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차 판결 후폭풍…“불법파업 판 깔아줘” [김진성의 판례 읽기]

현대차 파업 손해 배상 1·2심 파기 환송
노조원 손해 배상에 제동건 대법원
산업계, ‘노란봉투법 닮은꼴’ 비판

[법알못 판례 읽기]

서울 서초구 양재동 현대차그룹 빌딩 앞 신호등에 빨간불이 켜져 있다. 사진=한국경제신문



불법 파업에 참여한 노동조합원에게 기업이 손해 배상을 청구할 때는 조합원 개인별로 책임 정도를 판단해야 한다는 대법원 판단이 나왔다.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 개정안(노란봉투법)’이 국회에 계류돼 있는 상황에서 이 법의 취지와 비슷한 판례가 생긴 것이다.

산업계는 ‘패닉’에 빠진 분위기다. 경제 단체들은 판결 직후 “손해 배상 청구를 원천적으로 제한한 것과 다를 바 없다”고 불만을 쏟아냈다. 법원이 사실상 불법 파업의 판을 깔아줬다는 지적이 나온다.

노조 불법 점거라도…조합원 책임 각각 판단해야

대법원 3부(주심 노정희 대법관)는 2023년 6월 15일 현대자동차가 전국금속노조 현대차 비정규직지회 조합원 4명을 상대로 낸 손해 배상 청구 소송의 상고심에서 원고 일부 승소로 판결한 원심을 깨고 사건을 부산고등법원으로 돌려보냈다.

재판부는 “노조에서의 지위와 역할, 쟁의 행위 참여도, 손해 발생에 대한 기여 정도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조합원별로 책임 정도를 판단해야 한다”며 “노조와 개별 조합원의 손해 배상 책임 범위를 동일하다고 보는 것은 헌법상 노동자에게 보장된 단결권과 단체행동권을 위축시킬 우려가 있다”고 판단했다.

현대차 비정규직 노조 조합원들은 2010년 11월 15일부터 12월 9일까지 현대차 울산공장 1‧2 생산 라인을 점거했다. 현대차는 이로 인해 공정이 278시간 중단돼 손해를 봤다며 20억원의 손해 배상금을 청구하는 소송을 냈다.

1·2심에선 모두 노조의 불법 쟁의 행위에 참여한 조합원들에게도 손해 배상 책임이 있다는 판결이 나왔다. 재판부는 피고들에게 20억원의 배상금을 지급하라고 명령했다. 다만 2심은 조합원 책임을 50%로 제한했다. 배상금 규모는 135억7000만원으로 산정했지만 법원 배상금이 원고(현대차)의 청구액을 넘을 수 없어 배상금 20억원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하지만 대법원에서 판결이 뒤집혔다. 대법원은 일반 조합원에게 노조와 같은 수준의 책임을 물어서는 안 된다고 봤다. 공동으로 불법 행위를 저질렀을 때는 개별 책임 비율을 묻지 않는 현행법상 ‘공동 불법 행위의 원칙(부진정 연대 책임)’과 배치되는 판단이다.

대법원은 이에 대해선 “노동쟁의 사안의 특수성을 고려해 예외적으로 조합원 개별로 책임 제한의 정도를 평가할 수 있다는 점을 최초로 명시했다”면서 “(과거에도 일부 판결에서) 예외적으로 공동 불법 행위자들 사이의 책임 비율을 달리할 수 있다고 판단한 적이 있다”고 했다.

‘노란봉투법 3조’ 통과나 마찬가지

법조계는 이번 판결로 노란봉투법의 핵심 내용이 사실상 도입된 효력을 발휘할 것으로 보고 있다.

노란봉투법 제3조는 ‘노조 활동으로 인한 손해 배상 책임을 인정할 때는 각 손해의 배상 의무자별로 귀책 사유와 기여도에 따라 개별적으로 책임 범위를 정해야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불법 쟁의 행위에 참가한 노동자에 대한 손해 배상 청구를 제한하는 취지다.

기업들이 ‘파업조장법’이라고 비판하는 이 개정안은 더불어민주당 등 야권이 강하게 밀어붙여 지난 2월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법안심사소위원회를 통과했다. 지난 5월엔 국회 본회의에 올라갔다.

국민의힘은 이에 맞서 헌법재판소에 권한 쟁의 심판을 청구하고 윤석열 대통령에게 거부권 행사를 건의하겠다는 뜻까지 내비치며 저지 의지를 강하게 나타냈다. 이처럼 첨예한 갈등이 이어지던 와중에 대법원이 먼저 노란봉투법의 핵심 쟁점을 다룬 판례를 내놓은 것이다.

