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디컬 고시’ 된 수능…초등학생부터 ‘의대반’ 생겼다[2023 달라진 직업 판도②]

지난해 ‘SKY’ 1873명, 의대 가기 위해 자퇴…의료계 인력난은 여전하다는 모순



“대치동에서 수능은 ‘메디컬(medical) 고시’가 된 지 꽤 됐어요. 성적 최상위권 학생들에게 대학은 ‘의치한약수(의대·치대·한의대·약대·수의대)’와 서울대 나머지 학과로 나뉘죠.”

서울 강남구에서 10년째 영어를 가르치는 학원 강사 주 모 씨가 말했다. 의대가 성공으로 가는 최고의 보증수표로 인식되면서 성적 최상위권 수험생뿐만 아니라 이미 대학에 합격하거나 졸업한 인재들까지 블랙홀처럼 빨아들이고 있다.

입시 학원 관계자들은 성적이 높은 수험생의 80%가 의약학 계열 진학을 꿈꾸고 있다고 말한다. 대치동과 목동 등 학원가에서는 초등생부터 의대 진학반이 개설된다. 실제 한 학원의 ‘초등 5학년 의대반 간담회’ 내용을 살펴보면 간담회 대상 자체가 ‘중등과정을 모두 마무리한 학생의 학부모’다. 중등 수학을 이미 모두 뗀 초등 5학년을 대상으로 고등 수학 마스터반을 운영한다는 내용이다.

강남구의 한 입시 컨설팅 강사 김 모 씨 역시 “예전에는 교과 사교육 시장에서 엄마들의 요구 조건이 ‘우리 아이 수열의 극한을 어려워하니 그 단원을 특별히 더 챙겨 주세요’라거나 ‘SKY 가게 해주세요’였다면 지금은 ‘우리 아이 의대 보내 주세요’가 계약 조건의 모든 것”이라고 말했다.

이 같은 변화는 드라마에서도 읽을 수 있다. 2018년 한국 대학 입시의 불편한 현실을 그린 드라마 ‘스카이 캐슬’ 속 목표가 ‘SKY 대학 진학’이었다면 2023년 사교육 시장을 배경으로 한 드라마 ‘일타 스캔들’에서 상위권 학생들만 수강할 수 있는 ‘올케어반’의 목표는 의대 진학이 됐다. 불과 4년 만에 ‘드라마 속 목표’가 바뀌었다이미 상위권 대학에 합격하거나 졸업한 인재들도 의대로 이탈하고 있다. 지난해 서울대·고려대·연세대(SKY) 등 3개 대학에서 자퇴하거나 등록 포기를 한 중도 탈락자만 1873명으로 집계됐다. 2020년 1337명에서 500명 넘게 늘었다.

중도 탈락자의 75.8%가 자연계였는데 서울대 자연계 중도 탈락자의 비율은 80.6%로 가장 높았다. 이 같은 데이터를 집계한 종로학원은 이 중 80~90%가 의학계열로 이동했다고 추정했다. 최상위권 자연계 학생들이 의대를 제외한 학과로 이탈할 유인이 없기 때문이다. 서울대는 자연계 중도 탈락자 비율이 높은 만큼 수험생들 사이에서 ‘의대생 양성소’로 불리기도 한다.



서울대 공대를 다니다 2020년 서울대 의대에 재입학한 A 씨는 “서울대 공대나 자연대에서도 20~30% 정도는 서울대 의대나 다른 학교 의대로 재입학할 생각을 하는 것 같다”며 “서울대 공대에 올 성적이면 다른 학교 의대에 갈 수 있지 않느냐는 사회적 시선도 무시하지 못하고 본인의 아쉬움도 어느 정도 남아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한국 최고의 과학 인재 양성소인 카이스트에서는 지난 5년간 연평균 100명이 중도 탈락했다. 울산과학기술원(UNIST) 263명, 광주과학기술원(GIST) 150명, 대구경북과학기술원(DGIST) 94명 등 나머지 과학기술원의 5년간 중도 탈락 규모까지 합치면 1006명이 대학을 이탈했다. 과학 인재를 길러 내기 위해 국가가 학비를 지원하는 과학기술원과 영재·과학고 이공계 인재들까지 ‘의대 러시’ 현상이 심화되고 있다는 지적이다.

의대 진학을 위해서라면 합격한 대학을 포기하는 현상이 올해도 두드러질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앞서 2023학년도 대입 수시 전형에서도 서울대·고려대·연세대 수시 전형에 합격하고도 등록하지 않은 학생은 4015명이었다. 고려대와 연세대에선 34개 학과가 추가 합격자로만 모집 인원이 채워졌다. 최초 합격자는 아무도 등록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그중 27개 학과가 자연계였다. 의약 계열 선호 현상과 함께 의대와 약대 진학 방법 중 하나였던 의학전문대학원과 학사 편입 제도가 주요 대학에서 폐지되면서 수능이나 수시를 통해서만 입학이 가능해진 것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불경기에 믿을 것은 의사 자격증전문가들은 이 같은 의대 쏠림 현상이 불경기와 맞물린다고 분석한다.

