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라가모, 신발 디자인에 인체 해부학 처음으로 접목[류서영의 명품 이야기]

류서영의 명품 이야기/살바토레 페라가모①

페라가모 구두를 신고 촬영한 마릴린 먼로 (사진①) 사진 출처 : 영화 7년만의 외출


“이탈리아 남부의 항구 도시 나폴리에서 동쪽으로 약 100km 정도 차를 몰고 가면 들어가는 길 말고는 나오는 길이 따로 없는 한 외딴 마을에 도착하게 된다. 보니토라는 이름의 작은 마을이 내가 태어난 곳이다.”

살바토레 페라가모의 자서전 ‘꿈을 꾸는 구두장이’의 서문에 나오는 내용이다. 페라가모는 1898년 14남매 중 열한번째로 태어났다. 가난 때문에 학교는 아홉 살까지만 다닐 수 있었고 집 근처의 구두 가게는 그에게 늘 영감을 주는 장소였다.

구두장이가 작업하는 모습을 즐겨 봤던 페라가모는 아홉 살이 되던 해 성찬식에서 신을 신발이 없는 여동생을 위해 처음으로 하얀 구두를 만들었다. 열한 살이 되던 1909년 페라가모는 나폴리의 한 구두 가게에서 견습생으로 일하게 됐다. 2년 후 열세 살이 되던 해 페라가모는 고향에 돌아와 자신의 집 한쪽에 여성용 맞춤 구두 가게를 열었다.

1947년 페라가모의 나일론 실로 투명하게 만든 인비저블 샌들(사진②) 사진출처: instagram Ferragamo
1942년에 만들어진 스웨이드 가죽을 패치워크 한 페라가모의 코르크 웨지힐 (사진③) 사진 출처:instagram Ferragamo


가난한 집안 일으키기 위해 형제들과 미국행

그러던 어느 날 미국에서 일하던 형의 권유로 1914년 열여섯 살 때 페라가모는 가난한 집안을 일으키기 위해 형제들과 함께 미국 보스턴으로 가는 배를 탔다. 미국에 간 페라가모는 큰 신발 공장에 취업했고 거대한 기계들이 있는 미국 공장은 나폴리의 구두 공장과 많이 달랐다.

하지만 그는 곧 기계로 생산하는 신발의 품질에 한계를 느꼈다. 페라가모는 형들과 함께 캘리포니아 산타모니카에 구두 제조 및 수선점을 열었다. 아메리칸필름컴퍼니라는 영화 스튜디오 바로 옆이었다. 페라가모는 아메리칸필름컴퍼니에 카우보이 부츠를 납품하게 된 것을 계기로 영화 소품으로 사용하는 독특한 구두를 제작해 납품하기 시작했다. 이후 페라가모의 구두 사업은 아메리칸필름컴퍼니의 성공과 함께 번성해 나갔다.

페라가모는 영화사를 들락거리면서 카메라 앞에 오랜 시간 연기하는 배우들이 신발 때문에 힘들어 하는 모습을 종종 봤다. 그리고 사람들의 발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사람들 중 약 20%가 평발이고 많은 이들이 티눈 등의 문제로 힘들어 하는 것을 알게 됐다. 1923년 캘리포니아 할리우드로 이주한 페라가모는 착용하기 편한 신발을 제작하기 위해 USC(University of Southern California) 야간대학에서 인체 해부학을 공부했다.

이때 페라가모는 사람의 체중이 발의 중심에 실린다는 점을 깨닫고 신발 중앙에 철심을 박아 체중을 지탱하도록 했다. 이는 발이 앞으로 밀리는 현상을 방지해 발가락이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공간을 만드는 역할을 했다. 신발 디자인에 인체 해부학을 적용한 것은 페라가모가 최초였다. 무게 중심을 활용한 그의 신발 제작 원리는 오늘날 모든 신발 제작에 그대로 적용되고 있다.

