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300조 투자’에 시골 마을 들썩…하루 새 1.5억 오른 단지도
입력 2023-03-27 07:33:30
수정 2023-03-27 07:33:30
“세계 최대 반도체 클러스터” 발표에 남사읍· 이동읍 매수 문의 빗발
3억5000만원 계약→해지→호가 5억으로
반도체 중심 K-실리콘힐즈 탄생?…실제 조성까지는 멀었다
“300조원 투자 계획 발표 전에는 집주인들이 제발 팔아 달라고 했던 아파트였죠. 거래가 한 달에 한 건 있을까 말까 했는데 지금은 집주인들이 매물을 다 거뒀어요.”(용인시 처인구 이동읍 레이크공인중개사사무소)
“15일 전에 계약한 집주인들이 배액을 상환하면서 계약을 해지하고 있어요. 14일 3억5400만원에 거래됐던 매물이 하루 만에 계약 해지됐고 같은 평형 호가가 5억으로 올랐죠.”(용인시 처인구 남사읍 한숲명품공인중개사사무소)
용인 부동산 시장이 들썩이고 있다. 집주인들은 매물을 거둬들이고 있고 호가가 하루 만에 1억5000만원 오른 단지도 있다. 기존에 개발이 이뤄졌던 수지나 기흥이 아니다. 용인에서도 개발이 늦고 낙후 지역이었던 동남부가 시끄럽다. 정부와 삼성전자가 용인에 300조원을 들여 ‘세계 최대 규모의 시스템 반도체 클러스터’를 짓겠다는 계획을 발표했기 때문이다.
발표는 갑작스러웠다. 정부가 사업 예정지로 발표한 지역은 용인시 처인구 남사읍과 이동읍 일대다. 3월 15일 정부 발표와 동시에 용인시 처인구 남사읍과 이동읍 전체가 토지거래허가구역으로 지정됐다. 비닐하우스 즐비한 동남부 개발 시동 걸리나
3월 21일 찾은 처인구 남사읍과 이동읍은 한가한 시골 동네였다. 비닐하우스가 즐비한 농지나 임야가 대부분이고 인근에는 이미 북리산업단지와 완장일반산업단지, 용인테크노밸리 등 산업 단지와 물류센터가 곳곳에 자리하고 있다. 이 때문에 고속도로와 국도에는 물류 트럭 행렬이 이어졌다. 이곳을 지나는 수많은 물류 트럭은 인근 도로의 교통난을 유발하는 주범이기도 하다.
시스템 반도체 클러스터가 들어설 개발 사업 예정지는 710만㎡(250만 평)에 이른다. 기존 삼성전자 용인 기흥·화성·평택 캠퍼스를 다 합친 것보다 20% 정도 더 넓다.
삼성전자는 이 부지에 첨단 반도체 제조 라인 5개를 구축할 계획이라고 정부에 보고했다. 삼성전자는 구체적으로 어떤 생산 시설이 들어설지 발표하지 않았지만 정부는 이곳을 ‘시스템 반도체 클러스터’로 만들겠다는 계획을 마련했다.
용인시가 발표한 ‘개발 행위 허가 제한 구역’을 보면 클러스터가 조성될 부지를 대략적으로 알 수 있다. 남사읍은 완장리와 창3리 등 임야 지역 일부가 포함됐고 이동읍이 예정지 면적의 대부분이었다.
3월 21일 처음 찾은 곳은 남사읍 e편한세상 한숲시티 5단지다. 이곳은 남사읍의 유일한 대단지 아파트다. 농지와 썰렁한 산업 단지를 지나면 갑자기 6800가구가 들어선 대규모 주거 단지가 등장한다. e편한세상 한숲시티 2~6단지가 모여 있는 곳이다.