교육 전문가 김 모 씨는 “한국 사회에서 입시는 가장 솔직한 경기 후행 지표”라며 “한국에서 중공업이 활황기였고 수출이 경제를 먹여 살리던 시절에는 기계공학과나 전기·전자공학과가 각광 받았고 2020년에는 개발자 영입 전쟁으로 초등학생부터 너도나도 코딩을 배우는 게 유행이었다면 지금은 의약학 계열이 ‘유일한 성공 보증 수표’로 통하고 있다”고 말했다.

경기가 불안정한 만큼 고소득과 정년이 보장되는 의약학 계열 전문직이 압도적인 선호를 보이고 있다는 말이다.

의대로 인재가 쏠리자 다른 산업군은 비상이 걸렸다. 특히 국가 수출 경제를 떠받드는 반도체 산업은 인재난이 심화되고 있다. 삼성·SK 등 대기업에서 취업을 보장하는 계약학과임에도 학생의 상당수가 주요 대학 반도체학과 등록을 포기했다.

종로학원에 따르면 2023년 대학 입시에서 연세대 시스템반도체공학과는 10명 모집에 13명의 추가 합격자가 나왔다. 올해 신설된 한양대 반도체공학과는 16명 모집에 44명의 추가 합격자가 나왔다. 모집 인원 대비 약 2배에 달하는 학생이 등록을 포기했다는 뜻이다. 서강대 시스템반도체공학과도 10명 모집에 5차까지 추가 합격자를 발표하고 나서야 충원에 성공했다.

전문가들은 사회 구조나 기업 환경의 획기적인 변화 없이는 의대로 향하는 이공계 인재를 잡기 어려울 것이라고 말한다.

임성호 종로학원 대표는 “대학 졸업이 곧 취업을 보장하는 학과가 거의 없기 때문에 기업에서 대학 졸업생들의 취업이나 처우 관련 사안을 획기적으로 개선하지 않는 이상 의약 계열 선호 현상은 당분간 지속될 것”이라며 “경기 상황이 의약학 계열의 열풍이 이어지느냐 마느냐를 결정할 가장 큰 변수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연봉 4억에도 의사 구하기 어려운 실정이공계 우수 인력의 의대 쏠림 현상이 심각하지만 의료계 인력난은 여전하다는 모순도 있다. 인기 전공 과목에 학생들의 수요가 몰리면서 비인기 전공이나 지방 병원에서는 전문의 부족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이는 곧 의료 공백으로 이어질 수 있어 우려가 커지고 있다. 최근 강원 속초의료원은 응급의학과 전문의를 구하는 데 어려움을 겪으며 연봉을 4억원대까지 높였다. 기존 3억2400만원으로 공고했던 1차 채용에서는 응시자가 한 명도 없어 연봉을 1억원 높였고 2차 채용에서는 단 3명만 지원해 다시 3차 채용 공고를 냈다.

소아과나 산부인과 등 비인기 전공은 전공의 지원이 없어 애를 태우고 있다. 올해 전반기 64개 수련 병원 소아과 전공의 모집에 지원자는 단 33명이었다. 전체 소아과 정원 중 15.9%에 불과했다. 비인기과의 전공의 이탈 현상이 심화되면 해당 학과 전문의가 부족해진다. 대학병원은 전문의만으로 돌아갈 수 없는 구조여서 전공의가 있어야 하는데 전공의가 부족하다 보니 일감이 몰리고 다시 신규 지원이 적어지는 악순환이 이어지고 있다.

경기도 A 대학병원 한 소아과 전문의는 “의대 6년, 수련의 2~4년까지 총 10년을 고생해야 하는 의대생들은 미래와 생존을 고민할 수밖에 없다”며 “소아과 특성상 수가가 낮고 진료 시간은 긴데 저출산으로 절대적인 환자 수가 줄고 있기 때문에 미용으로 빠지는 전문의들도 늘고 있다”고 말했다.

필수 의료 분야나 연구와 개발에 매진하는 의사과학자 인력 역시 크게 부족한 실정이다.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현재 전국 의사과학자는 약 1300명으로, 전체 의사 수의 약 1.2%에 불과하다. 한 해 배출되는 의사과학자도 30명 정도로, 미국의 1700명 등에 비해 크게 부족하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정부는 카이스트와 포스텍에 연구 중심 의대 설립을 적극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그동안 답보 상태에 있던 의대 신설과 정원 확대 움직임이 나타나면서 의대 쏠림 현상의 새로운 변수가 될 수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임성호 대표는 “한때 교사가 선풍적인 인기를 끌던 시대도 있었지만 학령 인구 감소와 연금 등 다양한 사회적 변화로 인해 인기 직업에서 밀려난 것처럼 의약 계열 공급이 늘고 경기가 회복된다면 새로운 변수가 있을 수 있다”며 “지난해 25만 명이 태어났는데 현재 의치한약수 선발 인원을 다 합치면 7000명 정도다. 그러면 1년에 태어나는 인구수 대비 3%가 의약 계열이라는 얘기인데 이게 적정 규모인지는 시간이 지나 사회가 판단할 것”이라고 말했다.


김영은 기자 kye0218@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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