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주영은 어떻게 신화가 됐나 [EDITOR's LET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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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어느 날, 현대중공업 울산 공장에 취재를 갔습니다. 공장에 들어서자 플래카드 하나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우리가 잘되는 것이 나라가 잘되는 길이며, 나라가 잘되는 것이 우리가 잘되는 길이다.”

시대착오적으로 느껴졌습니다. 안내를 맡은 부장급 직원에게 물었습니다. “요즘이 어떤 시절인데 저런 걸 붙여 놓는 거지요. 저걸 보면 직원들은 무슨 생각을 하나요?” 그는 웃으며 답했습니다. “정주영 회장님이 하신 말씀이에요. 요즘도 저 글귀를 보면 마음이 찡합니다.” 정 회장 지시로 바다를 메워 조선소를 지은 일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다 비슷하다고도 했습니다.
40년간 세계 1위를 지키고 있는 한국 조선업의 출발은 이제 신화가 됐습니다. 벌어진 일도 신화에 가깝습니다.

1960년대 건설업으로 성공한 정 회장은 1970년대 들어 조선업 진출을 결심합니다. 논리는 단순했습니다. “중화학 공업으로 가야 한다. 건설업 현장을 바다로 옮기는 것이 조선업이다.” 하지만 공장도, 돈도, 기술도 없었습니다. 차관이 필요했습니다. 정 회장은 미포만 백사장 사진, 지도, 빌린 도면만 달랑 들고 유럽으로 건너갑니다. 선박금융이 발달한 영국이 그의 행선지였습니다. 바클레이스은행을 찾아 갑니다. 당연히 거절. 미치지 않고서야 공장도 없는 후진국 기업에 돈을 빌려줄 리 만무했겠지요.

수소문 끝에 은행에 영향력 있는 영국 선박 컨설턴트 롱바통 회장을 찾아가 추천서를 부탁했습니다. 여기서 그 유명한 ‘500원의 신화’가 탄생합니다. 거부하는 롱바통 회장에게 500원짜리 지폐 뒷면에 있던 거북선을 보여주며 설득합니다. “우리는 영국보다 300년 앞서 철갑선을 만들었다.” 영국인 롱바통은 추천서를 써줬습니다.

추천서를 들고 은행으로 향했습니다. 바클레이스은행은 “배를 수주해 오면 차관을 해주겠다”고 조건을 답니다. 정 회장은 우여곡절 끝에 그리스 선박왕 리바노스를 찾아갑니다. 선박을 싸게 건조해 주고 하자가 발생하면 원금을 돌려주겠다는 파격적 제안으로 26만 톤짜리 배 2척을 수주하는데 성공합니다. 차관은 성사됐습니다.

납기가 빠듯한 문제는 창의적 발상으로 해결합니다. “조선소부터 짓고 배를 만들라는 법은 없다”며 선박 건조와 조선소 공사를 동시에 진행합니다. “길을 모르면 길을 찾고 길이 없으면 길을 닦아야지”라는 말을 스스로 실행한 거지요. 1974년 63빌딩을 눕혀 놓은 것보다 1.5배 큰 배 두척을 성공적으로 진수합니다. 1983년 현대중공업은 건조 능력 기준으로 세계 1위에 오릅니다.

인상적인 것은 정 회장이 새로운 산업인 조선업에 진출할 때 나이는 59세였습니다. 그에게 멈춤이란 없었습니다. 그는 또 책상에 앉아 입만 가지고 경영하지 않았습니다, 차관도 직접 얻으러 갔고 서울과 울산을 오가며 조선소 건립을 지휘했습니다. 진수식에 앞서 바다 모래도 직접 파냈습니다. 유독 노동자들과 함께 찍은 사진이 많은 것도 그런 이유였습니다. 그는 현장주의자였습니다. 정주영 하면 강력한 실행력만 떠올리지만 반전이 있습니다. 그는 항상 창조적으로 미래를 설계했고 이를 위해 치밀하게 조사했습니다. 그렇게 사업을 시작하면 주저 없이 끝까지 밀어붙였습니다.

조선업을 비롯한 많은 한국의 주력 산업은 기로에 서 있습니다. 이 시기를 헤쳐 나가려는 리더들에게 정주영은 많은 영감을 줍니다. “조선업은 바다에서 하는 건설업”이라는 창조적 발상, “스스로 실패를 선언할 때까지 실패한 것이 아니다”라는 도전정신, 항상 현장에서 노동자들과 함께 하며 직접 문제를 해결하는 현장주의가 그 요체입니다.

가난에서 벗어나겠다며 4번이나 가출했던 소년 정주영. 지금 우리에게 그런 절박함이 있는지 자문해 봅니다.

김용준 한경비즈니스 편집장 junyk@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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