1938년 주디 갈랜드를 위한 페라가모의 레인보우 샌들(사진④) 사진 출처:insragrm ferragamo
1938년 만들어진 페라가모의 르네상스 샌들(사진⑤) 사진출처: instagram Ferragamo


할리우드 1세대 스타들부터 페라가모 신어

1923년 ‘할리우드 부츠 숍’이라는 이름의 새 매장을 오픈했고 수많은 할리우드 배우들이 단골 손님이 됐다. 메리 픽포드, 루돌프 발렌티노, 존 베리모어, 더글러스 페어뱅크스, 글로리아 스완슨 등 전설적인 1세대 할리우드 스타들이 페라가모를 신었다. ‘7년만의 외출’ 영화에서 주인공 마릴린 먼로가 지하철 환풍구 바람에 날리는 스커트를 잡고 있는 그 명장면에서 먼로가 신었던 구두가 바로 페라가모 제품이었다(사진①). 아르헨티나의 퍼스트 레이디 에바 페론 역시 페라가모 구두의 열혈 팬이었다. 훗날 마돈나가 에바 페론 역을 맡은 영화 ‘에비타’에서는 고증에 따라 모든 신발을 페라가모로 제작됐다고 한다.

페라가모는 이탈리아에 수제화 공장을 세우고 이를 작업별로 분리하는 형태로 대량 생산 시스템을 만들었다. 하지만 미국 경제가 점점 어려워졌고 1929년 대공황으로 여기저기에서 아메리칸 드림이 산산조각 나고 있었다. 페라가모 역시 예외는 아니었고 그는 파산했다.

1927년 이탈리아 피렌체에 돌아와 ‘살바토레 페라가모 컴퍼니’를 설립했다. 이것이 살바토레 페라가모 브랜드의 시작이었다. 페라가모는 여섯 명의 직원으로 다시 작업장을 만들었다. 샘플을 만들어 미국에 보냈고 수출이 시작됐다. 페라가모를 다시 일어서게 했던 것은 품질과 명성이었다.

그레타 가르보, 소피아 로렌, 오드리 헵번 같은 스타들과 윈저 공 같은 유명인들이 구두를 맞추기 위해 제트기를 타고 피렌체에 몰려들었다. 마침내 그는 1938년 피렌체에서 중세 시대 성 ‘스피니 페로니’를 사들여 아틀리에를 열었다. 이곳은 현재까지 페라가모의 본사로 이용되고 있다.

나무·펠트·합성수지 등 소재도 구두 재료 활용

무솔리니 정권이 이탈리아를 지배하고 2차 세계대전의 기운이 꿈틀거리던 불안한 시기에 페라가모는 기지를 발휘해 역사적인 작품들을 만들었다. 가죽과 금속 등 생활에 필요한 모든 물자가 전쟁을 위해 몰수당한 상황에서 나무·라피아·펠트·합성수지 등 사용할 수 있는 모든 소재로 구두를 만들기 시작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 코르크 소재로 만든 역사적인 웨지힐이 탄생했다.

이 밖에 마릴린 먼로의 스틸레토 힐, 윗부분을 나일론 실로 만들어 투명하게 제작한 인비저블 샌들(사진②), 스웨이드 가죽을 패치워크한 구두(사진③) 등 페라가모의 역작들이 탄생했다. 1937년 미국 배우이자 가수인 주디 갈랜드를 위해 만들어진 레인보 샌들(사진④)은 스타를 위해 만든 신발 역작 중 하나다.

르네상스 샌들(사진⑤)은 1938년 페라가모가 르네상스 시기에 착용한 구두 중 하나인 쇼파인에서 영감을 얻어 만들었다. 이 신발은 10층 라인의 코르크 웨지로 만들어졌고 블랙 벨벳 어퍼(발등)와 골드와 실버 나파의 스트랩이 달렸다. 페라가모는 1947년 인비저블 샌들로 구두 디자이너로서는 처음으로 패션계의 오스카상이라고 불리는 니먼 마커스상을 수상했다.

참고 자료 : ‘최고의 명품 최고의 디자이너(명수진. 삼양사)’. ‘꿈을 꾸는 구두장이(살바토네 페라가모 저. 안진환·허영은 역. 웅진닷컴)’

류서영 여주대 패션산업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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