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현부터 김은숙까지…세계를 유혹하는 한국의 스토리텔러[김희경의 컬처 인사이트]

한류의 시작은 드라마에서…‘아라비안 나이트’처럼 세계인이 기다린다

1997년 중국 공영방송인 CCTV를 통해 방영된 '爱情是什么(사랑이 뭐길래)'./ 자료 =CCTV


주말마다 ‘안방 극장’이 문전성시를 이루던 시절이 있었다. 가족들과 옹기종기 모여 함께 TV를 틀고 주말 드라마에 빠져들었다. 1991~1992년 MBC에서 방영된 김수현 작가의 ‘사랑이 뭐길래’가 대표적이다. “야, 대발아!”라는 아들 대발이(최민식 분)를 부르던 병호(이순재 분)의 맛깔나는 대사로도 잘 알려진 이 작품은 가족 내 세대 갈등과 화합을 그려 큰 인기를 얻었다. 최고 시청률은 64.9%에 달했다.

이 작품은 종영된 지 5년 만에 다시 놀라운 기록을 세웠다. 1997년 중국 CCTV에 방영돼 현지에서 뜨거운 인기를 얻었다. 당시 중국 사람 13명 중 1명, 즉 1억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이 드라마를 봤다. 그렇게 한류가 처음 시작됐다.

26년간 이어지고 있는 한류의 출발점엔 드라마가 있었다. 그리고 오늘날까지도 K-콘텐츠 열풍의 중심엔 드라마가 자리하고 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던 걸까. 김수현 작가부터 시작해 김은숙 작가까지 막강한 한국의 스토리텔러들이 만들어 낸 놀라운 성과다. 이들의 손끝에서 가족 드라마·로맨스물·스릴러 등 장르물 심지어 막장 드라마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색깔의 드라마들이 탄생했다. 그리고 전 세계 사람들의 마음을 뒤흔들고 잠까지 빼앗고 있다.
스토리노믹스의 새로운 역사를 쓰다
한국의 스토리텔러, 그중 드라마 작가들의 계보를 살펴보면 K-콘텐츠 열풍의 비결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드라마 작가의 역할과 중요성조차 제대로 인식되지 못했던 시절 김수현 작가는 ‘사랑이 뭐길래’뿐만 아니라 ‘목욕탕집 남자들’, ‘사랑과 야망’, ‘내 남자의 여자’ 등을 연이어 성공시키며 그 자체로 브랜드가 됐다. 노희경 작가는 ‘그 겨울, 바람이 분다’, ‘디어 마이 프렌즈’, ‘우리들의 블루스’ 등 한 편의 시 같은 아름답고 서정적인 드라마로 시청자에게 큰 감동을 선사해 왔다.

오늘날 드라마 시장을 움직이는 주요 작가들은 200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했다. ‘파리의 연인’부터 ‘태양의 후예’, ‘도깨비’, ‘미스터 션샤인’, ‘더 글로리’에 이르기까지 작품마다 국내외에서 큰 인기를 얻은 김은숙 작가, 장르물 불모지였던 한국 시장에서 ‘유령’, ‘시그널’, ‘킹덤’ 등 명품 장르물을 만들어 낸 김은희 작가가 대표적이다. ‘내조의 여왕’, ‘별에서 온 그대’, ‘사랑의 불시착’으로 아시아 시장을 들썩이게 한 박지은 작가, ‘쌈, 마이웨이’, ‘동백꽃 필 무렵’ 등 따뜻하고도 강렬한 작품을 만든 임상춘 작가도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한국 드라마의 중요한 한 축을 차지하고 있는 ‘막장 드라마’로 큰 획을 그은 작가들도 빼놓을 수 없다. ‘왕꽃선녀님’, ‘아현동 마님’ 등을 쓴 임성한 작가, ‘아내의 유혹’, ‘펜트하우스’, ‘판도라 : 조작된 낙원’ 등을 집필한 김순옥 작가는 매번 마라 맛 전개로 시청자들을 강렬하게 유혹한다.

한국 드라마 시장에 이토록 특출난 스토리텔러들이 많다는 사실이 새삼 놀랍다. 오랜 시간 우리는 드라마를 수입하거나 베끼는 수준에 그쳤다. 주로 ‘미드(미국 드라마)’와 ‘일드(일본 드라마)’ 등을 리메이크하거나 일부 설정을 따라 했다. 하지만 이젠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졌다. 이들의 끈질긴 노력으로 다채롭고 뛰어난 작품들이 나오며 독보적인 위치에 올랐다. 국내외에서 치열하게 일어나고 있는 콘텐츠 전쟁에서 압도적인 성과를 보이며 ‘스토리노믹스’의 새로운 역사를 쓰고 있다.

드라마는 콘텐츠 전쟁의 승부를 가르는 핵심 장르에 해당한다. 2~3시간짜리 영화와 달리 드라마는 여러 회차에 이르러 전개돼 시청자의 시선을 장기간 잡아둘 수 있기 때문이다. 기나긴 호흡의 이야기를 완벽하게 풀어 내며 재미와 공감을 이끌어 내면 작품은 물론 해당 채널 또는 온라인 동영상 서비스(OTT)의 브랜드 가치까지도 무한대로 상승한다. CJ ENM의 tvN 채널이 널리 사랑받게 된 이유도, OTT 넷플릭스가 시장의 패러다임을 바꾸는 플랫폼이 된 것도 차별화된 드라마 경쟁력 덕분이었다.
그들의 이야기와 함께 이 밤을
넷플릭스를 통해 방영된 드라마 '더 글로리' 포스터 / 자료 = 넷플릭스

‘스토리텔링 애니멀’의 저자 조너선 갓셜에 따르면 인간은 누구나 이야기를 좋아하고 그 이야기가 지속적으로 확대 재생산되길 원한다. 드라마는 이런 인간의 본능에 최적화된 콘텐츠다.
여기에 이야기를 좋아하고 즐기는 민족적 특성이 가미돼 한국 드라마는 더욱 발전하고 확산될 수 있었다. 예로부터 우리 민족은 이야기를 좋아했다. 조선 시대 저잣거리엔 소설을 읽어 주는 ‘전기수’란 직업을 가진 이들이 있었다. 사람들은 전기수 주변에 둘러앉아 이야기를 들으며 울고 웃었다. 그리고 배고픔도, 고단함도 잠시 내려놓고 위로 받았다.

