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권에서 촉발된 SVB 파산…향후 채권 가격 상승으로 경기 침체 가능성 높아
[글로벌 현장]일요일이던 3월 19일 저녁. 스위스 1위 은행인 UBS가 예정에 없던 기자 회견을 열었다. 깜짝 발표 내용은 2위 은행인 크레딧스위스(CS)를 인수하겠다는 것. 크레딧스위스가 위기를 맞았다지만 두 은행 간 인수·합병(M&A)은 충격적이었다. 결합 가능성이 제기된 직후 두 은행 모두 강하게 손사레를 쳤다는 점에서다.
UBS와 CS는 오랜 라이벌 이상이었다. 2019년 CS 임원이 UBS로 이직하는 과정에서 ‘스파이 스캔들’이 불거졌고 감정싸움으로 비화했다. CS 내에서 줄사퇴가 이어지는 등 내홍이 컸다.
조직 문화가 상이한 스위스의 대표적인 금융그룹들은 어쩌다 한솥밥을 먹게 됐을까.
발단은 실리콘밸리은행의 ‘미스 매치’
CS는 미국 은행 위기 여파에 휩쓸린 사례다. CS 위기가 본격화하기 직전 지역 은행 파산 도미노가 있었다.
먼저 쓰러진 곳은 실리콘밸리에서 스타트업과 바이오 기업들의 금융 업무를 도맡던 실리콘밸리은행(SVB)이었다. 재무 구조를 개선하겠다며 총 22억 달러를 조달하는 계획을 내놓은 지 불과 이틀 만이었다.
미국 자산 순위 16위이던 SVB는 역대 둘째로 큰 파산 은행이란 꼬리표를 붙였다. 역대 최대는 2008년 글로벌 금융 위기 때 무너진 워싱턴뮤추얼은행이었다.
SVB에 이어 뉴욕 지역 은행인 시그니처은행이 부도를 냈다. 역대 셋째로 큰 은행 파산으로 기록됐다. 시그니처은행은 뉴욕 커뮤니티은행의 자회사인 플래그스타에 헐값에 팔렸다.
글로벌 금융 위기가 15년 만에 재발할 수 있다는 우려가 잇달아 제기됐다. 무엇이 문제였을까.
일단 이번 지역 은행의 위기는 자초한 측면이 크다는 분석이다. SVB 등은 고객이 맡긴 단기 예금을 주로 장기 채권에 투자했다. 국채와 주택저당증권(MBS) 등 미국 정부 채권 위주였다. 달리 안전하게 굴릴 투자처가 마땅하지 않아서다. 마침 대출 수요도 감소하던 때였다.
미 정부 채권의 부도 위험은 사실상 ‘제로’다. 수익률 역시 쏠쏠한 편이었다. SVB가 매입한 국채 등 보유 잔액이 2021년 기준 1280억 달러나 됐던 배경이다.
이상 신호가 감지된 것은 미 중앙은행(Fed)이 작년 3월부터 공격적인 금리 인상에 나서면서부터다. Fed는 네 번에 걸쳐 75bp(1bp=0.01%포인트)씩 올리기도 했다. 국채 금리가 가파르게 뛰자 채권 값이 급락했다. 국채를 쌓아 놓은 은행으로선 막대한 평가 손실이 불가피했다. 더구나 SVB의 자산 대비 채권 비율은 55%에 달할 정도로 높았다.
자금 압박을 받은 것은 비단 은행만이 아니었다. 지역 은행에 돈을 넣은 기업은 신규 투자나 대출이 여의치 않자 기존 예금에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SVB 등을 찾아 예금 인출을 요구했다. 은행으로선 장기 채권을 팔아 급하게 돈을 내줘야 하는 처지가 됐다.
SVB 부도설이 급속히 퍼진 것도 이때다. 이 은행은 예금 인출 요구에 부응하기 위해 서둘러 채권 210억 달러어치를 매각했다. 이 과정에서 18억 달러의 손실이 발생했다고 공시했다. 자본금이 부족해 증자를 추진하자 순식간에 뱅크런(대규모 예금 인출)이 발생했다. 최악의 악순환 고리가 생성된 것이다.
미국 국채는 사실상 무위험 자산이다. 부도 확률이 거의 없다는 얘기다. 하지만 안전 자산인 채권이 초유의 위기를 불러왔다는 점에서 이례적이란 평가다.
CS가 매각되는 과정에서도 채권이 ‘위기의 또 다른 진원지’란 우려를 낳았다. CS가 발행했던 173억 달러 규모의 신종자본증권인 AT1(코코본드)가 문제였다.
