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동’하는 세계의 의사 단체들, 그 카르텔의 역사와 족적 [몸의 정치경제학]
입력 2023-05-23 10:10:59
수정 2023-05-23 10:10:59
다만 약에서 구하옵소서 시리즈 8
대한민국의 21세기는 의사들의 집단행동과 함께 행군한다. 의약 분업과 약사 조제권에 반발한 2000년 총파업, 그 전후 십 수년간 한의사 단체와 벌인 장기 분쟁, 원격 의료 도입에 저항한 2014년 집단 휴업, 코로나19 사태의 절정인 2020년 8월 의대 정원 확대 반대 대규모 실력 행사까지….
대한의사협회(의협)는 의대 정원 확대, 공공 의대 설립, 비대면 진료 육성, 한방 첩약 급여화를 한데 묶어 이른바 ‘4대 악(惡) 의료 정책’으로 정식화해 의료 파업의 영구적 명분을 비축해 뒀다. 북한의 주기적 미사일 발사처럼 의사협회는 잊을 만하면 공중 보건이란 만만한 공해상으로 파업의 로켓을 날린다.
그래서 의협이란 도대체 어떤 집단인지, 타국의 의사협회들도 시민의 건강을 볼모로 이렇게 잦은 실력 행사에 나서는지, 의사협회의 설립 목적과 사회적 역할은 무엇인지 찾아봤다.
의사협회를 아시나요
의사협회와 관련한 해외 출판과 언론 기사는 의외로 많다. 그 절대 다수가 매우 비관적 톤을 유지한다는 것 또한 인상적이다. ‘의사 로비스트들은 워싱턴에서 승리하는 방법을 알고 있다(2017년 7월 22일)’는 뉴욕타임스 기사가 가장 눈에 띈다. 기사는 의사협회를 학술 연구나 의료 공익 단체 정도로 생각하는 독자의 머리에 찬물을 끼얹는다, 시원하게.
“의사회는 종종 환자 옹호 단체로 자신을 내세우지만 실상은 의사 회원들의 이익만을 대변하는 강력한 로비 단체다. 환자에게 이익이 될 수 있는 변화일지라도 의사의 수입이나 독점권을 위협하는 개혁이라면 반대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또 비윤리적이거나 불법적 행동을 하는 의사들의 징계 축소나 적극적 변호에 나서는 경우도 적지 않다.”
기사는 미국 최대 의사 단체인 미국의사협회(AMA)가 수십 년간 동안 국민건강보험 반대 로비 활동을 벌여 왔다는 점을 폭로한다. 또 미국에서 저렴하고 접근성이 좋은 원격 의료 진척이 더딘 이유도 이들의 로비 때문이라고 지적하며 의사협회야말로 국민 보건의 가장 큰 위협이 될 수 있다고 경고한다.
2018년 10월 29일자 뉴요커(New Yorker) 기사 ‘의사들이 도움 되지 않는 치료를 제공하는 이유’ 역시 이런 관점을 공유한다. 의사 단체가 가장 열심히 그리고 용감히 나서는 ‘투쟁’은 의료 수가를 높이는 투쟁이었고 수익 향상을 위해서라면 더 많은 약물과 기기를 처방하도록 유도하는 제약업계와 뒷거래한다고 강도 높게 비난한다.
혹시 미국의 의사협회만의 특수함이 아닐까 싶어 영국의 경우를 살펴봤다. 시장과 이윤 중심의 미국 의료계와 반대로 영국은 보편 의료권을 내세운 국가 주도형 체계로 정평이 나 있기 때문이다. 안타깝게도 결과는 대동소이했다.세계 최초 의사협회, 영국의 BMA
영국의 국민보건서비스(NHS)는 월마트, 인도 철도공사, 중국 인민해방군에 이어 전 세계에서 넷째로 큰 고용주다. 150만 명이 넘는 인력을 거느린 NHS는 영국 내 등록의사 28만 명 중 약 83%에 해당하는 23만3000명을 고용하고 있다.
영국의학협회(BMA)는 이들 의사의 절대 다수를 회원으로 한다. 1832년 설립된 BMA는 중세 의과대학에 존재했던 길드 이후 근대에 형성된 첫 의료 직종 협회다. 미신과 민간요법, 요술과 과학이 뒤섞여 있던 19세기 영국, BMA 소속 의사들은 콜레라 창궐에 맞서 싸우며 과학적 의료 지식 확산을 주도했다.
