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일 이어지던 신제품 출시 언제부턴가 사라져... '챗GPT' 등장 이후 AI스피커의 역할은
[이명지의 IT뷰어]이 글을 쓰기에 앞서 몇몇 친구들에게 '요새 AI 스피커로 가장 많이 쓰는 기능이 뭐야?' 라고 물었습니다. 3명이 모두 똑같은 대답을 했네요. “ㅇㅇ야, 오늘 미세먼지 수치 알려줘”
2016년 SK텔레콤이 국내 최초 음성인식 AI 스피커 ‘누구’를 출시한 이후, 국내에서도 AI스피커 각축전이 벌어졌습니다. 그 이후 네이버의 클로바, 카카오의 카카오미니, KT의 기가지니 등 다양한 AI스피커가 출시됐습니다.
그런데 어느샌가 AI 스피커 신제품 출시 소식이 들려오지 않고 있습니다. AI시대의 기대주였던 스피커에 대한 새로운 얘기를 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그 많던 AI 스피커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요?
AI스피커의 현 상황을 알아볼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판매량을 알아보는 것입니다. 하지만 과거에도 지금에도 각 회사별로 판매량을 발표한 적은 ‘단 한번도’ 없습니다. 혹시나 해서 몇몇 회사에 문의해 봤지만, 역시나 대답해 주는 곳은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짐작할 수 있는 수치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IDC에 따르면 지난해 전 세계 스마트 홈 장치의 출하량은 약 2.6% 감소한 8억7400만대입니다. 전 세계를 덮친 인플레이션과 전쟁으로 인한 공급망 이슈도 악영향을 줬죠.
분명한 것은 소비량이 감소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IDC는 이렇게 말합니다. “지난 3~4년 간 판매된 엄청난 양의 AI스피커로 시장이 포화 상태에 이르렀다. 이미 대부분의 가정이 적어도 하나의 AI스피커를 갖게 된 것이다.”
IT사의 사업 영역에서 AI스피커는 조금씩 뒷전이 돼 가고 있습니다. 네이버의 공식 구매처 ‘클로바 스토어’에는 현재 홈 러닝 기능을 갖춘 ‘클로바램프’를 제외하고는 AI스피커를 판매하고 있지 않습니다. 네이버 측은 “솔드아웃 된 제품들은 현재 버전으로 추가 생산 계획이 없어서, 구매가 불가능하다”고 답했습니다. 카카오도 2020년 '미니 헥사' 이후 AI 스피커 신제품을 더 이상 내놓지 않았고요. 삼성전자는 2019년 '갤럭시 홈 미니'를 공개했지만, 시장에 내놓진 않았습니다.
다만 인터넷TV를 볼 수 있는 셋톱박스의 기능을 장착한 통신사의 AI스피커는 비교적 최신작이 있는 편입니다. SK텔레콤이 지난해 9월 화면을 장착한 보이는 AI 스피커 ‘누구 네모Ⅱ’를 출시했네요.
외국은 사정이 어떨까요? 미국의 뉴스 구독 플랫폼 ‘테크브루’는 지난 1월 글로벌 시장을 이끄는 아마존과 구글 모두 AI스피커 시장의 정체에 부딪혔다고 보도했습니다. 아마존이 지난해 11월 대규모의 정리 해고를 발표했을 때 가장 큰 타격을 입은 부서는 바로 AI 스피커 ‘알렉사’를 담당하는 부서라고 하네요. 또 구글 역시 구글 어시스턴트에 대한 투자를 조금씩 줄이고 있다고 합니다.
물론 AI스피커의 기능은 더욱 발전했습니다. 네이버의 클로바램프에는 초거대AI ‘하이퍼클로바’ 기술을 스피커에 접목해 특정한 주제에 대해 자유롭게 질의 응답할 수 있는 ‘똑똑사전’이 추가됐습니다. 단답형 질문은 기본이고 두 가지에 대한 비교나 심화 질문도 가능하다고 하네요.
새로운 쓰임새를 찾기도 했습니다. KT는 돌봄 사각지대를 해소하기 위해 기가지니를 적극 활용 중입니다. 혼자 사시는 어르신이 “지니야 살려줘”라고 외치면 KT텔레캅과 119 연계 시스템을 통해 구조가 가능하다고 합니다. AI스피커가 취약층의 복지에 도움이 된다는 연구 결과도 있습니다. KT는 전남대 생활복지학과 이정화 교수 연구팀과 'AI 스피커 케어서비스'에 관한 연구를 추진했는데요. 연구에 따르면 AI 스피커 이용자들의 건강수준 개선 및 유지 80%, 우울감 감소 63.5%, 고독감 감소 65.9%의 효과가 있었습니다.
전문가들은 결국 AI스피커의 ‘기능’은 남지만 ‘하드웨어’는 사라질 가능성이 크다고 보고 있습니다. 인간의 생활을 이롭게 하는 AI의 기능이 꼭 스피커 형태로 머무를 필요는 없기 때문이죠. 앞으로의 AI스피커는 범용성보다 학습이나 돌봄이 필요한 특정 계층을 겨냥할 가능성이 큽니다.
문제는 ‘수익’입니다. 글로벌 IT 공룡들이 AI스피커 관련 투자를 줄이는 것 역시 더 이상 수익을 내지 못한다는 판단 때문이죠.
'챗GPT'가 연 초거대 AI 시대에 AI 스피커가 어떤 역할을 맡게 될지도 관심사입니다. 전문적 지식을 텍스트로 보여주는 '챗GPT'는 세계 최대 글로벌 검색엔진 '구글'을 긴장시키고 있습니다. 정보 검색에서 구글 대신 챗GPT의 의존하는 비율이 높아질 게 당연하기 때문이죠. 말에서 활자로 AI 산업의 중심이 넘어간 듯한 분위기입니다.
IT기업들은 연일 '초거대 AI 생태계'를 꾸리는 데 여념이 없습니다. 이 과정에서 잠시 잊혀진 AI스피커는 AI 산업에 스쳐 가는 유물로 남게 될까요, 아니면 새로운 형태로 진화하게 될까요?
이명지 기자 mj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