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실의 시대, 스포츠 콘텐츠가 주는 울림과 희망 [김희경의 컬처 인사이트]

티빙의 스포츠다큐멘터리 '아워게임:LG트윈스' / 자료=티빙

1994년 이후 단 한 번도 우승컵을 든 적이 없는 한국 프로야구 구단 LG트윈스. 하지만 지난해엔 달랐다. 역대급 전력을 갖추고 28년 만에 우승을 노렸다. 하지만 한국 시리즈 진출에 실패하고 말았다. LG트윈스엔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온라인 동영상 서비스(OTT) 티빙이 3월 30일 공개한 ‘아워게임 : LG트윈스’는 LG트윈스의 이야기를 다룬 8부작 스포츠 다큐멘터리다. 이 다큐는 1, 2회부터 2022 플레이오프 2차전‧3차전에서의 LG트윈스의 연이은 실책을 다룬다. 허구가 아닌 실제 존재하는 특정 구단을, 그것도 구단의 가장 뼈아픈 순간부터 이야기를 시작하는 것이다.
다큐는 이를 통해 한 구단의 좌절과 영광의 역사, 그 뒤에 숨겨진 선수들의 치열한 노력과 감독‧코치의 고뇌를 그린다. 야구 팬들은 물론 ‘야알못(야구를 알지 못하는 사람)’ 사이에서도 많은 화제가 되고 호평을 받고 있다.

한국 스포츠 콘텐츠가 나날이 진화하며 새로운 열풍의 중심에 섰다. 올 상반기 영상 시장은 스포츠 콘텐츠로 가득하다. ‘카운트’부터 ‘리바운드’와 ‘드림’에 이르기까지 주요 한국 개봉작은 대부분 스포츠물이다. 다큐도 잇달아 공개된다. 티빙의 ‘아워게임’뿐만 아니라 디즈니플러스도 4월 26일 대한민국 10개 구단의 이야기를 담은 다큐 ‘풀카운트’를 선보인다. 여기에 ‘야신’으로 불리는 김성근 감독을 내세운 ‘최강야구’ 등 스포츠 예능도 꾸준히 인기를 얻고 있다. 이쯤 되면 스포츠 콘텐츠가 영상 시장의 한 축을 이루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다.
플랫폼에서도 눈여겨보는 스포츠의 매력
본래 스포츠가 가진 힘 자체는 워낙 막강하다. 스포츠 경기는 운동, 그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올림픽의 기원인 ‘올림피아 제전’은 기원전 8세기에 처음 열렸고 다양한 도시의 사람들이 모여 함께 왁자지껄 한바탕 축제를 열고 평화를 기원했다. 오늘날에도 올림픽·월드컵 등 국제적인 행사뿐만 아니라 국내외 주요 경기들이 있을 때마다 많은 사람들이 함께 보고 즐거움을 나눈다.

스포츠의 매력은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는 뉴욕양키스의 전설적인 포수 요기 베라의 얘기로 설명할 수 있다. 결말을 알 수 없기에 경기가 시작한 순간부터 끝날 때까지 한순간도 긴장감을 늦출 수 없다. 그 기다림 끝에 찾아온 승리의 순간은 큰 기쁨과 쾌감을 선사한다.

세대‧성별 불문하고 탄탄한 팬덤을 갖고 있는 스포츠 시장을 다양한 플랫폼에서도 눈여겨보고 있다. 극장과 OTT는 기존에 TV에서만 볼 수 있던 스포츠 경기를 상영하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다. 극장은 커다란 스크린으로 경기 중계 실황을 보며 함께 응원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OTT도 이용자를 늘리기 위해 경기 독점 방영권 확보에 나서고 있다.

이런 분위기에 힘입어 스포츠 관련 콘텐츠도 잇달아 제작되고 있다. 물론 이전에도 한국에서 스포츠 콘텐츠는 꾸준히 만들어졌다. 1994년 방영된 MBC 드라마 ‘마지막 승부’는 농구 열풍을 일으켰고 오늘날까지도 자주 회자되고 있다. 영화로도 많이 나왔다. 자폐 스펙트럼 장애를 가진 초원이(조승우 분)의 마라톤 도전 이야기를 담은 ‘말아톤(2005년)’, 여성 핸드볼 국가 대표 선수들의 이야기를 다룬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2008년)’, 대한민국 스키점프 국가 대표팀의 고군분투를 그린 ‘국가대표(2009년)’, 유명 야구 선수인 최동원과 선동열의 이야기를 담은 ‘퍼펙트 게임(2011년)’ 등이 있었다.

하지만 개별 작품이 아닌 스포츠물 장르 자체는 큰 인기를 얻지 못했다. 일부 흥행작을 제외한 대부분 작품은 주목받지 못하고 묻혀 버렸다. 차별화되지 못한 채 특정 패턴만 반복한 영향이 컸다. 다수의 작품들이 주인공을 중심으로 한 선수들의 위기와 갈등, 단합을 통한 극복이라는 단선적인 서사 구조에만 집중했다.