아파트 단지를 따라 대형 상권이 정비돼 있어 이곳만 유독 활기가 돈다. 이 아파트 바로 옆 절대 농지부터 반도체 클러스터가 들어설 땅이다. 당연히 발표 직후 아파트도 수혜를 봤다. e편한세상한숲시티 5단지 84㎡ 호가는 3월 15일 발표 직후 1억5000만원 올랐다. 인근 공인중개업소에 따르면 불과 하루 전인 3월 14일 3억5000만원에 계약했던 매물도 집주인이 개발 소식을 듣고 계약을 해지했다. 현재 같은 평형의 호가는 5억원이다.
e편한세상 한숲시티에서 만난 주민 한 모 씨는 “그동안 동탄으로 가려면 82번 국도밖에 없었고 용인에 가려면 321번 국도밖에 없었는데 인근에 큰 물류센터와 산업 단지가 많아 교통 상황이 너무 좋지 않았다”며 “우리는 실거주라 도로가 크게 생기고 인프라가 좋아질 것이란 기대감이 가장 크다”고 말했다. 아파트·토지 소유주 희비 엇갈려반도체 클러스터 조성 소식을 모두가 환영하는 것은 아니다. 아파트 소유주들은 밝게 웃었고 토지 소유주와 개발 수용 지역에 묶인 원주민들은 우려를 표했다. 아파트는 토지거래허가구역으로 묶이더라도 대지 지분이 일정 면적을 넘지 않거나 구청의 허가를 받으면 거래가 가능하다. 하지만 ‘개발 행위 허가 제한 구역’으로 묶인 토지는 3년간 건축물의 신축이나 증개축, 토지 형질 변경, 벌채 및 식재 등이 제한된다.
특히 임야와 농지가 대부분인 이동읍에는 곳곳에 개발을 반대하는 현수막이 곳곳에 걸려 있었다. 이동읍 대부분이 수용 지역으로 묶인 만큼 토지 보상에 대한 우려와 고향을 떠나야 하는 걱정 섞인 목소리가 많았다.
이동읍 시미리 마을회관 앞에서 만난 유환철(63) 씨는 “35년 동안 이곳에 살았는데 이동읍 대부분이 수용 지역에 묶여 고향을 떠나야 하는 주민들의 분위기가 좋지 않다”며 “인근 산업 단지 조성 때 보상을 제대로 못 받은 사례를 많이 봐 어디로 갈 수 있을지 고민”이라고 말했다.
이동읍의 한 공인중개업소 관계자는 “이동읍은 농지나 임야가 대부분인데 오래 살았던 원주민들은 걱정이 더 큰 것 같다”며 “발표 직후 하루에 한 건 정도 오던 매수 문의가 20건 정도로 늘었지만 농지와 임야 가격은 이미 2019년 SK하이닉스의 투자 계획 발표 당시 많이 올랐고 물건도 없어 거래가 되지는 않고 있다”고 말했다.
밸류맵에 따르면 2022년 이동읍에서 거래된 한 토지(176평)는 3.3㎡당 매매 가격이 242만원으로 직전 거래인 2006년 80만원에 비해 약 3배 정도 올랐다. 현재는 매물로 나온 토지가 없는 상태다. 또 이 지역 토지 경매 물건은 2022년 12건이 나왔는데 현재는 모두 경매가 취소된 상태다.
이동읍에서도 아파트는 분위기가 다르다. 송전마을 세광엔리치타워 아파트는 용인 시스템반도체 클러스트 예정지에 속한 유일한 대단지(782가구)다. 2013년 입주를 시작한 이 아파트의 분양가는 109㎡(33평) 기준 2억4000만원이었다. 입주 후 10년이 지난 지난 1월에도 2억4000만원에 급매가 이뤄졌던 곳이다. 분위기는 두 달 만에 반전됐다.
3월 18일 토요일 3억1000만원에 나온 급매가 바로 거래됐다. 두 달 만에 급매 가격이 7000만원 오른 셈이다. 김선영 레이크공인중개사무소 대표는 “토지 거래 허가 제도 시행이 3월 20일부터라 3월 15일부터 닷새 동안 매수 문의가 끊이지 않았다”며 “투자 계획 발표 전 10개 넘게 나와 있던 매물이 지금은 모두 들어갔다”고 말했다. 집주인들이 정부의 용인 시스템 반도체 클러스터 조성 계획을 듣고 매물을 모두 거뒀기 때문이다. 아파트가 속한 송전지구는 용인시가 1360가구를 수용할 주거 단지로 개발할 예정이었다. 기흥~화성~용인~평택~판교 잇는 K-실리콘힐즈 탄생하나
부동산업계 관계자들은 용인 시스템 반도체 클러스터 계획 발표로 그동안 지지부진하던 용인 지역의 각종 개발 사업에도 시동이 걸릴 것으로 보고 있다. 일대 부동산 개발 관계자에 따르면 이동읍 행정복지센터 인근에서 진행하던 용인 이동 도시 개발 사업이 부동산 침체로 지지부진했는데 이번 국가 산단 발표로 힘을 받는 분위기라고 설명했다.
