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선동 옆 ‘서순라길’이 종로3가 젊음의 비결[상권 리포트⑨]

[편집자주]오래되다 못해 낡았다는 느낌이 드는 회색빛 동네, 젊은 창업가들이 자리 잡을 수 있는 저렴한 임차료, 서울 중심부라는 편리한 교통, 신도시에 질린 젊은이들이 구도심으로 눈을 돌리는 트렌드까지…. 네 가지 요소가 모이면 뜨는 동네의 성공 방정식이 된다. 사람이 몰린 곳에는 곧 자본도 몰린다. 자본이 덮친 거리는 임대료가 오르고 이를 버티지 못한 1세대 예술가들이 떠나며 곧 도시의 특색도 사라진다. 서울뿐만 아니라 모든 국가에서 예술과 자본의 함수 관계가 나타난다. 이런 과정을 목격한 뉴욕의 유명한 미술가인 알렉산드라 에스포지토는 뉴욕 예술가들을 ‘미생물’에 빗대 표현하기도 했다. 가장 지저분한 지역에 들어가 더러운 것들을 다 먹어 치우고 깨끗하게 해 놓으면 땅값이 올라 또다시 더러운 곳을 찾아 떠난다는 이유에서다. 서울의 골목들도 뜨고 지기를 반복했다. 또 다른 이야기를 발굴할 서울의 다음 거리는 어디일까.

익선동 젠트리피케이션으로 확장된 서순라길 상권 모습./김기남 기자


젊음의 거리라는 명칭이 무색해진 종로에서 유일하게 젊음과 활기를 유지하는 상권이 있다. 종로3가다. 2010년대에는 익선동이 떠오르면서 핫 플레이스의 명맥을 유지했고 종로3가역 6번 출입구 차도 양 옆으로 넓게 자리 잡은 포장마차 거리는 여전히 화려하게 거리를 밝히고 있다. 포장마차가 익숙한 40~60대뿐만 아니라 포장마차가 색다른 20대와 30대 역시 모여 앉아 수십 개의 포장마차를 가득 채운다. 트리플 역세권·돌담길이 변하지 않는 가치

익선동이 젠트리피케이션으로 매력을 잃은 후에는 서순라길이 뜨는 동네의 명성을 이어 받았다. 서순라길은 익선동과 돈화문로를 사이에 두고 대칭을 이루고 있다.

좁은 골목골목을 따라 한옥을 개조한 익선동 바로 옆 블록에 종묘 성벽을 따라 800m 거리에 일자로 형성된 상권이 나온다. 서순라길에는 높다란 성벽을 마주한 식당과 카페가 15개 넘게 들어와 있다. 이곳에 앉아 맞은편 성벽을 따라 난 고목과 파란 하늘을 바라보며 여유를 즐기는 게 서순라길의 매력이다.

서순라 카페와 식당은 모두 층고가 낮고 돌담길과 조화롭게 어울리는 콘셉트로 서순라길의 매력을 해치지 않고있다. 2층을 넘지 못하게 층수 제한이 있을 뿐만 아니라 젊은 창업가들이 나무·벽돌·기와 등 재료 본연의 매력을 살린 인테리어를 통해 거리의 매력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서순라길의 부흥은 숫자로도 나타난다. 올해 1분기 서순라길 월평균 매출액은 2019년과 비교해 60.4% 뛰었다. 을지로 상권이나 신당동 상권과 비교해도 월 평균 매출 상승률이 월등하게 높다. 2019년 41억6416만원이었던 서순라길의 월평균 매출액은 2020년 코로나19 사태로 인한 거리 두기가 본격화되면서 32억3420만원으로 줄었다.

하지만 2021년(43억1243만원)부터 코로나19 사태 이전 수준을 넘어섰고 올해 1분기에는 66억7943만원까지 상승했다. 코로나19 사태로 2020년 잠깐 매출이 줄었던 것을 빼면 매년 매출액이 꾸준히 늘어나고 있다.

서순라길은 익선동 상권에서 파생된 골목 상권이다. 가로수길에서 세로수길이 파생되고 이태원 거리에서 경리단길과 해방촌까지 상권이 확장된 것처럼 익선동의 젠트리피케이션으로 인해 젊은 예술가들과 창업가들이 낡은 골목상권에 활기를 불어 넣었다.