런던 밖 지방 의료 종사자와 외과 의사들의 협력체로 출발한 BMA는 돌팔이 의사(quake)들의 의료 사기 범람에 맞서 의사 등록 제도를 도입하면서 의료 시술의 공적 기준도 강화했다. 그 결과 의사 집단에 대한 대중의 신뢰는 성직자에 대한 그것에 필적할 만큼 고양됐다.
산이 높으면 골이 깊은 법. 의료 개혁을 선도해 왔던 BMA는 점차 독점과 기득권 세력으로 변질돼 갔다. 1948년 영국의 국민보건서비스(NHS) 설립에 대한 BMA의 반대가 그 단적인 예다. 당시 보건부 장관 아네우린 베번의 의회 연설문을 보면 “NHS 도입을 의료계 이익에 위협으로 간주한 BMA는 악의적 루머를 퍼뜨리며 의료계와 정부 간의 긴장을 높이고 있다”는 내용이 등장한다.
영국 BBC 제작 다큐멘터리 ‘NHS의 탄생’에는 1948년 레슬리 호어-벨리샤 BMA 회장이 “우리는 포괄적 국가 의료 서비스가 대중과 의료 전문가 모두에게 해가 될 것이라고 믿는다. 우리는 필연적으로 관료적 간섭과 의료 기준의 저하로 이어질 국가 시스템에 반대한다”는 연설 장면이 이를 뒷받침한다.
그래서 전 NHS 디렉터 그레엄 윈야드 박사는 BMA가 국가 주도의 의료 시스템 도입의 장애물이었을 뿐만 아니라 “보편적 의료 서비스, 대체 의학 도입, 지역 사회 기반 의료 서비스 등 모든 새로운 의료 이니셔티브에 일관되게 저항해 왔다”고 주장한다.세상의 모든 의사협회, 그 거대한 카르텔
혹시 미국과 영국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 의사협회들도 그럴까 하는 불안한 생각이 들었고 이는 여지없이 적중했다. 일례로 프랑스 의사협회(Ordre des médecins)는 2018년 약사의 특정 약물 처방과 예방 접종 시행을 허용하는 법안에 반대했다. 결국 이 법안은 정부와의 협상 끝에 철회됐다.
2018년 독일 의사협회(Bundesärztekammer)는 전문 간호사에게 경미한 수술 및 약물 처방과 같은 의료 절차를 수행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법안에 반대했다. 협회는 이러한 변화가 환자의 안전을 위협할 수 있다는 전형적인 협박 카드를 썼고 이 법안은 의사 단체 의견에 따라 수정 축소됐다.
이들 기사를 접하면서 강한 기시감이 든다. 이 외에도 인도·중국·남아프리카공화국·브라질 등 세계 어디를 둘러봐도 하국의 실정과 너무도 닮은꼴이다. 최근 의협이 간호사들의 의료 업무 확장에 거세게 반발한 것은 이미 여러 나라에서 반복돼 온 선례의 재탕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각국 의사협회들의 집단행동 데칼코마니 뒤에는 115개 회원국을 거느린 세계의료협회(WMA)가 있다. 회원국 단체들은 여기에서 정책 동일화의 준거점을 찾는다. 말하자면 WMA는 의료 단체의 집단행동을 위한 ‘글로벌 스탠더드’를 제시하는 기구인 셈이다.
전 세계 의사협회가 공통의 ‘유산’으로 지켜 온 투쟁의 대표적 사례가 의과대학 정원 통제와 의사 수 제한이다. 놀랍게도 이 투쟁은 16~17세기 영국과 프랑스 왕립의료대학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대학들은 지원생들의 입학 및 향후 활동에 관한 엄격한 규정을 도입했고 다른 형태의 의료 교육이나 전문 지식을 갖춘 자들을 의료 사업에서 배제함으로써 독점적 지위를 유지해 왔다.