노동계와 산업계 모두 이번 판결로 인해 기업들이 이전보다 불법 파업에 따른 손해 배상 책임을 묻기 어려워졌다고 보고 있다.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은 판결 직후 성명을 통해 “오늘 판결은 향후 대법원이 헌법상 노동3권 보장 취지를 충분히 살려 쟁의 행위로 인한 손해 배상 책임을 엄격하게 제한하겠다는 기조를 명확히 한 것”이라며 “국회는 더 이상 주저하거나 망설이지 말고 본회의에 상정된 ‘노란봉투법’을 신속하게 통과시키라”고 촉구했다. 한국노동조합총연맹도 논평을 내 “정부·여당은 신속히 사법부의 판단을 존중해 노란봉투법을 처리하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경제 단체들은 불안감을 토로했다. 황용연 한국경영자총협회 노동정책본부장은 “손해 배상 청구를 원천적으로 제한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고 비판했다.

추광호 전국경제인연합회 경제산업본부장도 “산업 현장의 불확실성이 커지고 기업 투자를 위축시키는 등 국가 경제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했다. 당사자인 현대차 측은 “산업계에 미칠 파장이 우려된다”면서 “판결문을 면밀히 검토해 파기 환송심을 준비하겠다”고 말했다.


[돋보기]

김명수 대법원장. 사진=연합뉴스


김명수, 임기 말 ‘친노조 판결 알박기’…불안에 떠는 기업들

대법원의 이번 판결을 두고 김명수 대법원장이 임기 말 ‘친노동 판결 알박기’에 나선 것이란 비판이 이어지고 있다. 김 대법원장 취임 후 6년간 핵심 노동 사건에서 노동자 측의 손을 들어주는 판결이 잇따른 가운데 임기 막판에 다가갈수록 ‘편파 판정’ 성향이 더욱 짙어지고 있어서다.

김 대법원장 체제가 출범한 2017년 9월 이후 대법원은 각종 노사 분쟁에서 파급력이 상당한 판결을 내놓았다.

통상 임금 소송이 대표적이다. 대법원은 2020년 8월 기아 노동자들이 정기 상여금 등을 통상 임금으로 인정해 달라며 회사를 상대로 낸 소송에서 노동자 측 승소로 판결한 데 이어 2021년 12월 정기 상여금을 통상 임금 소급분에 포함할지를 두고 HD현대중공업 노사가 다툰 소송에서도 노동자 측의 손을 들어줬다. 2022년 11월에는 ‘재직 중인 노동자만 받는다’는 조건이 붙은 금융감독원의 정기 상여금도 통상 임금으로 봐야 한다고 결론 내렸다.

대법원은 불법 파견 분쟁에서도 노동자 측에 힘을 실어주는 판결을 잇달아 내렸다. 2022년 7월 포스코에 “협력 업체 노동자 59명의 파견 지위를 인정하고 이들을 직접 고용하라”고 판결했다. 지난 4월엔 ‘불법 파견을 인정받은 하청 업체 노동자가 최대 10년 치 임금 차액을 원청에 청구할 수 있다’는 판단까지 내놓았다.

대법원은 2022년 5월 “합리적 이유 없이 나이만으로 직원 임금을 삭감하는 임금 피크제는 무효”라며 임금 피크제 효력을 둘러싼 소송전에도 불을 지폈다. 법조계에선 대법원이 진보 성향 대법관의 임기 종료 전에 계류 중인 주요 노동 관련 현안 재판을 서두를 것이란 관측이 나온다.

다음 달 임기를 마치는 조재연(중도)·박정화(진보) 대법관의 후임으로 중도 성향인 서경환 서울고등법원 부장판사와 권영준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가 합류하면 대법원 전원합의체를 구성하는 13명(대법원장 포함) 중 진보 대법관은 6명으로 줄어들게 된다.

여기에 윤석열 대통령이 오는 9월 퇴임하는 김 대법원장의 후임으로 중도나 보수 성향 인물을 임명하면 대법원의 진보 성향이 이전보다 옅어질 가능성이 높다.

현재 주목받는 사건은 HD현대중공업이 하청 노동자들과 단체 교섭할 의무가 있는지를 두고 전국금속노동조합과 다투는 소송이다.

HD현대중공업이 1·2심에서 승소할 때만 해도 승기를 굳혔다는 평가가 많았지만 지난 1월 CJ대한통운이 같은 쟁점의 소송(1심)에서 패소하면서 분위기가 바뀌었다. HD현대중공업이 패소하면 노란봉투법 2조(하청 노조의 원청 상대 교섭 요청 가능) 도입 효과가 나타날 수 있다.

민간 기업의 경영 성과급을 임금으로 봐야 하는지(삼성전자·SK하이닉스·LG디스플레이 등), 재직 중인 노동자만 받도록 규정된 민간 기업의 정기 상여금도 통상 임금인지(세아베스틸)를 두고 벌어진 소송도 많은 관심을 받고 있다.

법조계 관계자는 “김 대법원장이 임기 중 최대한 상징성 있는 판결을 많이 남겨 업적으로 삼으려고 할 수 있다”며 “현재 대법원에서 법리 다툼에 한창인 기업들은 ‘차라리 재판이 지연되는 게 낫다’고 여길 정도로 불안감이 크다”고 말했다.



김진성 한국경제 기자 jskim1028@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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