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리단길에서 웨이팅 없는 핫플? 뮤직 펍 노커어퍼 [MZ 공간 트렌드]

핫 플레이스라고 유명한 장소에 갔는데 앉을 자리가 없어 시무룩하다. 이런 일은 왕왕 일어난다. 미리 예약할 수 있는 온라인 서비스를 이용하려고 해도 한 달 전부터 예약이 차 있거나 현장 대기만 가능해 가게 오픈 전부터 문 앞에 줄을 서기도 한다. 최근 삼각지역과 신용산역 사이 골목길을 부르는 ‘용리단길’은 요즘 뜨는 공간이라고 소문나 어디든 발 디딜 틈이 없다. 퇴근길에 들른 용리단길, 셋째로 도착한 술집에서 만석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노커어퍼를 떠올린다. 노커어퍼는 갈 수 있을 텐데, 이곳은 서서 술 마시는 뮤직 펍이다.

노커어퍼 외관. 그래피티로 간판을 활용했다. (사진=내궁)

노어커퍼 중앙에 있는 바 테이블. 이곳에서 주문을 받는다. (사진=내궁)


다리가 아프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펍(pub)은 영국의 오랜 문화다. 퍼블릭하우스(public house)의 준말로 모두의 공공장소라는 의미다. 빅토리안 시대 영국인들은 수질 오염이 심해지자 물보다 깨끗한 음료로 맥주를 찾았고 펍은 노동자들의 휴식처가 됐다. 그러니 펍은 유흥 주점이 아닌 사람들과 교류를 위한 노동자들의 살롱에 가깝다. 다시 바삐 일하러 가야하는 노동자들의 문화 때문인지 고상하게 앉아 먹기에 시간이 없어서인지 런던 펍에서는 대부분 맥주를 서서 마신다.

노커어퍼는 영국의 펍에서 영감을 얻었다. 가게 안에는 스탠딩 테이블 몇 개와 창가 앞 의자가 전부다. 운좋게 의자에 앉더라도 직원이 주문을 받으러 테이블로 오지 않는다. 자리에서 마냥 기다리는 것보다 출입구 정면에 있는 계산대로 가는 것이 좋다. 10시가 넘은 시간에는 손님이 많아져 그들 틈 사이를 헤집고 가야 한다. 이곳에서는 스파클링 칵테일·까바·하이볼·맥주 등 여러가지 주류를 병과 잔술로 제공한다. 곁들일 수 있는 안주는 간단한 타파스 형태다. 잔술과 안주 모두 1만원대의 가격에 부담 없이 주문할 수 있다. 문제는 주문한 뒤다. 어디에 서 있어야 할지, 가방은 어디다 둬야 할지 고민하며 겨우 난간에 기대 있는 형편이다. 영국에서 펍이라는 말이 17세기 후반에 처음 등장했으니 영국인들은 4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서서 마셔서 익숙하겠지만 좌식 문화가 발달한 우리에게는 왠지 어색하다.

공간 내부는 영국 런던의 펍을 연상케한다. (사진=내궁)


메뉴가 준비되면 좌우로 길게 뻗은 중앙의 바에 올린다. 이곳의 시그니처 하이볼인 ‘노커어퍼 하이볼’을 주문했다. 적당히 달다. 가격도 맛도 적당해 한 잔이 두 잔으로, 두 잔이 세 잔으로 늘어난다. 긴장이 풀리니 이제야 주변이 보이기 시작한다. 한쪽에서는 이제 막 만난 듯한 커플인지 모를 두 남녀가 상기된 얼굴을 마주보고 있고 한 남자는 일행의 손에 쥔 스마트폰을 가져가 사진을 찍어 준다. 사람들과 등을 마주대면서 날씨 이야기를 시작으로 애인 이야기까지 온갖 소식을 주고받으며 시간을 보낸다. 낯선 이와 눈이 마주치면 찡긋 눈인사를 주고받고 ‘따로 또 같이’라는 말을 몸소 느끼다 보면 어느새 자정이 지난다.

입간판에 그려진 노커어퍼. (사진=내궁)
출입구 위에 쓰여진 문구 'WAKE UP!'.

21세기형 ‘노커어퍼’
노커어퍼라는 이름은 노커 어퍼(Knocker-upper)라고 불린 사람들에서 따왔다. 영국 1920년 산업혁명 시절 있던 직업이다. 교대 근무를 하던 영국 노동자들을 깨워주는 것이 이들의 일이었는데 기다란 막대로 창문을 툭툭 치거나 작은 돌을 던져 노동자들을 깨웠다. 노커어퍼를 기획한 식음료(F&B) 크리에이터 진내경(이하 내궁)은 노커어퍼에서 일과를 마친 직장인들이 다시 한 번 깨어나길 바랐다. 그는 낯선 공간에서 흥미를 느낄 수 있게 다양한 시도로 기획자의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스탠딩 문화가 어색한 사람들을 위해 개업 초반에는 전혀 없던 의자를 평일에는 창가 위주로 배치했다. 의자에 앉아 있는 사람을 보고 들어오라는 사인이었다. 주저하던 공간에 발을 디디면 쭈뼛대던 사람도 음악과 분위기에 금세 어우러진다.
노커어퍼 2층. 2층이 만석이라면 1층에서 기다릴 수 있다 . (사진=내궁)

1층의 스탠딩 바에서 자유롭게 시간을 보냈다면 2층에서는 좀 더 프라이빗하게 즐길 수 있다. 뮤지션의 아틀리에를 콘셉트로 LP판과 스피커, 삼삼오오 앉을 수 있는 테이블이 있다. 2층은 사전 예약이 가능하다. 만석이라면 1층에서 기다리면 된다. 이용하기 위해서는 보틀을 주문해야 하지만 가장 저렴한 샴페인이 5만원대부터 시작해 비싸지 않은 편이다. 재즈 뮤지션의 공연, 노커어퍼만의 감성을 녹인 디깅(digging)도 빼놓을 수 없는 매력이다. 가수 콜드가 직접 음악을 큐레이션했다. 1층에서 보틀을 주문하면 스파클링 타워 이벤트도 해준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일상적인 행위를 하면서 비일상을 느끼는 것일지 모른다. 부담 없이 간편하게 좋은 음악과 약간의 소란 속에서 칵테일 한 잔을 마시는 일. 지친 하루가 이야기와 사람이 오가면서 자연스럽게 환기된다. 낯선 공간에서 또 다른 자아가 깨어난다.

1층에서 보틀 1병을 주문하면 스파클링 타워를 요청할 수 있다. (사진=내궁)

윤제나 한경무크 기자 zena@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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