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48년 프랑스 혁명으로 쏟아져 나온 귀족들의 보석을 사들인 그는?[류서영의 명품이야기]
입력 2023-03-01 09:36:05
수정 2023-03-02 14:56:22
미국 대표 보석 ‘티파니’…지방시 드레스 입고 쇼윈도 보는 오드리 헵번의 ‘명장면’ 만들어
류서영의 명품이야기티파니①
1961년 상영된 영화 ‘티파니에서 아침을’에서 신분 상승을 꿈꾸는 여인 홀리 고라이틀리(오드리 헵번 분)가 선글라스를 끼고 샌드위치와 커피를 든 채 뉴욕 5번가 티파니 쇼윈도를 바라보는 모습은 지금도 명장면으로 남아 있다. 이를 통해 티파니는 모든 여성이 꿈꾸는 행복과 부의 상징적인 장소가 됐고 인지도가 더 높아지게 됐다. 이 영화 포스터에서 지방시의 블랙 드레스와 티파니의 다이아몬드로 장식된 목걸이를 착용하고 있는 오리드 헵번은 많은 이들에게 매력적인 모습으로 오랫동안 기억되고 있다.
영화가 상영된 이후 티파니는 많은 여성들의 선망의 브랜드가 됐고 티파니라는 브랜드는 영화 제목에 브랜드 이름을 넣은 최초의 PPL(Product Placement Advertisment : 특정 기업의 협찬을 대가로 영화나 드라마에서 해당 기업의 상품이나 브랜드 이름을 소도구로 끼워 넣어 광고하는 기법)이 됐다. 영화 속에서 티파니는 상류 사회를 대표하는 브랜드이고 부의 상징이기도 했지만 가난한 소설가 폴 바젝에게 티파니에서 구매하지도 않은 반지에 이니셜을 새겨 주는 서비스를 제공해 티파니라는 브랜드 이미지를 한층 업그레이드해 줬다.
유럽과 차별되는 모던한 디자인으로 인기
1812년 2월 15일 티파니의 설립자 찰스 루이스 티파니(사진①)는 미국 코네티컷 킬링리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면직 공장을 운영했다. 티파니는 15세부터 아버지의 면직 공장에서 일을 시작했고 1837년 9월 아버지에게 1000달러를 투자받아 독립했다. 그는 그 돈으로 뉴욕 맨해튼 259 브로드웨이에 문구류와 팬시 용품을 판매하는 작은 매장을 열었다. 또 일본과 중국에서 수입한 골동품도 함께 판매했다. 그의 나이 스물다섯 살 되던 해였다.
티파니는 친구인 존 버넷 영과 동업했고 ‘티파니, 영 앤드 엘리스’라는 이름을 건 매장을 오픈했다. 그와 존 버넷 영이 함께 연 이 작은 매장의 첫날 매출액은 4.98달러였다고 한다. 찰스 루이스 티파니는 ‘성공의 관건은 무엇보다 훌륭한 디자인’이라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2년 후 동업자와 함께 점차 품목을 다양화해 유리·도자기·식기류·시계·은 제품 등 상품을 선보이며 티파니를 성장시켜 나갔다.
1848년 프랑스 2월 혁명으로 귀족들의 보석이 시장에 대거 나왔다. 티파니는 이를 놓치지 않았다. 고급 보석들을 사들여 보석상으로 이름을 날리기 시작했다. 1850년 티파니는 파리에 ‘티파니, 리드 앤 코(Tiffany, Reed & Co.)’라는 첫 보석 매장을 열었다. 1851년 그는 뉴욕의 은 세공사인 에드워드 챈들러 무어의 사업체를 인수했다. 이때부터 은 제품도 함께 제작해 판매하기 시작했고 티파니의 은 제품들은 유명해졌다. 1853년 티파니는 동업자에게 경영권을 인수해 회사 이름을 ‘티파니 앤 코(Tiffany & Co.)’로 바꿨다. 이때부터 보석을 전문적으로 제작·판매하는 미국의 명품 브랜드로 도약했고 매장을 브로드웨이 550번지로 이전했다.
