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0조 걸었다’ 용인에 시스템 반도체 판 벌인 삼성전자

세계 최대 규모의 클러스터 구축 목표…이유는 글로벌 반도체 패권 전쟁

삼성전자가 300조원을 투자해 경기도 용인에 시스템 반도체 생산라인을 짓는다. (사진=삼성전자)

삼성전자가 세계 최대의 반도체 허브를 한국에 짓는 작업에 착수했다. 화성·기흥·평택 등에 이은 새로운 클러스터를 용인에 조성할 계획이다. 삼성전자는 2042년까지 ‘용인 시스템 반도체 클러스터’에 300조원을 투자하기로 했다.

목표는 세계적 비메모리 생산 기지 확보다. 비메모리 세계 1위가 될 전진 기지를 통해 세계적인 반도체 자국 생산에 맞서겠다는 전략이다. 왜 ‘300조원’인가새로운 반도체 클러스터가 들어설 지역은 경기 용인시 남사읍이다. 규모는 약 710만㎡(약 215만 평)로 시스템 반도체 공장이 집중적으로 들어선다. 1공장(P1)부터 가동한 뒤 순차적으로 5공장(P5)까지 확장할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삼성전자는 용인 공장에서는 2나노(nm, 1nm는 10억 분의 1m) 이하 초미세 공정을 적용할 계획이다. 반도체 칩 회로 선폭의 기준을 나노미터 단위로 분류하는데 5나노 이하 기술은 ‘초미세 공정’이다.

쉽게 말해 다음 세대의 비메모리 반도체가 이곳에서 만들어진다. 삼성전자는 지난해 하반기에 비메모리 반도체 3나노 양산에 성공했다. 3나노 공정은 현존하는 반도체 제조 공정 가운데 가장 앞선 기술로, 2나노는 아직 세상에 나오지 않은 차세대 기술에 해당한다.

이번 발표가 새로운 내용은 아니다. 이전에도 삼성전자는 시스템 반도체에 대한 투자를 꾸준히 밝혀 왔고 300조원 투자는 앞서 발표한 내용을 보완하는 수준이다.

2019년 삼성전자는 2030년까지 파운드리와 시스템LSI 사업 등 전반적인 시스템 반도체에 133조원을 투자하겠다고 밝혔고 2021년에는 다시 이 금액에서 38조원을 추가해 171조원으로 늘렸다. 과감하고 선제적인 투자를 통해 한국의 시스템 반도체 수준을 끌어올리겠다는 목표도 제시했다. 이번 투자는 2년 만에 2배 가까이 확대한 셈이다. 다만 이제 막 투자 계획을 발표한 만큼 연도별 투자 규모나 구체적인 계획 등 세부 사항은 정해지지 않은 상태다.

삼성 측은 “팹(공장) 하나 짓는데 50조원이 들어가는 만큼 5공장까지만 지어도 각종 유지비용을 합쳐 300조원은 들어간다”고 설명했다. 여기에는 연구·개발(R&D), 인력 채용 등도 포함된다.

‘300조원’은 글로벌 반도체 시장에서 주도권을 확보하기 위해 필요한 조건이다. 미국은 반도체 지원법을 통해 약 2000억 달러(약 262조원)의 민간 투자를 유치했다. 중국은 이미 2014년부터 ‘반도체 굴기’를 선언하고 약 450억 달러(약 57조원) 규모의 국가 집적회로 산업투자펀드를 설립했다. 지난해 말에는 미국의 반도체 견제에 맞서기 위해 향후 5년간 자국 반도체 산업을 키우는 데 사용할 1조 위안(약 190조원)의 보조금 지원 계획을 내놓기도 했다. 한국에서는 삼성전자가 직접 나서는 셈이다.

반도체는 ‘규모의 경제’가 주도권 확보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 메모리 제조 분야 역시 대규모의 적기 투자로 우위를 점한 만큼 비메모리 역시 대규모 투자가 필요하다. 업계 한 관계자는 “기술력뿐만 아니라 규모의 경제를 통해 경쟁력을 확보하는 것이 반도체 생태계의 특징”이라고 말했다.왜 ‘용인’인가용인은 이미 지어진 삼성전자의 반도체 단지와도 인접해 대규모의 클러스터를 구축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삼성전자는 현재 경기도 기흥·화성·평택 등에 반도체 공장을 가동 중이고 인근의 충청남도 천안·아산(온양) 캠퍼스와도 가깝다. 용인의 시스템 반도체 공장이 가동된다면 경기권에 대규모의 설계·제조·후공정 생태계가 만들어진다.