의사 수 증가는 의료 시장의 경쟁 심화로 이어지고 이는 다시 의료 단가 저하와 그들의 평균 수입 감소로 귀결될 수 있다. 나아가 의료 희소성과 시장 장악력 약화를 초래할 수 있기 때문에 일본과 한국을 비롯한 WMA 회원국 의사 단체들이 눈에 쌍심지 켜고 사수하는 숭고한 밥그릇이다.계급화된 집단행동 그리고 숭고한 카르텔
하지만 모든 의사협회 회원들을 도매금으로 묶을 수 없다. 단적으로 영국과 프랑스 협회는 영향력 있는 중견 의사들의 이해에 충실한 반면 회원 다수를 구성하는 수련의·전공의·주니어 닥터들의 요구에 무관심하다는 비판이 줄곧 이어져 왔다.
협회 내 회원들 간의 계급적 차별화는 1975년 영국 NHS 소속 주니어 닥터들의 파업 과정에서 여실히 드러났다. BMA 지도부의 무성의와 냉담은 올해 3월 영국 BMA 10차 이하 주니어 닥터들의 단체 행동에서도 반복됐다.
의사협회 내 수직 서열과 특권층 편향만큼이나 뚜렷한 차이는 일부 의사들의 이타적 집단행동에서 찾아진다. 세계 대부분의 의사협회들이 기득권 이익 집단으로 군림하고 있지만 소수 헌신적인 의사들의 ‘카르텔’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자. ‘국경없는 의사회’ 같은 위대한 인도주의 단체가 그것이다.
1971년 프랑스에서 결성된 이 의사회는 현재 70여 개국 3만5000명 이상의 회원이 활동 중이다. 세계 분쟁 지역과 지독한 유행병과 풍토병에 맞선 성전에 의사들이 나서자 간호사·응급구조사 등 의료 전문가는 물론 물류·수자원·위생 엔지니어와 전문 행정가들까지 팔 걷고 나섰다.
언제부터 의료가 장사가 됐는지는 알 수 없다. 그리고 언제부터 의사 단체가 공중 보건을 인질로 한 액션극의 달인이 됐는지도 그리 중요하지 않다. 폭염과 포화 속에서도 누군가의 질병과 고통에 참여하는 무모한 의료인들이 있다. 이들의 ‘카르텔’과 ‘집단행동’이야말로 세상을 지탱하는 숭고한 힘이다.
최정봉 사회평론가, 전 NYU 영화이론과 교수
대한민국의 21세기는 의사들의 집단행동과 함께 행군한다. 의약 분업과 약사 조제권에 반발한 2000년 총파업, 그 전후 십 수년간 한의사 단체와 벌인 장기 분쟁, 원격 의료 도입에 저항한 2014년 집단 휴업, 코로나19 사태의 절정인 2020년 8월 의대 정원 확대 반대 대규모 실력 행사까지….
대한의사협회(의협)는 의대 정원 확대, 공공 의대 설립, 비대면 진료 육성, 한방 첩약 급여화를 한데 묶어 이른바 ‘4대 악(惡) 의료 정책’으로 정식화해 의료 파업의 영구적 명분을 비축해 뒀다. 북한의 주기적 미사일 발사처럼 의사협회는 잊을 만하면 공중 보건이란 만만한 공해상으로 파업의 로켓을 날린다.
그래서 의협이란 도대체 어떤 집단인지, 타국의 의사협회들도 시민의 건강을 볼모로 이렇게 잦은 실력 행사에 나서는지, 의사협회의 설립 목적과 사회적 역할은 무엇인지 찾아봤다.
의사협회를 아시나요
의사협회와 관련한 해외 출판과 언론 기사는 의외로 많다. 그 절대 다수가 매우 비관적 톤을 유지한다는 것 또한 인상적이다. ‘의사 로비스트들은 워싱턴에서 승리하는 방법을 알고 있다(2017년 7월 22일)’는 뉴욕타임스 기사가 가장 눈에 띈다. 기사는 의사협회를 학술 연구나 의료 공익 단체 정도로 생각하는 독자의 머리에 찬물을 끼얹는다, 시원하게.
“의사회는 종종 환자 옹호 단체로 자신을 내세우지만 실상은 의사 회원들의 이익만을 대변하는 강력한 로비 단체다. 환자에게 이익이 될 수 있는 변화일지라도 의사의 수입이나 독점권을 위협하는 개혁이라면 반대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또 비윤리적이거나 불법적 행동을 하는 의사들의 징계 축소나 적극적 변호에 나서는 경우도 적지 않다.”
