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고 어두운 터널에 갇힌 한국 영화 [김희경의 컬처 인사이트]




<캡션 : 올 상반기 100만 관객을 넘은 두 작품 ‘교섭’과 ‘드림’. / 자료 : 플러스엠엔터테인먼트>

세계 최고 권위를 자랑하는 칸 국제 영화제가 5월 16일 막을 올렸다. 이 영화제에서 한국 영화는 놀라운 쾌거를 이뤄 왔다. 2019년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은 최고상인 황금종려상을 받았다. 작년엔 박찬욱 감독이 ‘헤어질 결심’으로 감독상을, 배우 송강호 씨가 ‘브로커’로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다. 한국 영화 100년사에 길이 남을 영광스러운 순간들이었다.

그런데 올해 분위기는 크게 다르다. 영화제에 공식 초청된 한국 영화는 김지운 감독의 ‘거미집’, 유재선 감독의 ‘잠’ 등 총 7편이다. 하지만 모두 경쟁 부문 진출에 실패했고 비경쟁 부문에 오르는 데 그쳤다. 경쟁 부문에 진출하는 것은 다양한 나라의 영화 가운데서도 뛰어난 작품성을 인정받았음을 의미한다. 황금종려상을 포함해 주요 상의 후보가 될 수 있는 것도 경쟁 부문에 올라야 가능하다.

이를 두고 한국 영화의 위기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물론 칸 경쟁 부문의 진출 실패가 곧 한국 영화의 실패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지금까지 경쟁 부문에 오르지 못한 경우가 더 많았고 반드시 주요 상을 받아야만 의미가 있거나 흥행에 성공하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결코 가볍게 넘길 수 있는 사안은 아니다. 빠르게 무너지고 있는 한국 영화 생태계를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일 수 있기 때문이다. 올해뿐만 아니라 앞으로도 한국 영화가 해외 주요 영화제와 시상식에서 주요 상을 받는 모습을 보기 어려울 수 있다. 그 위기는 한국에서부터 이미 시작되고 있고 급속히 심화되고 있다. 세계 시장의 중심에 섰던 한국 영화계에 울려 퍼진 비상 경고음, 왜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일까.
1000만? 100만 관객도 힘들다
처음엔 한국 영화 전체가 아닌 극장의 위기로만 인식됐다. 코로나19 확산 이후 넷플릭스를 포함한 온라인 동영상 서비스(OTT)를 통해 영화와 드라마를 감상하는 경향이 확산됐다. 사람들의 콘텐츠 이용 패러다임 자체가 변화하면서 극장을 찾는 관객의 발길은 뚝 끊어졌다. 게다가 극장을 건너뛰고 OTT로 직행하는 영화들까지 나오며 극장이 가진 플랫폼으로서의 역할에 대한 회의론이 불거졌다.

그런데 올 상반기 한국 박스 오피스를 살펴보면 한국 영화 자체의 위기까지 절감할 수 있다. ‘더 퍼스트 슬램덩크’, ‘스즈메의 문단속’에 이어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3’까지 주요 외화들은 한국 시장에서 좋은 성적표를 받았다. 반면 한국 영화는 기대작들마저 잇달아 흥행에 실패했다. 1000만 관객은커녕 100만 관객 확보도 어려운 상황에 놓였다. 올 들어 100만 관객을 넘긴 한국 영화는 ‘교섭’과 ‘드림’ 등 두 작품뿐이다. 손익분기점을 넘긴 한국 영화는 한 편도 없다. ‘더 퍼스트 슬램덩크’ 관객이 465만 명, ‘스즈메의 문단속’ 관객이 539만 명을 넘어선 것과 비교하면 참담하다. 한국 영화의 매출액 점유율도 올 1분기 기준 역대 최저 수준인 29.2%에 그쳤다. 지금까지 매출액의 절반 이상을 외화에 내준 적이 없었지만 그 기록마저 순식간에 무너져 버렸다.

업계에선 그나마 5월 31일 개봉되는 ‘범죄도시 3’에 희망을 걸고 있다. 전작인 ‘범죄도시 2’는 지난해 한국 영화 가운데 유일하게 1000만 관객을 동원했다. 하지만 이 작품의 성적표와는 별개로 앞으로 한국 영화 전체의 미래는 잘 보이지 않는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한국 영화의 위기엔 여러 요인이 복잡하게 맞물려 있다. 1차적 원인은 OTT로 인해 콘텐츠 이용 패러다임이 바뀐 것이다. 대부분의 영화는 집에서 OTT로 보고 화려한 볼거리를 자랑하는 블록버스터급 영화 정도만 극장에서 관람하려는 분위기가 확산됐다. 그런데 한국 영화 가운데 블록버스터급 영화는 성수기를 제외하곤 찾아보기 힘들어졌다. 이런 영화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팬데믹(감염병의 세계적 유행) 때 개봉되지 못하고 창고에 들어가 있던 작품들이 있다. 하지만 지난해 개봉됐던 대작들이 잇달아 흥행에 실패한 탓에 시장 상황을 예의 주시하며 개봉을 미루고 있다. 성수기에 개봉된다고 하더라도 지난해처럼 흥행에 실패할 수 있어 관계자들의 고심이 깊어지고 있다.