이는 대만이 신주시에 ‘과학산업단지’를 구축한 것과 같은 전략이다. 대만 정부는 1980년 산학연 협력을 통해 반도체 중심의 산업 단지를 조성했다. 최초 개발 규모는 577만㎡(약 175만 평)이고 총투자 금액은 당시 16억7900만 달러에 달했다. 여기에 세계 최대의 파운드리(반도체 수탁 회사)인 TSMC와 유나이티드마이크로일렉트로닉스(UMC) 등의 본사가 있다.

대만 정부는 R&D·생산·업무·생활·레저 등 다양한 분야에서 개선된 환경을 구축하기 위해 과학산업단지관리국(SIPA) 주도로 신주 과학산업단지를 계획했다. 이후 첨단 기술 인재를 유치하고 첨단 기술을 도입했다. 지금의 TSMC가 1위 회사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도 신주과학단지에 대한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이 뒷받침됐기 때문이다.

삼성전자는 현재 경기도 기흥, 화성, 평택 등에 반도체 공장을 가동 중이며, 인근의 충청남도 천안, 아산(온양) 캠퍼스와도 가깝다. (사진=삼성전자)


SIPA에 따르면 현재 신주 과학산업단지에 등록된 제조업체는 600개 이상이고 근무자는 16만 명을 넘어섰다. 이후 대만 정부는 가오슝 중심의 남부과학산업단지(1997년 설립), 중싱·후웨이 중심의 중부과학산업단지(2003년 설립) 등을 추가로 구축하며 3대 반도체 클러스터를 만들었다.

한국에서도 이와 비슷한 전략으로 대규모 반도체 클러스터를 만들기 위해 용인을 택했다. 용인 대규모 시스템 반도체 클러스터 구축을 통한 직간접 생산 유발 효과는 700조원, 고용 유발 효과는 160만 명으로 예상된다.왜 ‘지금’인가현재 글로벌 반도체 시장의 가장 큰 화두는 ‘공급망 재편’이다. 대규모 공급망의 확보 여부는 국가 경쟁력으로 이어지는 민감한 문제다. 반도체 제조 경쟁력이 국가의 경쟁력을 예측하는 바로미터가 될 수 있다는 시각도 지배적이다.

게다가 시기를 놓치면 향후 수십 년간 이어질 반도체 패권 경쟁에서 밀릴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면서 반도체 기업을 보유한 주요 국가들은 반도체 생산 라인을 확보하기 위해 나서고 있다. 미국 정부가 현지에 반도체 공장을 짓기를 원하는 것도 공급망을 확보해 자국의 경쟁력을 끌어올리기 위한 시도다.

지난 1월 월스트리트저널은 “미국이 ‘새로운 석유’로 언급되는 반도체 공급을 위해 수십억 달러를 지출하고 있다”며 “지난 2년간 반도체가 석유만큼 경제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이해했다”고 보도했다. 매체는 “한국·중국·대만 등에 반도체 생산이 집중돼 미국 지도자들이 불안해한다”고 덧붙였다.

미국 반도체산업협회(SIA)에 따르면 미국의 반도체 제조 능력은 글로벌 시장에서 12%에 그친다. 1990년대에는 37%를 차지했지만 점차 비율이 낮아졌다. 글로벌 반도체 시장의 제조 비율은 대만 TSMC와 한국 삼성전자가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팻 겔싱어 인텔 최고경영자(CEO) 역시 미국 경제 매체 CNN과의 인터뷰에서 “지난 50년은 석유가 지정학적 판도를 결정지었다”며 “하지만 앞으로 50년은 반도체가 어디에서 생산되느냐가 석유보다 중요해질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반도체 생산 시설이 어디에 있는지가 지금의 가장 핵심 문제”라고 덧붙였다.

한국에서는 삼성전자를 중심으로 대규모 공급망을 구축하고 있다. 삼성전자가 들어서는 용인시 남사읍 인근에 SK하이닉스도 415만㎡ 규모의 메모리 반도체 단지를 구축 중이다. 투자 금액은 121조8000억원 규모다.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은 지난 2월 천안·온양 반도체 패키지 사업장을 방문해 “어려운 상황이지만 인재 양성과 미래 기술 투자에 조금도 흔들림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당부하기도 했다.

최수진 기자 jinny0618@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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