기사는 미국 최대 의사 단체인 미국의사협회(AMA)가 수십 년간 동안 국민건강보험 반대 로비 활동을 벌여 왔다는 점을 폭로한다. 또 미국에서 저렴하고 접근성이 좋은 원격 의료 진척이 더딘 이유도 이들의 로비 때문이라고 지적하며 의사협회야말로 국민 보건의 가장 큰 위협이 될 수 있다고 경고한다.
2018년 10월 29일자 뉴요커(New Yorker) 기사 ‘의사들이 도움 되지 않는 치료를 제공하는 이유’ 역시 이런 관점을 공유한다. 의사 단체가 가장 열심히 그리고 용감히 나서는 ‘투쟁’은 의료 수가를 높이는 투쟁이었고 수익 향상을 위해서라면 더 많은 약물과 기기를 처방하도록 유도하는 제약업계와 뒷거래한다고 강도 높게 비난한다.
혹시 미국의 의사협회만의 특수함이 아닐까 싶어 영국의 경우를 살펴봤다. 시장과 이윤 중심의 미국 의료계와 반대로 영국은 보편 의료권을 내세운 국가 주도형 체계로 정평이 나 있기 때문이다. 안타깝게도 결과는 대동소이했다.세계 최초 의사협회, 영국의 BMA
영국의 국민보건서비스(NHS)는 월마트, 인도 철도공사, 중국 인민해방군에 이어 전 세계에서 넷째로 큰 고용주다. 150만 명이 넘는 인력을 거느린 NHS는 영국 내 등록의사 28만 명 중 약 83%에 해당하는 23만3000명을 고용하고 있다.
영국의학협회(BMA)는 이들 의사의 절대 다수를 회원으로 한다. 1832년 설립된 BMA는 중세 의과대학에 존재했던 길드 이후 근대에 형성된 첫 의료 직종 협회다. 미신과 민간요법, 요술과 과학이 뒤섞여 있던 19세기 영국, BMA 소속 의사들은 콜레라 창궐에 맞서 싸우며 과학적 의료 지식 확산을 주도했다.
런던 밖 지방 의료 종사자와 외과 의사들의 협력체로 출발한 BMA는 돌팔이 의사(quake)들의 의료 사기 범람에 맞서 의사 등록 제도를 도입하면서 의료 시술의 공적 기준도 강화했다. 그 결과 의사 집단에 대한 대중의 신뢰는 성직자에 대한 그것에 필적할 만큼 고양됐다.
산이 높으면 골이 깊은 법. 의료 개혁을 선도해 왔던 BMA는 점차 독점과 기득권 세력으로 변질돼 갔다. 1948년 영국의 국민보건서비스(NHS) 설립에 대한 BMA의 반대가 그 단적인 예다. 당시 보건부 장관 아네우린 베번의 의회 연설문을 보면 “NHS 도입을 의료계 이익에 위협으로 간주한 BMA는 악의적 루머를 퍼뜨리며 의료계와 정부 간의 긴장을 높이고 있다”는 내용이 등장한다.
영국 BBC 제작 다큐멘터리 ‘NHS의 탄생’에는 1948년 레슬리 호어-벨리샤 BMA 회장이 “우리는 포괄적 국가 의료 서비스가 대중과 의료 전문가 모두에게 해가 될 것이라고 믿는다. 우리는 필연적으로 관료적 간섭과 의료 기준의 저하로 이어질 국가 시스템에 반대한다”는 연설 장면이 이를 뒷받침한다.
그래서 전 NHS 디렉터 그레엄 윈야드 박사는 BMA가 국가 주도의 의료 시스템 도입의 장애물이었을 뿐만 아니라 “보편적 의료 서비스, 대체 의학 도입, 지역 사회 기반 의료 서비스 등 모든 새로운 의료 이니셔티브에 일관되게 저항해 왔다”고 주장한다.세상의 모든 의사협회, 그 거대한 카르텔
혹시 미국과 영국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 의사협회들도 그럴까 하는 불안한 생각이 들었고 이는 여지없이 적중했다. 일례로 프랑스 의사협회(Ordre des médecins)는 2018년 약사의 특정 약물 처방과 예방 접종 시행을 허용하는 법안에 반대했다. 결국 이 법안은 정부와의 협상 끝에 철회됐다.
