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퇴 무렵 마음을 어떻게 다스려야 할까요” [안주연의 다시, 연결]

[안주연의 다시, 연결]


요즘 시도 때도 없이 눈물이 나옵니다. 갱년기 증상인지 울컥하는 일이 잦고 슬퍼지네요. 꼭 회사 때문은 아니지만 정년이 다가오다 보니 정년 스트레스를 받는 것 같고 이것이 가장 큰 이유인 것 같기도 합니다. 열심히 살았지만 끝이 다가오는 느낌으로 큰 스트레스를 받는 것 같아요. 시도 때도 없이 짜증이 나고 감정 기복이 오락가락하고 눈물이 나는 게 가끔은 놀랍기도 합니다. 당장 은퇴하는 것은 아니지만 제 선배들을 보고 있으면 미래가 그려집니다.

나이가 들수록 회사에서는 없는 사람 셈 치거나 중요하지 않은 보직에 임명됩니다. 내 미래도 그렇겠구나 하면 요즘 일하는 것도 흥이 나지 않아요. 후배들이 치고 올라오는 것도 눈에 보이고 저와 맞지 않는 자리로 옮겨질까봐 불안하기도 해요. 쉰이 되기 전에 제2의 인생을 준비해야 하는데 직장 생활을 계속 해야 할지, 아니면 새로운 준비를 해야 할지, 전직을 하거나 사업을 할지 고민만 많고 현 업무가 많은 상태라 준비하기도 어렵네요. 스트레스에 억눌리다 보니 눈물이 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해요.

경호 님(가명), 안녕하세요.

이렇게 경호 님의 이야기를 들려줘 고맙습니다. 편지 속에서 열심히 살아온 경호 님의 삶이 읽혀 마음이 찡했습니다. 각 항목마다 성실하고 꼼꼼하게 잘 적어준 데서 경호 님의 일처리 스타일도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경호 님은 갱년기를 어떻게 극복해야 할지, 은퇴 전에 마음을 어떻게 다스려야 할지 물었습니다. 지금까지 열심히 산업계를 이끌어 온 40대 후반~50대 직장인들은 경호 님의 상황과 마음에 어느 정도 공감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어려움을 사연으로 보내준 경호 님에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답을 해 보겠습니다.

경호 님, 정말 열심히 살아오셨습니다. 새벽부터 이어져 데드라인을 맞춰야 하는 업무, 저녁 미팅이나 회식 등으로 길어지는 하루…. 소진될 위험성이 큰, 절대 업무량이 많은 일과를 이어 왔네요. 다들 오래 일하는 한국에서조차 주변에서 감탄하고 동료들도 대단하다고 생각할 정도의 워커홀릭으로 살아온 것 같습니다. 기획 성공 반영률도 높고 업무 능력으로 인정받고 있지만 중요하지 않은 보직으로 옮겨지는 선배들의 모습을 보면 허무하고 다가오는 정년도 걱정된다고 했습니다.

한국 기업에서는 일에 대한 열정·경험·능력을 가지고 있는 팀장급 이상의 중견 인재들에게 높은 실적과 책임을 요구할 뿐 이들에 대한 업무 심화 연수나 리더십 교육 등은 충분하지 않은 경우가 많습니다. 팀장들에게 팀을 잘 이끌라고 압박하면서도 이들이 주요 의사 결정에 참여하고 사내 교육에 임하는 식으로 능력을 펼칠 수 있는 기회와 시스템은 많이 부족한 것이지요. 이러한 경력 인력 홀대는 전체 산업이나 회사 인력 운용에서도 큰 손실이고 당사자들에게는 소외감과 허무감을 안겨줍니다. 이를 겪고 있는 선배들을 보며 느끼는 경호 님의 불안감과 서글픔은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여기에 더해 시도 때도 없이 짜증이 나고 기분이 오락가락하고 울컥 눈물이 나는 경호 님의 감정선에는 갱년기의 호르몬 변화가 작용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아요. 갱년기를 잘 겪어 내기 위해서는 하고 있는 운동 외에도 충분한 휴식과 주변의 지지 그리고 자신에 대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갱년기는 왕성했던 체력이 주춤하면서 강해야 한다는 강박이 줄고 솔직한 욕구와 감정이 올라오는 시기이기도 합니다. 살기 위해 뒤쪽으로 밀어뒀던 자신의 그림자와 만날 수 있는 기회인 것이지요. 삶의 반환점에 가까워 온 지금은 그동안의 자기 모습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이를 바탕으로 앞으로의 삶의 밑그림을 그려 가야 할 중요한 때입니다. 전반기의 삶이 지적·경제적 기반을 만들어 가고 대인 관계망을 넓혀 가는 데 집중하는 시기였다면 인생 후반기는 깊이 있는 몇 관계를 심화시키고 심리적인 안정성을 강화해 가야 하는 때입니다. 이를 위해 지금 해야 할 일은 자신의 감정을 잘 느껴 보는 것입니다.

제가 경호 님의 사연을 읽으며 느낀 핵심적인 감정은 ‘외로움’이었습니다.

