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이 아니라 취향입니다, 작은 연필 가게 ‘흑심’ [MZ공간트렌드]

추억이 아닌 취향입니다
작은 연필 가게 흑심

- 연필의 모든 것을 만날 수 있는 레트로 숍

‘추억’이라는 단어가 주는 정감이 있다. 하지만 추억은 추억일 뿐 지나간 것은 잊어버려야 한다고 말하기엔 아까운 물건들이 많다. 그중 하나가 연필이 아닐까. 쓸 때마다 나는 서걱서걱 연필심의 소리와 쓰다 보면 뭉툭해지는 연필 끝의 모양, 그리고 다시 연필깎이에 꽂아 혹은 칼로 결을 따라 깎아내는 과정까지. 짧고도 지난한 여정으로 뾰족한 촉을 얻게 되고 필기할 수 있게 된다. 이러한 과정에 가치를 부여하고 연필이라는 취향을 존중하기 위해 만들어진 공간이 있다. 연남동에 있는 ‘작은 연필 가게 흑심’이다.
과정의 미학시간이 되면 깎아야 되는 연필과 달리 펜은 한 자루도 다 쓰기 어려울 만큼 여유로운 잉크가 담겨 있다. 색·촉감·브랜드 등이 모두 다양하기 때문에 고르는 재미마저 쏠쏠하다. 지워지지 않는다는 가장 큰 단점도 수정 테이프를 활용하면 되고 나아가 지워지는 펜까지 나왔으니 ‘바쁘다 바빠 현대 사회’에서 연필 대신 펜을 선택할 이유는 충분해 보인다. 하지만 가끔은 연필이 그립기도 하다. 손에 흑심이 까맣게 묻은 줄도 모르고 깍두기 공책에 가나다라를 열심히 쓰고 잘못 써서 지우개로 박박 지우며 지우개 가루를 후 불던 그때가 새록새록 떠오를 때가 있다. 펜보다 가볍고 쓰고 지우기가 편하고 연필만이 지닌 색감이 연필꽂이에 연필 한두 자루씩 넣어 두게 만든다.

하지만 작은 연필가게 흑심은 연필이 더는 추억의 뒤안길로 사라질 도구가 아니라고 말한다. 연필은 여전히 누군가에겐 필수품이자 누군가에겐 개인의 취향이기 때문이다. 바쁠수록 돌아간다는 말처럼 가끔은 쓰기 위한 느린 과정에 가치를 부여한 것이다. 이들을 위해 흑심에서는 단종된 빈티지 연필부터 지금까지도 생산되고 있는 연필까지 다양한 연필들을 만나볼 수 있다.


작은 연필 가게를 찾아서연남동에 있는 흑심은 꽁꽁 숨어 있는 것처럼 의외의 건물에 자리하고 있다. 엘리베이터도, 커다란 간판도 없지만 계단을 오르다 보면 곳곳에 붙어 있는 연필 스티커를 볼 수 있다. ‘여기 연필 가게가 있긴 하나’라고 의심하는 사람들을 안심시키는 최소한의 장치처럼 보인다. 흑심은 들어서기 전에 어린아이 키 만한 노란 연필이 세워져 있다. 큰 연필만으로 ‘이곳은 연필에 자신감이 넘치는구나’라는 생각이 절로 들게 한다.

특유의 나무 냄새가 솔솔 풍기는 가게에서 가장 눈에 들어오는 것은 문구점인 듯 디자인 숍인 듯 보이는 인테리어다. 누군가의 필통을 크게 만들어 놓은 듯한 진열장, 벽면 가득 진열해 놓은 연필 상자, 연필을 만년필처럼 꽂아 놓은 테이블 등 빈티지의 대명사 연필은 빈티지한 인테리어로 그 가치를 높인다.

흑심에서는 연필이 진열된 곳곳에서 큐레이션 문구도 만나볼 수 있다. 가장 인상적인 것은 초보자들에게는 점보 연필을 추천한다는 안내였다. 이와 함께 상세한 설명도 적혀 있는데, 일반 연필보다 굵은 형태의 점보 연필은 팔압이 약한 사람들에게 적합하다는 내용이다. 무엇보다 압 조절이 어려워 연필 끝이 자주 부러지는 어린 학생들에게 특별한 선물이 되지 않을까 싶다. 또한 도안을 그리거나 목공을 할 때 쓰기 좋은 굴러가지 않는 납작한 연필, 강아지 지우개가 달려 있는 연필, 여러 메시지가 새겨진 알록달록한 연필까지 ‘세상에 나쁜 개는 없다’는 강형욱 훈련사의 말처럼 세상에 가치 없는 연필은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곳이 아닐까 싶다.



검은 마음, 흑심알고 보면 연필은 생각보다 신비한 물체다. 연필은 중력의 영향을 받지 않아 물속에서도 쓸 수 있고, 심지어 우주에서도 쓸 수 있다고 한다. 그러니 이 지극히 일상적인 녀석이 매력적이지 않을 수 없다.

숯이나 돌로 나무에 그림을 그리던 선사시대를 지나 진짜 연필이라 불릴 수 있는 것은 16세기에 만들어졌다. 유구한 연필의 역사를 증명이라도 하듯 흑심에서는 오래된 빈티지한 연필들을 여럿 만날 수 있다. 하지만 오래 됐기에 전시되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흑심에서는 시필 연필이 제공된다. 직접 연필을 써보는 경험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주인장의 배려가 엿보인다. 연필이 다 거기서 거기겠지 싶은 생각은 금물이다. 시필을 하다 보면 이 연필가게의 존재 이유를 만나게 된다.

‘블랙윙602’는 어니스트 헤밍웨이, 월트 디즈니, 존 스타인 벡 등 유명 예술가들이 즐겨 사용하기로 유명하다. 거장들의 이름이 담겨 있는 설명에 한 번, 매끄러운 필기감에 또 한 번 놀라게 되는 마술의 연필이다. ‘빈티지 제럴드 세미498’ 연필은 약 1960년대 처음 제작된 것으로, 오래된 빈티지 연필이고 숫자마다 진하기의 차이가 있다. 연필 하나하나 모두 생산 연도와 뒷이야기가 담겨 있어 하나의 연필이 아닌 특별한 오브제를 구매한다는 기분을 선사한다. 또한 몽당연필을 가져가면 새 연필과 바꿔 주는 이벤트도 하고 있으니 구입한 연필을 잃어버리지 않고 끝까지 쓰기로 다짐도 해본다.

기자가 방문한 날에는 근방 초등학교에 다니는 학생과 학부모가 방문했다. 연필과 지우개를 꼼꼼히 살펴보고 이야기를 나누는 그들의 모습은 단순한 소비자가 아닌 이 공간에 ‘머무르는 사람’처럼 보인다. 이곳은 연필을 과거의 산물로 추억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로 향유하고 끼적이며 멋진 미래를 상상하게 한다. 검은 마음(Black Heart)이라 스스로를 칭하지만 사실은 우리에게 멋진 마음을 선물해 주는 것만 같다.

이민희 기자 minhee@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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