명성 있는 거장들의 작품 또는 ‘스즈메의 문단속’처럼 관객들의 호평을 받을 만한 작품도 찾아보기 힘들다. 실력 있는 다수의 영화 감독들이 극장 개봉작 대신 OTT에 들어갈 드라마 또는 영화를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OTT에 들어갈 작품을 만들면 거액의 제작비를 100% 지원받는 것은 물론 해외에도 이름을 알릴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 보니 영화 감독들의 관심이 자연스럽게 OTT에 집중되고 있다. 아예 해외에서 작업하는 감독들도 있다. 봉준호 감독은 할리우드 영화 ‘미키 17’을, 박찬욱 감독은 미국 방송사 HBO의 오리지널 시리즈 ‘동조자’를 만들고 있다.

OTT의 영향으로 산업 구조 자체가 바뀌고 있는 것도 위험 요인이다. 기존 영화 산업은 제작·투자·배급·마케팅·극장으로 이어지는 구조다. 반면 OTT는 플랫폼과 창작자·제작사의 양자 구도로 이뤄진다. 결국 이를 제외한 수많은 인력과 업체들이 와해될 위기에 처한 것이다.

영화 투자도 거의 이뤄지지 않고 있다. 팬데믹으로 영화가 개봉되지 못하면서 투자금이 오랫동안 회수되지 않은 탓이다. 그러다 보니 다음 작품에 돈을 쏟을 여력이 없어 투자를 중단하고 있다. 이에 따라 한국 영화의 본격적인 위기는 아직 오지도 않았다는 분석이 나온다. 지금은 팬데믹 기간 개봉되지 못한 작품들이라도 쌓여 있다. 하지만 2~3년 후엔 극장에 상영할 한국 영화조차 찾아보기 힘들 수 있다.

얼어붙은 관객들의 마음을 되돌리는 것 역시 쉽지 않아 보인다. 팬데믹 당시 개봉됐어야 할 작품들이 이제야 가까스로 스크린에 걸리고 있지만 작품들을 보면 왠지 어디선가 본 듯한 기시감을 느끼게 될 때가 많다. 그 사이 공개된 OTT용 드라마와 영화 등에 나온 표현이나 장면들과 묘하게 겹치기 때문이다. 현재 트렌드와도 잘 맞지 않는 느낌을 받기도 한다. 당시의 트렌드를 반영한 OTT 작품들은 제때 방영됐지만 극장용 영화는 그보다 한참 후에 나왔기 때문이다. 제작 당시엔 신선한 접근이나 시도를 했을지 몰라도 지금 보면 마치 다른 작품을 따라한 것처럼 보이거나 유행에 뒤처진 것처럼 느껴진다. 최근 개봉된 한국 영화들이 “차별화되지 못했다”라는 평을 많이 듣는 결정적인 이유다. 극장 티켓 가격이 치솟은 상황에서 오랜만에 큰맘 먹고 극장에서 본 한국 영화가 이런 실망감을 안겨준다면 어떨까. 한참 동안 한국 영화를 찾지 않을 가능성이 높을 것이다.
충무로의 기억과 힘을 되살려야
그렇다면 한국 영화는 이대로 무너져야 하는 것일까. 우선 급한 불을 끌 수 있는 정부 지원이 절실하다. 극장 티켓 값의 3%를 징수하는 부과금을 주요 재원으로 삼고 있는 영화발전기금은 올 연말이면 고갈될 위기에 놓였다. 이 기금은 그동안 수많은 한국 영화를 만들고 창작자들을 육성하는 데 쓰였다. 그런데 기금이 고갈되고 다른 재원마저 제대로 마련하지 못한다면 한국 영화는 생명력의 근원이 돼 온 뿌리 자체를 통째로 잃게 될 수 있다.

영화인들이 함께 모여 한국 영화에 대한 관심을 제고하고 분위기를 환기시키는 역할도 해야 한다. 한국 영화가 100년의 역사를 이어 오고 발전한 과정은 결코 순탄하지 않았다. 하지만 큰 위기나 사건이 터질 때마다 한국 영화인들은 하나가 돼 뭉쳤다. 스크린 쿼터 축소 때는 함께 반발하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런데 지금은 다들 제각각 흩어져 있다. 몸은 따로 있더라도 함께 목소리는 낼 수 있지 않을까. 나아가 관객들의 관심을 촉구하는 다양한 캠페인도 펼쳐야 한다.

그리고 그 무엇보다 초심으로 돌아가 한국 영화의 경쟁력 제고를 위한 방안들을 고민해야 한다. 그 해답은 결국 좋은 한국 영화로 관객들과 만나는 것이다. 한국 관객만큼 자국 영화를 사랑하고 아끼는 관객은 없었다. 좋은 작품만 스크린에 걸린다면 관객들은 다시 한국 영화를 지지하고 사랑할 것이다.

2020년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기생충’으로 봉준호 감독과 함께 각본상을 받은 한진원 작가는 수상 소감에서 ‘충무로’를 언급했다. “미국에 할리우드가 있듯이 한국에는 충무로라는 곳이 있습니다.” 영화인들이 충무로에 모여 함께 치열하게 고민하고 상상력을 마음껏 발휘했기에 한국 영화가 꽃필 수 있었다는 의미다. 현재의 위기를 극복하는 힘도 여기에서 나오지 않을까. 다시 한 번 한국 영화의 저력을 보여줄 때다.

김희경 한국경제 문화부 기자, 한국예술종합학교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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