이 밖에 반도체 클러스터 예정지에는 포함되지 않았지만 남사읍 서쪽(통삼리·봉명리·봉무리 일원)에서 진행되고 있는 남사복합신도시(650만㎡) 개발도 본격적인 사업에 청신호가 켜졌다. 남사복합신도시는 2008년부터 공영 개발 방식의 택지 개발 사업을 추진됐던 곳이었지만 2009년 글로벌 금융 위기에 따른 유동성 악화로 한국토지주택공사(LH)가 사업을 포기하며 장시간 표류했다.
현재는 용인시가 ‘2035년 용인 도시 기 본계획’으로 남사복합신도시 사업을 추진 중이다. 계획대로라면 반도체 클러스터 조성과 함께 인근에 용인 마지막 복합 신도시가 완성되는 셈이다.
용인은 광역 교통 대책이나 대단위 마스터플랜 아래 계획된 인근 동탄신도시나 판교신도시와 달리 ‘난개발’이 문제로 꼽혀 왔다. 국지적 개발이 이뤄져 죽전이나 기흥 등 서북부 지역은 발전했는데 동남부 지역은 그동안 개발에서 배제돼 왔다. 교통 인프라도 차이가 난다.
이번 클러스터 예정지인 남사읍과 이동읍에는 현재 철도 교통이 전무하다. 남사읍 대단지인 e편한세상한숲시티 인근에도 지하철이나 기차역이 없다. 이동읍도 마찬가지다. 인근 동탄이나 용인 시내에서도 지하철과 버스를 몇 번 타야만 이동할 수 있는 지역이다. 집값 차이도 크다.
부동산 데이터 플랫폼 부동산 지인에 따르면 3월 21일 기준 수지구 죽전동의 3.3㎡당 평균 매매 가격은 1942만원이다. 반면 남사읍의 3.3㎡당 평균 매매 가격은 1078만원, 이동읍은 780만원으로 차이가 크다. 반도체, 미국·대만처럼 생태계 중심으로
지금까지 개발이 지지부진하던 용인 동남부가 삼성전자의 300조원 투자로 명실공히 세계 최대 ‘반도체 메카’로 자리 잡게 되는 것이다. 삼성은 용인 클러스터에 5개 생산 공장을 짓기로 했다.
용인 클러스터에는 삼성전자뿐만 아니라 반도체 소재·부품·장비·팹리스 등 반도체 생태계 전반이 들어선다. 반도체 투자 경쟁이 ‘국가전’으로 번진 만큼 기업 한두 곳의 경쟁력이 아니라 생태계 전반의 경쟁력이 필수라는 기업과 정부의 의견이 일치한 것 것이다. 특히 반도체 산업은 설계부터 생산·후공정·장비 등 모든 단계가 유기적으로 연결된다.
새롭게 단지를 조성하는 용인 클러스터는 삼성전자의 기존 생산 단지인 기흥·화성·평택과 인접해 있다. 클러스터가 완성되면 기흥~화성~용인(남사·이동읍)~평택으로 이어지는 삼성전자 생산 라인이 만들어지는 셈이다. 여기에 정보기술(IT) 기업과 반도체 설계 기업이 밀집해 있는 판교와도 가까워 시너지가 클 것으로 기대된다.
미국·대만·중국 등에서도 반도체 클러스터를 중심으로 반도체 생태계가 하나로 움직인다. 국토 면적이 한국의 98배인 미국의 반도체 제조 공장은 애리조나·뉴욕·텍사스 주 등 3개 지역에 모여 있다. 대만은 국토 남쪽부터 북쪽까지 다양한 과학 단지를 조성해 반도체 벨트를 형성하고 있다.
