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수동 MZ세대 방앗간, LCDC SEOUL [MZ 공간 트렌드]
입력 2023-05-16 09:32:27
수정 2023-05-16 09:52:46
몇 가지 잔혹 동화가 있다. 독이 묻은 빗으로 머리를 빗다가 잠이 든 소녀, 아들을 낳기 위해 괴물의 심장을 먹은 여왕, 왕의 사랑을 받고 싶어 제 살을 깎은 노파…. 이탈리아 민속 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이 이야기들은 ‘백설공주’, ‘신데렐라’, ‘라푼젤’ 등으로 재탄생했고 21세기 들어 영화로 만들어졌다. 나아가 대한민국에 당도한 이 이야기들은 어느 자동차 수리점과 신발 공장을 핫 플레이스로 탈바꿈시키는 데 도움을 줬다.
이곳에 담긴 몇 가지 이야기성수역 3번 출입구로 나와 10분여쯤 걸었을까. 어두운 회색빛 공장 건물들 사이로 조금 더 반질반질한 질감과 한 톤 밝은 회색 건물이 눈에 띈다. 주변 건물과 어우러져 돋보이지 않는 듯 돋보이는 이곳은 성수동 나들이 필수 코스로 꼽히는 ‘LCDC SEOUL’이다.
LCDC는 이야기 속의 이야기를 뜻하는 프랑스어 ‘르 콩트 드 콩트(Le Conte des Contes)’의 머리글자를 따 온 것이다. 17세기 이탈리아의 문학가 잠바티스타 바실레(Giambattista Basile)가 유럽 지방의 설화를 담은 이야기 책 ‘펜타메론(Pentamerone)’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총 50가지의 이야기가 5개 챕터에 10개씩 담겨 있는 ‘펜타메론’은 하나의 큰 프레임을 중심으로 다른 주제와 모티프를 지닌 이야기들로 구성돼 있다.
이 이야기들은 ‘헨젤과 그레텔’, ‘잠자는 숲속의 공주’ 등의 이야기를 만든 안데르센과 그림 형제에게도 영향을 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처럼 LCDC SEOUL 곳곳에도 다양한 이야기가 묻어 있다.
방문객이 가장 많은 3층에서는 애니메이션 몬스터주식회사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복도를 중심으로 정면과 양쪽에 7개의 문이 나 있는 이곳은 1개의 팝업 공간과 6개의 브랜드가 모여 있다. 펜팔친구를 연결해 주기도 하는 편지지 판매점 ‘글월’, 식용 등급의 오일로 만든 비누 등을 선보이는 ‘한아조’, 한국적인 감수성을 탐구하는 디자인 스튜디오 ‘오이뮤’ 등 저마다의 개성을 지닌 숍들이 운영되고 있다.
LCDC SEOUL의 공간 기획을 총괄한 아틀리에 에크리튜의 김재원 대표는 문을 열면 다른 세상에 살고 있는 아이의 방으로 연결되는 몬스터주식회사의 세계관에서 이곳의 콘셉트를 설계할 아이디어를 얻었다고 한다. 만화와 같이 정말 이곳의 문 너머 공간에서도 저마다 다른 개성을 지닌 브랜드들이 그들만의 이야기를 전달하고 있었다.
자주 들르고 싶은 성수동 랜드마크랜드마크처럼 그 지역을 대표하는 장소가 있다. ‘성수동’ 하면 붉은 벽돌이 뉴욕 브루클린을 연상케 하는 ‘대림창고’와 숱한 인생 샷의 배경이 된 ‘디올 성수’ 등이 떠오른다. LCDC SEOUL 역시 성수동 랜드마크로 대접하기 충분하다. 마치 참새가 방앗간에 들르 듯 특별한 볼 일이 없어도 ‘거기나 가 볼까’ 하면 떠오르는 성수동 방앗간으로 자리 잡았다.
LCDC SEOUL은 대림창고나 디올 성수가 있는 성수동의 메인 스트리와는 다소 동떨어져 있다. 성수역에서도 10여 분을 걸어야 한다. 게다가 성수동을 가로지르는 연무장길을 중심으로 동편과 서편으로 나눴을 때 작고 개성 있는 숍들이 오밀조밀 형성돼 있는 서편과 달리 LCDC SEOUL이 있는 동편은 이렇다 할 공간이 많지 않은 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털 사이트에 ‘성수동 가볼 만한 곳’을 검색하면 이곳은 빠지지 않고 언급된다. 그 비결은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우선 이야기의 힘이 돋보인다. 이야기가 있으니 공감이 되고 공감이 되니 편안하다. 또한 편안함이 느껴지니 오래도록 머무르고 싶다.
이곳은 1층 카페 이페메라(CAFÉ EPHEMERA), 2층 패션 라이프스타일 숍(SHOP LCDC), 3층 브랜드 숍이 모여 있는 도어스(DOORS), 4층 루프톱 바 포스트스크립트(Bar Postscript)로 이뤄진 복합 문화 공간이다.
방문객의 발걸음이 위층까지 이어질 수 있도록 1층 카페에는 건물 중앙을 관통하는 나선형 계단이 조성돼 있다. 자연스럽게 전 층으로 발걸음이 이어지게끔 하는 설계가 신선했다.
새롭게 와닿은 점은 또 있었다. 이곳의 운영사가 패션 수입 브랜드 회사라는 점이다. 방탄소년단(BTS) 멤버 정국의 모자로 유명한 ‘캉골’, 젊은 엄마들이 많이 쓰고 다니는 라피아햇 브랜드 ‘헬렌 카민스키’ 등을 수입하는 에스제이그룹이 이곳을 운영하고 있었다.
이곳은 케즈나 오뚜기 등 타 기업의 팝업 스토어도 활발히 전개되고 있어 의류 회사가 운영 주체일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이처럼 자사 브랜드를 공격적으로 노출하기보다 복합 문화 공간으로서의 성격을 강조한다는 점이 이 공간이 사랑받을 수 있도록 하는 ‘한 수’라고 느껴졌다. 앞으로도 좋은 수를 통해 다른 곳과는 차별되는 ‘한 수 위’의 공간임을 증명해 주길 바란다.
강은영 기자 qboo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