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급한 불’ 껐지만 언제 다시 타오를지 모르는 뱅크데믹

재무제표 건실한 도이체방크마저 ‘위기설’…은행에 대한 투자자 불신 커져

[비즈니스 포커스]

독일 최대 투자은행인 도이체방크의 위기설은 투자자들의 은행에 대한 불신을 잘 보여주는 예다. 사진=연합뉴스


미국 연방예금보험공사(FDIC)는 3월 27일 성명을 통해 퍼스트시티즌스은행이 실리콘밸리은행(SVB)의 모든 대출·예금·지점을 인수하는 것에 합의했다고 발표했다. 퍼스트시티즌스는 노스캐롤라이나 주 롤리에 본사를 둔 중소 은행이다. 2022년 기준 총자산이 1093억 달러(약 142조원)로 미국 내 30위 수준이다. 퍼스트시티즌스는 SVB가 보유한 720억 달러(약 93조6000억원)의 자산을 165억 달러(약 21조4000억원)에 인수했다.

SVB 파산 여파로 무너졌던 시그니처은행도 예금과 일부 대출 자산을 뉴욕 커뮤니티뱅코프(NYCB)의 자회사 플래그스타은행에 매각했고 파산설이 돌았던 스위스의 글로벌 투자은행(IB) 크레딧스위스(CS)는 UBS와 합병 절차를 진행하고 있다. UBS는 CS를 30억 스위스 프랑(약 32억 달러)에 인수하기로 합의한 상태다.

파산을 선언했거나 위기설이 돌았던 은행들이 새 주인을 찾으면서 ‘급한 불’은 끈 모양새다. 하지만 은행들을 바라보는 위기감은 여전하다. 일련의 사태들이 불거지며 은행의 안정성에 대한 신뢰도가 떨어져 은행 위기에 대한 공포 심리가 치솟고 있다는 분석이다.
은행을 바라보는 공포가 전염병처럼 빠르게 퍼진다는 뜻의 ‘뱅크데믹’이 전 세계 은행들을 관통하는 키워드로 급부상하고 있다.
“심리적 점염이 큰 문제”최근 독일 최대 투자은행인 도이체방크의 위기설은 투자자들의 은행에 대한 불신을 잘 보여주는 예다. 도이체방크의 ‘위기설’이 돈 것은 3월 24일이다. 이날 도이체방크 주가는 개장과 함께 곤두박질치기 시작하더니 장중 한때 14.9%까지 하락했다. 코로나19 사태의 여파가 금융 시장 전반에 악영향을 미쳤던 2020년 3월 이후 최대 폭락이었다.

도이체방크의 부도 가능성을 뜻하는 신용 부도 스와프(CDS)는 8.3% 넘게 치솟았다. SVB와 CS에 이어 도이체방크마저 무너지는 것 아니냐는 위기감이 감돌기 시작했다.

도이체방크는 재무상 문제가 없는 견실한 은행이다. 그럼에도 ‘위기설’이 튀어나왔다는 의미는 은행을 바라보는 투자자들의 의심이 엄청난 수준이라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물론 도이체방크는 위험 요소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 도이체방크는 미국 상업용 부동산에 대한 대출이 상대적으로 큰 은행이다. 현재 미국 상업용 부동산은 긴축 기조로 인해 대출 부실이 커질 것으로 예측되는 만큼 도이체방크 역시 안심할 수 없는 상황이다. 또 다른 유럽 은행에 비해 포트폴리오 내 중국 비율이 높은 것이 약점이라는 지적도 있다.

물론 도이체방크의 위기설은 과장됐다는 쪽에 무게가 실린다. 재무 제표에서도 잘 나타난다. 도이체방크의 지난해 말 기준 총자산은 1조4000억 달러에 달한다. 게다가 10분기 연속 흑자를 기록 중이고 지난해 순이익은 54억 달러로 전년 대비 159% 늘었다. 위기설을 논하기엔 재무 상태가 탄탄하다.

실제 투자업계에서도 은행의 건전성과는 별개로 은행권에 대한 시장 공포가 점염되면서 도이체방크의 위기설이 불거졌다고 본다. 마크 브랜슨 독일 금융감독청 청장은 “유럽 은행들은 재정이 건전하지만 심리적 점염이 큰 문제”라고 지적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어쩌다 은행에 대한 신뢰도가 이렇게 급감한 것일까. 이를 설명하기 위해선 SVB의 파산 여파로 무너진 CS의 사례를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 스위스 1위 은행 UBS가 CS를 인수하는 과정에서 약 170억 달러(약 22조원) 규모의 신종자본증권인 AT1 일명 ‘코코본드’를 모두 상각 처리해 휴지 조각이 됐기 때문이다.