2015년 도시 재생 사업을 마친 익선동은 늘어선 한옥들로 예스러운 감성을 느낄 수 있어 2030세대에게 큰 인기를 끌었다. 하지만 익선동에 자리 잡았던 원주민들이 밀려났고 익선동을 매력적으로 만든 소자본 창업가들 역시 임대료가 높아지자 익선동을 떠났다.

젊은 세대에게도 자본이 들어온 익선동은 ‘한적한 골목길’이라는 매력을 잃은 채 식상한 상권이 됐다. 2015년부터 높아진 익선동 임대료는 여전히 떨어질 줄 모른다. 2019년 3.3㎡(1평)당 29만9300원이던 익선동 임대료는 지난해 4분기 27만1600원선으로 성수동·용리단길·을지로 상권보다 높았다.

익선동 임대료 상승 피해 자리 잡은 예술가들서순라길에 가장 먼저 터를 잡은 건 익선동의 높은 월세를 피해 자리잡은 예술가들이다. 지금도 서순라길에 작은 귀금속 공방과 작업실, 서울 주얼리센터가 자리하고 있는 이유다.

작은 공방과 오래된 식당이 전부였던 서순라길에 2014년 처음으로 식음업장인 ‘예카페 비비’가 문을 열었고 한동안 한적함을 이어 왔다. 오랫동안 고요하던 서순라길이 변화하기 시작한 것은 2017년부터다. 수제 맥주 펍인 ‘서울집시’가 문을 열었고 살롱순라·니코치킨·순라길 비비 등 다양한 식당과 카페가 하나둘 거리를 따라 형성됐다.

2017년 서울집시를 연 이현오 대표는 “당시 서순라길은 작은 카페 2개 정도와 버려진 창고와 낡은 상가들이 자리하던 길이었다”며 “당시 을지로도 뜨고 있었지만 을지로는 오히려 상권이 하나의 거리가 아니라 큰 구역에 산발적으로 생길 수 있는 조건이라 경쟁자가 너무 많이 생길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이 대표가 서울집시를 연 66㎡(20평)대 공간은 원래 전기 업체가 부품을 쌓아 두는 창고였다. 상권이 형성되기 전이었지만 이 대표는 서순라길에서 변하지 않는 가치를 봤다. 트리플 역세권의 좋은 교통편과 돌담길이었다. 그는 “1, 3, 5호선이 지나는 종로3가에서 익선동에 가려져 알려지지 않았던 거리가 돌담길을 나란히 마주하고 있었다”며 “평지였고 월세는 비쌌지만 권리금이 싸다는 것 또한 서순라길에 들어오게 된 계기였다”고 말했다.

2018년부터 조용히 입소문 나기 시작한 서순라길 상권 매출은 업종이 다양해지면서 2021년부터 급격하게 뛰었다. 지난해와 올해도 꾸준히 성장세를 이어 가고 있다. 빅데이터 전문 기업 나이스지니데이터에 따르면 업종 중 음식업의 성장이 가장 두드러졌다. 서순라길 음식 업종의 결제 금액은 지난해 2월과 비교해 올해 2월 134%나 성장했다.

서순라길 상권의 또 다른 매력은 다양한 유동 인구다. 핫 플레이스를 찾아 온 2030부터 종로3가가 익숙한 4050세대까지 연령별 분포가 다양하다. 나이스지니데이터에 따르면 서순라길에서 가장 많이 지출한 그룹은 40대 남성(22.4%)이었다. 30대 남성이 16.95%로 2위, 50대 남성이 16.73%로 3위를 차지하며 30대 남성과 50대 남성이 비슷한 분포를 보였다.

본격적인 상권이 형성된 지 5년 차를 맞은 서순라길도 젠트리피케이션을 대비해야 한다. 서순라길을 매력적으로 만들던 소자본이 밀려나면 익선동의 전철을 밟을 수 있기 때문이다.

서순라길에서 카페를 운영하는 A씨는 “상가임대차보호법이 개정되기 전인 2017년 처음 계약해 지난해 임대차 계약 문제로 소송까지 갔고 결국 승소했다”며 “서순라길은 2018년 이후 상가 임대차 계약을 진행한 곳들이 대부분이라 보호받을 수 있는 점포가 더 많아 향후 몇 년간은 매력을 이어 갈 수 있을 것으로 보지만 좋은 교통과 돌담길이라는 콘텐츠를 보유한 서순라길의 고유 매력이 더 오래 이어지길 바란다”고 말했다.

김영은 기자 kye0218@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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