전황수 한국정보통신연구원(ETRI) 책임연구원은 “대만은 반도체 클러스터인 신주과학단지에 TSMC뿐만 아니라 국책 연구 기관인 ITRI, 이공계로 유명한 국립칭화대·국립교통대, 다른 반도체 기업인 UMC·미디어텍·리얼텍 등 반도체 생태계가 모두 밀집해 있어 산학연 협력이 활성화됐다”고 말했다.
대만 내 TSMC 생산 공장은 신주과학단지뿐만 아니라 룽탄·중부·남부 과학 단지 등 다양한 반도체 클러스터에 자리해 있다. 이들 과학 단지에는 TSMC뿐만 아니라 국책 연구 기관, 이공계 대학, 다른 반도체 생태계가 모두 밀접해 있어 산학연이 연결되는 구조다.
전 연구원은 “반면 한국은 국책 연구원은 대전에, 이공계 대학은 서울과 대전에, 기업의 반도체 생산 공장은 기흥·평택·이천 등에 분산돼 있었다”며 “이번 클러스터 조성을 통해 연구나 생산 인재 풀 구축이 수월해지고 정부가 클러스터 전체 규제를 빠르게 풀어 주고 지자체가 협력하는 방식으로 가면 속도감 있게 투자 진행과 생산 공장 착공에 들어갈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업계에선 용인 클러스터에서 유발되는 직접 고용 3만 명에 관련 협력 업체, 건설·운송 등 전방위 산업 고용 유발 효과도 160만 명으로 예상한다. 용인 클러스터 인근인 처인구 원삼면에는 SK하이닉스가 415만㎡ 규모의 부지에 121조8000억원을 쏟아 첨단 메모리 반도체 클러스를 짓고 있다. 이들 계획이 일정대로 실현되면 용인시는 2042년 세계 최대 반도체 국가 첨단 산업 단지를 보유한 도시로 탈바꿈할 예정이다.
산업 측면에서는 반도체 중심축이 바뀔 수 있는 기회다. 2019년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은 2030년까지 메모리뿐만 아니라 시스템 반도체 세계 1위에 오르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삼성전자가 지난 몇 년간 매년 40조원 단위의 설비 투자를 단행한 이유다.
지난해에는 세계 최초로 3나노미터 초미세 공정을 개발하며 파운드리(반도체 수탁 생산) 방식으로 이뤄지는 시스템 반도체 공정 기술에서 경쟁력을 확보했다. 하지만 세계 1위 파운드리 기업 TSMC의 벽은 여전히 높다. 지난해 4분기 파운드리 시장점유율을 보면 TSMC는 58.5%, 삼성전자 15.8%로, 42.7%포인트 차이가 나며 3분기보다 격차가 더 벌어졌다. 용인 시스템 반도체 클러스터에 삼성전자가 300조원을 투입하면 기술 경쟁력뿐만 아니라 생산 능력에서도 TSMC 추격에 속도가 날 수 있다. 실제 조성까지 갈 길 멀다하지만 실제 조성까지 갈 길이 멀다. 완공 계획이 2042년이라 앞으로 20년이 더 남았다. 토지 보상, 공업 용수 확보, 전력 공급 등 반도체 공장 착공 전 풀어야 할 문제가 산적해 있어 장기전이 될 수 있다. 일례로 평택 고덕산업단지가 2006년 지정된 이후 삼성전자 평택캠퍼스가 2015년 착공하기 까지 10년이 걸렸다. SK하이닉스 용인 생산 공장이 들어설 원삼면 반도체 클러스터 역시 2019년 계획 발표 이후 이제야 토지 보상이 마무리 된 상태다. 아직 착공은 하지 못했다.
반도체업계 관계자는 “기업 한 곳의 투자 계획이 아니라 정부에서 인허가나 기반 시설 구축 등 전방위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고 한 만큼 기존보다 빨리 착공될 것으로 기대한다”며 “다만 투자 계획이 완료될 때까지 20년이 걸리는 만큼 용인 클러스터 구축도 애초에 장기전을 예상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김영은 기자 kye0218@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