코코본드는 채권으로 분류돼 이자를 지급하지만 발행 회사가 위기에 처하게 되면 이자 지급을 중단하거나 전액 상각 처리할 수 있는 채권을 뜻한다. 문제가 없을 때는 높은 금리의 이자를 받을 수 있지만 회사가 흔들리면 반대로 투자자들은 막대한 손실을 보게 된다. UBS의 CS 인수 과정에서 코코본드의 위험성이 부각되면서 은행들에 대한 시장 공포가 증폭된 것이다. 위기설이 불거진 도이체방크 역시 AT1 비율이 상대적으로 높은 은행에 속한다.미 중소은행은 대규모 자금 이탈투자업계에서는 도이체방크의 사례처럼 개별 기업의 재무 건전성과는 별개로 은행권에 대한 공포가 계속 확산되면 우려했던 뱅크데믹이 현실화할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앤드루 쿰스 씨티그룹 애널리스트는 “도이체방크를 둘러싼 대혼돈의 원인은 비이성적 시장”이라며 “이 같은 분위기가 확산되면 자기실현적 재앙으로 이어질 가능성도 충분하다”고 말했다. 특히 규모가 작은 중소 은행의 상황이 더욱 심각해질 수 있다. 실제로 미국에서는 소비자의 불안에 따른 중소 은행의 예금 유출이 이어지고 있다. JP모간이 펴낸 보고서에 따르면 SVB가 파산하기 전날인 3월 9일 이후 약 2주 동안 지방 중소 은행에서 빠져나간 자금은 5500억 달러에 달한다.

빠져나간 뭉칫돈은 대형 은행의 머니마켓펀드(MMF)에 몰렸다. 파이낸셜타임스는 데이터 제공 업체 신흥 포트폴리오 펀드 리서치(EPFR)의 자료를 인용해 3월에만 2860억 달러 이상이 MMF로 유입됐다고 보도했다.
은행의 디지털화가 가속화돼 온 만큼 공포가 더 빠른 속도로 강하게 번질 수 있다는 전망도 제기된다. SVB가 무너진 것도 모바일 뱅킹을 통한 초고속 뱅크런이 큰 영향을 미쳤다.

월스트리트저널은 “온라인 뱅킹 시대에 투자자들의 불안감과 갑작스러운 신뢰 변화가 은행을 얼마나 취약하게 만드는지 잘 보여주고 있다”고 전했다.

이와 함께 일각에서는 미국에서는 상업용 부동산저당증권(CMBS)이 중소 은행들의 또 다른 위기의 뇌관이 될 수 있다는 주장도 나온다.

최근 미 상업용 부동산 시장은 위기 신호가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사무용 부동산 가격이 크게 떨어졌다는 의미다. 금리 상승으로 부동산 시장이 식은 데다 기업들의 대규모 인력 감축 등의 여파로 공실률이 높아진 것이 원인이다.

이 여파로 미국 CMBS의 연체율이 상승 중이다. 골드만삭스에 따르면 올 2월 기준 CMBS의 연체율은 3.12%다. 1월(2.94%)보다 0.18%포인트 높아졌다. 사무용 부동산의 CMBS 연체율은 1월 1.83%에서 2월 2.38%로 0.55%포인트 올랐다.

자본 시장 분석 자료를 제공하는 코베이시레터에 따르면 5년 안에 만기가 도래하는 미국 상업용 부동산 담보 대출 규모는 2조5000억 달러로 역대 최대 규모를 기록할 것으로 보인다. 이는 미국 지역 은행이 유동성 위기로 이어질 수 있다. 월스트리트저널 등 외신에 따르면 미국 상업용 부동산 대출의 70% 정도를 소규모 지역 은행이 보유하고 있는 상황이다.

은행들의 위기로 인해 미국 중앙은행(Fed)이 금리 인상을 중단할 가능성도 높아졌다. 물가 잡기를 이유로 계속 금리를 올리면 신용 위기가 더욱 커질 수 있기 때문이다.

박상현 하이투자증권 연구원은 3월 29일 펴낸 보고서에서 “SVB와 CS 사태발 뱅크데믹 리스크가 해소되지 못하는 가운데 Fed를 위시한 주요 중앙은행은 물가 안정과 금융 안정 사이에서 정책 균형점을 찾기 위한 정책 고민이 깊어지고 있다”며 “결국 Fed의 정책 선택은 일차적으로 금리 동결이 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김정우 기자 enyou@hankyung.com
상단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