이나 막연한 두려움의 크기도 커진다. 멀리 떨어져 있지는 않겠지만 그렇다고 저 골목을 돌아가면 바로 마주칠 것 같지도 않은 모호한 ‘설마’의 관측 거리…. 그래서 그 미지의 거리는 설정의 대상이 되고 만다. 아직은 멀리 있다고 상정할 것인지, 근접해 있다고 믿고 나머지 구간을 지날 것인지 작심의 영역이다. 아무튼 인간 신체의 유한성이란 주제는 치맥 안줏거리로 삼기엔 너무 버겁다.
몇 해 전부터 부고가 끊이지 않는다. 한 친구는 부모님 댁보다 더 자주 가는 게 남의 부모 상가집이라며 너스레를 떨기도 했다. 벌집처럼 촘촘하고 끈적한 인간관계로 엮인 한국 사회에서 지인 부모님의 소천 소식은 각별한 무게를 가진다. 그러니 코로나19 탓이든 이 나이대의 숙명이든 당분간 문상 빈도가 줄어들 것 같지는 않다.
건강 톡이 잦아지는 것도 날로 빈번해지는 문상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굳이 장례식장이 아니어도 스쳐 가는 일상 대화 속에 불현듯 다가올 죽음에 대한 유비와 아나모르포시스(anamorphosis)가 많아지는 나이다. 웰빙(wellbeing)만큼이나 웰다잉(well dying)에 시선이 끌리다 보니 존엄사가 인정되는 스위스 영주권이나 다 함께 취득하자며 보채는 친구의 발상이 더 이상 억지로 느껴지지만은 않는다.
평범한 건강 톡 속에도 긴장감을 높이는 소재나 아찔한 사례들이 지뢰처럼 여기저기 밟힌다. 그런 어색함을 외면하거나 뇌관을 제거하려다 보니 중년남의 외평과 건강 톡에는 유머, 자조 그리고 적정한 허풍이 필수다. 거기엔 코딩과 승화의 미학이 있다.
생의 절반을 외국에서 보낸 필자에게는 한국 중년남의 일상화된 건강 톡이 여전히 낯설고도 흥미롭다. 해외에서 이렇게 자신의 몸과 건강을 주제로 집중 대화하는 것은 그리 흔하지 않은 광경이다. 한 가지 느낀 것이 있다면 중년남의 외평과 건강 톡은 양날의 칼이 아닐까 하는 점이다. 사회적 순기능이 뚜렷한 만큼 정서적 역기능도 감지된다. 그날이 안을 향해 자신이 다치지 않도록 주의해 다뤘으면 한다.
최정봉 전 NYU 영화이론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