물론 인간은 누구나 외롭습니다. 혼자 태어나 혼자 결정하며 혼자 죽습니다. 영원을 약속했던 친구나 연인, 가족과도 죽음이나 인연의 다함으로 멀어집니다.

그런데 제가 글을 읽으며 그려본 경호 님은 이성도 발달해 있지만 상당히 감정적·감성적인 면이 강하고 타인의 감정도 민감하게 잘 읽고 배려하는 세심한 분입니다. 감정적인 에너지의 진폭이 큰 편이고 직감도 발달해 있어 한 번 꽂힌 일에는 열정을 가지고 몰입할 가능성이 높아요. 에너지 레벨이 높을 때는 창의성도 높고 대담성도 커 큰 결정을 단번에 하는 면모도 있을 듯합니다.

이렇게 열정적으로 사는 만큼 지쳤을 때는 상당히 센티멘털해지고 외로움과 허무감도 유독 깊이 느끼는, 감수성이 높은 분이 아닐까 합니다. 경호 님의 열정과 감각에 감탄하고 존경하는 사람도 많을 텐데, 막상 경호 님은 자신을 자기 마음처럼 이해해 주는 사람이 없고 따르고 기댈 사람이 없다고 느낄 가능성이 높습니다. 에너지가 높을 때의 경호 님처럼 이성과 감성을 병용해 일과 관계에 만전을 기하는 사람을 만나기가 쉽지 않을 테니까요. 또한 주변 사람들도 경호 님을 좋아하면서도 일에 몰입했을 때의 속도나 행동의 폭을 따라가기 힘들어 범접하기 어렵다고 느낄 수도 있습니다.

게다가 경호 님은 중년기에 중요한 배우자의 지지를 받을 수 없는 상황이고 부모님과 아이에 대한 책임감도 온전히 혼자 견디고 있죠. 직장에서도 누군가에게 중재를 요청하기보다는 이끌어 가는 위치에 있고요. 이처럼 본인의 취약한 면을 드러내고 의지할 사람이 없는 환경이 지속되다 보면 빈틈을 보이면 안 된다는 강박적인 모드에 빠져들기 쉽습니다. 일에 매여 있게 되고 마는 것이지요. 관계에서도 서로 속내를 드러내기보다는 상대의 어려움을 들어주고 밥을 사주는 일방적인 상담자의 역할만 맡게 될 수 있습니다. 친구는 많지만 외로운 상황이 되는 것이지요.

사실 경호 님은 끊임없이 자신을 돌아보고 부족한 점을 노력으로 채우려고 하는 분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창의적이고 일을 잘 기획하지만 약간 충동적인 면을 보완하기 위해 치열한 노력을 통해 책임감과 성실까지 더한 직장에서의 페르소나(가면)를 만들어 온 게 아닐까요. 페르소나는 필요하고 지금은 그것이 잘 작동하고 성과를 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지금 필요한 것은 오늘의 진짜 자신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열심히 일해 온 분일수록, ‘나’라는 개념이 자기 일, 직장 등의 공적 정체성에 한정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제는 이를 대체할 ‘나는 어떤 사람인가’에 대한 솔직하고 다양한 발견과 답들이 필요합니다. ‘나는 어떤 것을 좋아하는지’, ‘어떻게 살고 싶은지’, ‘뭘 할 때 행복한지’, ‘누구와 무슨 대화를 나누고 싶은지’를 깊이 이해하기 위한 시도를 해야 합니다.

시작은 어렵지 않습니다. 우선 업무에 대한 강박을 조금 내려놓고 멋진 선배가 돼야 한다는 압박감도 느슨히 하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선후배들과의 식사 자리에서는 걱정과 취약함도 조금씩 이야기해 보길 바랍니다. 주말에 일과 관련 없는 하이킹이나 짧은 여행도 가자고 제안해 보고 밥과 술도 얻어 먹어 보세요. 누군가는 그런 모습을 낯설어할 수도 있고 감수성이 과하다고 부담스러워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자신의 솔직한 바람과 속내를 털어놓다 보면 싸우고 화해하기도 하는 진짜 친구 몇 명이 생길 겁니다. 우선 여기에서 출발해 보면 어떨까요.

경호 님의 책임감과 업무에 대한 몰입은 이미 충분하다고 봅니다. 여기에 타인을 배려해 왔듯이 스스로를 섬세히 관찰하고 돌보는 자기 돌봄과 취약성을 드러내고 소통할 용기가 더해진다면 기대되는 인생 후반을 맞이할 수 있을 겁니다. 경호 님의 ‘미움받을 용기’, ‘힘들고 두렵다고 말할 용기’를 응원합니다.

안주연 마인드맨션의원 대표원장(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한경비즈니스는 ‘안주연의 다시, 연결’을 연재하며 독자들에게 상담 편지를 받고 있습니다. 직장인의 마음 상담을 주제로 다양한 여러분들의 이야기를 듣고 안주연 마인드맨션의원 대표원장(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이 직접 답합니다. 하단 링크에서 직접 사연을 작성하거나 이메일(poof34@hankyung.com)로 보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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