당시 유명한 보석 브랜드는 모두 유럽에서 시작됐지만 티파니는 유럽의 보석과 차별화되는 모던한 디자인을 콘셉트로 선택했고 뉴욕 상류층에게 인기를 얻기 시작했다. 티파니는 좋은 원석을 발굴하고 매입하는 데 많은 힘을 썼고 동시에 독창적인 디자인 감각이 있는 디자이너와 보석 전문가를 영입했다. 이에 따라 유럽을 중심으로 하는 럭셔리 주얼리 브랜드 분야에서 유일하게 주목받는 미국 브랜드가 됐고 역대 미국 대통령, 영부인, 미국 상류층 사이에서 인기를 얻었다.
아이젠하워, 깎아 달라 요구했다가 거절당해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은 1861년 취임식 때 부인 메리 토드 링컨에게 당시로선 큰돈인 530달러를 주고 티파니의 진주 목걸이·브로치·팔찌 세트를 선물했다.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 역시 약혼반지를 티파니에서 구입했다. 그는 1945년 제2차 세계대전 종반에 열린 얄타회담에 참석했을 당시 티파니의 손목시계를 착용했다. 제2차 세계대전의 영웅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티파니에 관한 흥미로운 일화를 남겼다. 목걸이를 살 때 값을 깎아달라고 요구한 것이다. 그러나 티파니로선 그가 대통령이란 이유로 이런 요구를 들어줄 순 없었다. 그럼에도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티파니 사랑을 이어갔다. 프랑스 대통령을 비롯해 외국 정상들이 미국을 방문할 때 티파니 제품으로 선물하곤 했다.
할리우드 스타 그레이스 켈리의 티파니 사랑도 널리 알려져 있다. 켈리는 모나코 왕자인 레니에 3세와 세기의 결혼식 때도 티파니 제품으로 우아함을 더했다. 그 때 썼던 티아라는 이후 가수 마돈나가 결혼할 때 사용되기도 했다. 역시 할리우드 스타 리처드 버튼은 엘리자베스 테일러에게 티파니의 돌핀 브로치를 선물해 화제를 낳았다. 미국 상류층 패션 흐름을 주도한 영부인 재클린 케네디의 티파니 사랑도 유별나다. 재클린은 의상은 프랑스 지방시를 선호했지만, 아무래도 영부인 신분이다보니 미국 국민의 눈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재클린은 파리 오트쿠튀르에 돈을 바친다는 여론의 뭇매를 맞은 뒤 올레 카시니라는 러시아 출신의 미국 디자이너의 옷을 선택했고 액세서리는 항상 티파니를 애용했다. 재클린은 본인뿐만 아니라 남편 존 F 케네디 대통령의 선물도 티파니에서 즐겨 샀다. 티파니는 이를 세상에 알리지 않았다. 재클린은 케네디 대통령의 장례식에서 지방시 정장을 입고 티파니 진주 목걸이를 했다. 이와 관련된 에피소드가 있는데 재클린은 허리를 숙여 관에 키스할 때 목걸이가 걸리지 않도록 진주 목걸이를 옷에 고정했다. 재클린이 얼마나 완벽주의자였는지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위기 상황에서도 재클린이 얼마나 냉정했는지 회자되는 일화이기도 하다.
재클린이 미국 영부인의 자리에서 내려온 이후에도 티파니에 대한 사랑은 지속됐다. 특히 잔 슐럼버제 티파니 디자이너가 디자인한 고대 미술 기법인 파일로니 에나멜링 기법을 사용해 만든 컬러풀한 팔찌(사진②)는 그녀가 너무나 많이 착용해 ‘재키 팔찌’라는 닉네임까지 붙었다. 이후 ‘재키 팔찌’라는 닉네임이 붙은 후 날개 돋친 듯 팔려 나갔다.
참고 자료 : ‘최고의 명품, 최고의 디자이너(명수진, 삼양미디어)’
류서영 여주대 패션산업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