오늘날 우리의 모습도 비슷하다. ‘더 글로리’,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모범택시’와 같은 다양한 드라마와 함께 밤을 지새우며 재미와 감동을 느낀다. 그 모습은 ‘천일야화’라고도 불리는 ‘아라비안 나이트’를 연상하게 한다. 왕비에게 배신당한 페르시아의 샤리야르 왕은 이후 여인들을 무참히 죽였다. 하지만 세헤라자데란 이름의 여인의 재밌는 이야기에 빠져 그와 함께 1001일을 보냈다. 이후 살육도 멈추고 세헤라자데와 행복하게 살았다.

이토록 이야기를 좋아하는 특성에도 불구하고 이야기를 발전시켜 돈을 벌 수 있다는 생각은 잘 하지 못했다. 하지만 최근엔 K-콘텐츠 열풍에 힘입어 드라마 지식재산권(IP)을 활용해 다양한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드라마 산업에 대한 인식과 시선이 달라지며 창작 환경도 조금씩 개선되고 있다. 이전엔 창작 환경이 매우 열악했고 처우도 좋지 못했다. 창작자와 스태프 다수는 악조건을 견디며 일해야 했다. 그럼에도 활동을 멈추지 않고 꾸준히 좋은 이야기를 만들고 발전시켜 온 이들이 있어 오늘날 K-콘텐츠 열풍의 꽃을 피울 수 있었다. 물론 아직 가야 할 길이 멀지만 환경이 지속적으로 개선된다면 더욱 훌륭한 이야기들이 나올 수 있을 것이다.

신인 작가들을 발굴하고 육성하는 새로운 시스템이 만들어진 점도 긍정적이다. 과거엔 아무리 좋은 아이디어를 갖고 있어도 신인 작가들이 활동하기 어려웠다. 스타 작가 밑에서 오랜 시간 보조 작가로 일해야만 데뷔할 수 있었다. 높은 경쟁률을 뚫고 지상파 공모전을 통해 데뷔할 수도 있었지만 이후 미니 시리즈 등을 집필하는 데는 많은 한계가 있었다. 이젠 분위기가 크게 달라졌다. 각 방송사와 제작사는 신인 작가를 찾기 위해 적극 나서고 있다. 다소 완성도는 떨어지더라도 반짝이는 아이디어를 가진 원석을 발견만 하면 되기 때문이다. 기획 프로듀서(PD) 등이 한데 모여 신인 작가의 작품을 어떻게 보완할지도 함께 고민하는 체계적인 시스템이 작동하고 있는 덕분이다.

신인 작가들을 전폭 지원하는 곳도 있다. CJ ENM은 2017년부터 신인 작가들의 데뷔를 지원하는 ‘오펜’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매년 공모를 통해 선발한 신인 작가들을 위해 집필 공간, 창작 지원금 제공 등 다양한 형태의 물적 지원을 하고 있다. 교도소나 국립과학수사연구원 등 개인적으로는 쉽게 접근할 수 없는 곳에 작가들을 데리고 가 취재할 수 있도록 돕기도 한다.
드라마의 작품 수는 케이블 채널 수의 증가와 새로운 플랫폼 OTT의 구축으로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그런데 ‘풍요 속의 빈곤’처럼 오히려 새로운 드라마에 대한 갈증은 커져 가고 있다. 지나치게 잔인하거나 시각적인 요소만 부각시킨 SF물 등이 나오며 피로도가 높아졌기 때문이다. 신인 작가들의 참신한 아이디어는 이런 시청자들의 갈증을 풀어 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앞으로는 또 어떤 이야기가 탄생할까. 지난 1월 개봉된 조지 밀러 감독의 ‘3000년의 기다림’은 ‘아라비안 나이트’를 모티브로 만들어진 영화다. 이야기의 매력에 푹 빠진 서사학자 알리테아(틸다 스윈튼)와 소원을 들어 주는 정령(이드리스 엘바)이 만나 사랑에 빠지는 내용을 담았다. 알리테아는 “증오는 널리 퍼지고 사랑보다 오래 가요. 난 사랑 이야기만 하고 싶은데…”라고 말한다. 그러자 정령은 이렇게 답한다. “인류는 참 수수께끼입니다. 어둠 속에서 헤매다가도 위대함을 위해 지성을 모아요. 대단한 이야기죠. 어디로 흘러갈지 궁금합니다.”
우리가 영원히 이야기를 사랑하고 탐닉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지 않을까. 그리고 더욱 궁금해진다. 한국의 스토리텔러들은 또 어떤 이야기를 만들어 낼지, 그 이야기는 어디로 흘러갈지 오늘도 내일도 우리는 이들의 이야기와 함께 밤을 지새우게 될 것 같다.


김희경 한국경제 문화부 기자, 한국예술종합학교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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