반면 해외에선 스포츠 콘텐츠가 꾸준히 사랑 받았다. 2011년 개봉된 브래드 피트 주연의 영화 ‘머니볼’은 큰 인기를 얻었다. 이 영화는 메이저리그 만년 최하위에 있던 미국 프로야구 구단 오클랜드 애슬레틱스가 경기 데이터를 활용해 20연승의 대기록을 세우게 된 이야기를 담았다. 선수들의 뜨거운 열정에 집중했던 기존의 작품들과 달리 냉정하고도 침착한 분석으로 승리에 이르는 과정을 담아 차별화했다. 이 작품을 본 한국 관객들은 오랫동안 ‘한국판 머니볼’이 나오지 않는 것을 아쉬워했다.

그리고 마침내 관객들의 기다림에 부합하는 작품이 탄생, 분위기가 바뀌기 시작했다. 2019년 SBS에서 방영된 남궁민 주연의 드라마 ‘스토브리그’다. 이 작품은 야구를 소재로 삼았지만 경기 장면 자체는 거의 나오지 않았다. 프로 야구의 한 시즌이 끝나고 다음 시즌이 시작되기 전까지의 기간을 뜻하는 ‘스토브리그’라는 제목처럼 다음 시즌 전에 이뤄지는 선수 트레이드와 전지 훈련 등 준비 과정을 다뤘다. 그럼에도 쫄깃한 긴장감과 짜릿한 쾌감을 선사해 호평을 받았다.

영화 '리바운드'의 포스터 / 자료 = 워크하우스컴퍼니
스포츠 콘텐츠로 되새기는 리더십
요즘 불고 있는 스포츠 콘텐츠의 열풍엔 사회 분위기의 영향도 크다. 불황이 찾아오면 스포츠가 인기를 얻는다는 얘기처럼 스포츠 콘텐츠에도 이 공식이 어느 정도 적용된다. 기적이 사라진 시대, 멋진 기적의 드라마를 보며 위로받고 희망을 갖고 싶은 심리가 작용하기 때문이다.
4월 5일 개봉된 영화 ‘리바운드’를 보며 마음이 뜨거워지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 작품은 제대로 된 경력도 없는 신임 코치와 선수 6명만으로 구성된 부산중앙고 농구팀이 전국고교농구대회에서 결승전에 오른 실화를 바탕으로 한다. 여러 경기 동안 선수 교체조차 하지 못하는 극한의 상황에서도 끝까지 코트를 누비는 선수들의 모습에서 진정한 기적의 의미를 되새기게 된다. ‘아워게임’에서도 마찬가지다. LG트윈스의 좌절과 영광의 역사 속에 숨겨진 눈물과 열정을 보고 있으면 함께 다시 일어날 용기를 갖게 된다.

다른 장르에선 잘 찾아볼 수 없는 스포츠 콘텐츠만의 관람 포인트도 있다. 조직 그리고 리더에 대한 이야기다. 스포츠 콘텐츠는 선수의 이야기만을 다루지 않는다. 오히려 감독과 코치를 전면에 내세우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누군가의 역량을 발견하고 키워 주는 일, 각기 다른 재능을 가진 선수들을 한데 모아 더 큰 힘을 발휘할 수 있게 돕는 이들의 역할이 팀의 승리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실 속 조직에선 여전히 이를 제대로 해내지 못하는 리더가 많다. 용기를 주기보다 꺾기 바쁘고 대화보다 일방적으로 강요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확증 편향의 시대’라고 불릴 만큼 사회 전반에 걸쳐 자신이 믿고 싶은 것만 믿는 경향도 강해지고 있다. 자신만이 옳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남의 말은 무시하는 일도 잦다. 리더들 중에서도 이런 아집에 갇힌 사람들이 많다.

‘리바운드’에도 이를 보여주는 장면이 나온다. 신임 코치 양현은 자신의 생각이 맞다는 확신에 차 선수들에게 특정 전략을 강요한다. 선수들의 반발과 의견은 제대로 듣지도 않는다. 이로 인해 갈등이 심화되고 결국 위기가 찾아온다. 이후 양현은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사과와 소통에 나선다. 그렇게 관객들은 스포츠 콘텐츠 속 캐릭터에 현실을 투영해 리더십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게 된다.

스포츠만큼 인간의 모든 긍정적인 에너지가 한데 결집된 분야가 또 있을까. 열정·끈기·집념·용기·리더십·화합으로 폭발적인 시너지를 만들어 내고 비로소 ‘승리’라는 달콤한 결과물을 얻으니 말이다. 미국의 칼럼니스트 조지 프레데릭 윌은 이렇게 말했다. “스포츠는 탁월함이 무엇인가를 생생히 보여줌으로써 사회에 기여한다.” 희망과 기적을 찾아보기도, 기대하기도 어려운 시대와 사회. 그 안에서 스포츠 콘텐츠는 사람들에게 진정한 탁월함의 의미와 가치를 되새길 수 있는 길을 열어 준다. 그렇기에 앞으로도 스포츠 콘텐츠는 지속적으로 나오고 오랫동안 사랑받지 않을까.

김희경 한국경제 문화부 기자, 한국예술종합학교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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