인수 주체인 UBS와 피인수 기업인 CS는 AT1 채권을 전액 상각 처리한다는 데 합의했다. AT1은 자본을 늘려 주는 효과를 내는 채권으로, 2008년 금융 위기 이후 추가적 완충 장치로 도입됐다. 유럽에서만 2750억 달러의 시장을 형성하고 있다.
AT1이 다른 채권보다 후순위이기는 하지만 주식보다 밀렸다는 것은 시장 교란 위험이 크다는 게 일반적인 평가다. UBS와 CS 합병 과정에서 CS의 주식 22.48주당 UBS 주식 1주를 지급하면서 CS 주주는 일정 부분 보호해 줬지만 AT1 채권 보유자는 한 푼도 건질 수 없게 됐다는 것은 비상식적이란 얘기다. 합병 과정이 공개된 뒤 미국과 유럽 등의 채권 가격이 한때 급락했던 배경이다.
패트릭 카우프만 아퀼라자산운용 매니저는 “AT1은 분명 주식보다 선순위”라며 “(AT1 대신) 주주 가치가 제로가 됐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크리슈나 구하 에버코어ISI 전략가는 “AT1의 완전 상각 처리로, 유럽 시스템 위기가 불거질 수 있다”고 경고했다.
JP모간은 “대부분 은행의 AT1 금리는 최근까지 연 8~10%였다”며 “앞으로 채권 투자자들이 더 높은 비용(금리)을 요구하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은행권의 자본 조달 비용이 커질 것이란 논리다. JP모간은 “AT1의 완전 상각 처리로, 시스템 전반의 비용이 늘어나게 됐다”고 설명했다.
15년 만에 제2 금융 위기로 번지나
금융권에선 또 다른 지역 은행 파산이 가시화하지 않을까 전전긍긍하는 분위기다. 위기의 불길이 업계 전반으로 확산할 가능성을 염려하는 것이다. 암호화폐 전문 은행인 실버게이트캐피털은 차치하고라도 SVB와 시그니처은행에 이어 또 다른 은행의 파산이 현실화하면 대형 은행도 안심할 수 없을 것이란 우려다.
시장은 캘리포니아에 본사를 두고 있는 퍼스트리퍼블릭은행을 주시하고 있다. JP모간 등 대형 11개 은행이 긴급 자금 300억 달러를 예치했지만 예금이 꾸준히 이탈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연방 정부는 긴급 진화에 나섰다. 재닛 옐런 재무장관은 “은행 위기가 악화하면 예금에 대해 추가 보증할 준비가 돼 있다”고 강조했다. SVB와 시그니처은행 예금자에 대해 100% 보장해 줬던 것처럼 다른 은행에도 같은 조치를 취할 것이란 점을 분명히 한 것이다. 원래 미국 내 예금 보험 한도는 개인·기업당 25만 달러다.
전문가들은 향후 채권 가격이 점진적으로 오를 것으로 보고 있다. Fed의 기준금리 인상이 한계에 다가가고 있다는 점에서다. 채권 가격이 오르면 은행권의 평가 손실 위험은 누그러질 수 있다. 단기적으로 불거진 위기를 잘 관리하면 제2의 금융 위기는 피할 수 있다는 얘기다.
하지만 채권 움직임을 바탕으로 측정한 경기 침체 가능성은 매우 높다는 게 대체적인 견해다.
웰스파고는 최근 “12개월 내 침체 가능성이 높아졌다”는 보고서를 내놓았다. 국채 10년물과 1년물의 역전 현상이 작년 8월 임계점을 돌파해 연내 침체 확률이 91%로 계산됐다는 설명이다. 이 은행은 “1955년 이후 Fed 금리가 국채 10년물 금리의 저점을 돌파할 때마다 18개월 내 침체가 닥쳤고 통화 정책 변화(피벗)를 수반했다”고 설명했다.
에릭 존스톤 캔터피츠제럴드 분석가는 “국채 금리의 움직임을 보면 훨씬 빠른 침체가 다가오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고 강조했다.
뱅크오브아메리카의 마이클 가펜 이코노미스트는 “은행 위기가 전반적인 대출 긴축으로 연결되면서 경제 활동에 하방 압력을 가하고 있다”며 “대기업보다 은행 의존도가 높은 소기업과 가계가 진짜 문제”라고 지적했다. 그는 “올 하반기 완만한 침체가 닥치고 내년 2분기엔 실업률이 4.7%까지 높아질 것”이라고 예상했다.
‘신흥 채권왕’으로 불리는 제프리 건들락 더블라인캐피털 창업자는 “상당히 오랜 기간 역전돼 온 국채 10년물과 2년물 금리가 은행 위기 이후 급변동하고 있다”며 “채권 시장만 놓고 보면 기존 예상보다 훨씬 빨리 침체가 닥칠 수 있다”고 예상했다.
뉴욕(미국)=조재길 한국경제 특파원 road@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