2018년 독일 의사협회(Bundesärztekammer)는 전문 간호사에게 경미한 수술 및 약물 처방과 같은 의료 절차를 수행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법안에 반대했다. 협회는 이러한 변화가 환자의 안전을 위협할 수 있다는 전형적인 협박 카드를 썼고 이 법안은 의사 단체 의견에 따라 수정 축소됐다.
이들 기사를 접하면서 강한 기시감이 든다. 이 외에도 인도·중국·남아프리카공화국·브라질 등 세계 어디를 둘러봐도 하국의 실정과 너무도 닮은꼴이다. 최근 의협이 간호사들의 의료 업무 확장에 거세게 반발한 것은 이미 여러 나라에서 반복돼 온 선례의 재탕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각국 의사협회들의 집단행동 데칼코마니 뒤에는 115개 회원국을 거느린 세계의료협회(WMA)가 있다. 회원국 단체들은 여기에서 정책 동일화의 준거점을 찾는다. 말하자면 WMA는 의료 단체의 집단행동을 위한 ‘글로벌 스탠더드’를 제시하는 기구인 셈이다.
전 세계 의사협회가 공통의 ‘유산’으로 지켜 온 투쟁의 대표적 사례가 의과대학 정원 통제와 의사 수 제한이다. 놀랍게도 이 투쟁은 16~17세기 영국과 프랑스 왕립의료대학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대학들은 지원생들의 입학 및 향후 활동에 관한 엄격한 규정을 도입했고 다른 형태의 의료 교육이나 전문 지식을 갖춘 자들을 의료 사업에서 배제함으로써 독점적 지위를 유지해 왔다.
의사 수 증가는 의료 시장의 경쟁 심화로 이어지고 이는 다시 의료 단가 저하와 그들의 평균 수입 감소로 귀결될 수 있다. 나아가 의료 희소성과 시장 장악력 약화를 초래할 수 있기 때문에 일본과 한국을 비롯한 WMA 회원국 의사 단체들이 눈에 쌍심지 켜고 사수하는 숭고한 밥그릇이다.계급화된 집단행동 그리고 숭고한 카르텔
하지만 모든 의사협회 회원들을 도매금으로 묶을 수 없다. 단적으로 영국과 프랑스 협회는 영향력 있는 중견 의사들의 이해에 충실한 반면 회원 다수를 구성하는 수련의·전공의·주니어 닥터들의 요구에 무관심하다는 비판이 줄곧 이어져 왔다.
협회 내 회원들 간의 계급적 차별화는 1975년 영국 NHS 소속 주니어 닥터들의 파업 과정에서 여실히 드러났다. BMA 지도부의 무성의와 냉담은 올해 3월 영국 BMA 10차 이하 주니어 닥터들의 단체 행동에서도 반복됐다.
의사협회 내 수직 서열과 특권층 편향만큼이나 뚜렷한 차이는 일부 의사들의 이타적 집단행동에서 찾아진다. 세계 대부분의 의사협회들이 기득권 이익 집단으로 군림하고 있지만 소수 헌신적인 의사들의 ‘카르텔’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자. ‘국경없는 의사회’ 같은 위대한 인도주의 단체가 그것이다.
1971년 프랑스에서 결성된 이 의사회는 현재 70여 개국 3만5000명 이상의 회원이 활동 중이다. 세계 분쟁 지역과 지독한 유행병과 풍토병에 맞선 성전에 의사들이 나서자 간호사·응급구조사 등 의료 전문가는 물론 물류·수자원·위생 엔지니어와 전문 행정가들까지 팔 걷고 나섰다.
언제부터 의료가 장사가 됐는지는 알 수 없다. 그리고 언제부터 의사 단체가 공중 보건을 인질로 한 액션극의 달인이 됐는지도 그리 중요하지 않다. 폭염과 포화 속에서도 누군가의 질병과 고통에 참여하는 무모한 의료인들이 있다. 이들의 ‘카르텔’과 ‘집단행동’이야말로 세상을 지탱하는 숭고한 힘이다.
최정봉 사회평론가, 전 NYU 영화이론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