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또 이야기 3 : 복권이 탄생시킨 신생 국가 미국[최정봉의 대박몽(夢)-운과 잭팟의 경제]


즉석 복권의 장점은 명백하다. 추첨일까지 기다릴 필요가 없다. 인내심이 약해진 초스피드 시대에 걸맞은 선택이다. 2022년 북미복권협회(NASPL) 보고서에 따르면 스크래치형 즉석 복권이 전체 매출액의 70%을 차지한다고 한다. 티켓 판매 수로만 따지면 추첨식 복권의 3배를 초과한다.

즉석 복권의 역사는 1616년 영국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복권 전쟁(Lottery Wars)’의 저자 매튜 스위니에 따르면 런던 외곽 길거리에서 판매된 이 복권은 구입 즉시 당첨 여부를 알 수 있었고 추첨의 투명성을 과시하기 위해 현장에 있던 어린이가 드럼통에서 제비를 뽑도록 했다고 한다. 현장 즉석 복권의 등장 뒤에는 영국 왕실이 있었고 신대륙 탐험과 식민지 패권 경쟁이 그 추동력이었다.
즉석 복권 판매로 조달된 식민지 개척 자금
이탈리아·벨기에·네덜란드에서 열풍을 일으킨 정부 주관 복권은 프랑스를 거쳐 1566년 영국에 도착한다. 여왕 엘리자베스 1세가 영국 해군(Royal Navy) 함정 건조와 항구 정비 자금을 위해 복권 판매를 주관한 것이다.

당시 해상 무역의 주도권은 스페인에 있었고 이를 시샘하던 영국이 왕립 해군을 동원해 스페인 상선들의 운항 방해 공작에 뛰어든다. 영국은 식민지 점령에서도 스페인·네덜란드·프랑스에 뒤처져 있었다. 초조해진 엘리자베스 1세와 제임스 1세는 공공 복권으로 자금줄을 만들고 아메리카 신대륙 개척과 식민화에 박차를 가한다.

미대륙 식민화는 제임스 1세가 1606년 설립·허가한 두개의 무역회사에 의해 주도됐다. 버지니아 회사(Virginia Company of London)와 플리머스 회사(Virginia Company of Plymouth)가 그것인데 영국 왕실은 이들에게 복권 판매권을 부여했다.

1612년 버지니아 회사는 제임스타운(Jamestown) 식민지로 향하는 선박 자금용 복권을 발행했다. 회사는 대륙 개척의 명운이 복권에 달려 있다고 호소했고 애국심·자긍심·신앙심을 자극하기 위해 “복권 구매는 야만인(본토 원주민)의 영혼을 구하는 자선 행위”라고 선전했다.

그들이 제시한 상금 4000크라운으로 당시로서는 꽤 큰 금액이었지만 판매 실적은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플리머스 회사는 정착 치 뉴잉글랜드 토지를 상금으로 내걸고 복권을 발행했지만 이 역시 흥행에 실패하고 말았다.

실패 요인은 많았다. 우선 식민지 개척의 수혜가 왕실과 일부 귀족들에게만 돌아갔다는 점을 간과할 수 없다. 두 회사의 지분도 런던과 플리머스 지역 지배 계층이 독점했으니 상인들과 일반 시민의 적극성을 유도하기엔 역부족이었다.

신천지에서 날아온 불운한 소식들도 한몫했다. 최초 정착촌 제임스타운으로 이주한 주민 105명 중 80% 이상이 1609~1610년 사이 기아와 질병으로 사망했던 것이다. 이 밖에 식인종과 같은 흉흉한 소문이 신천지 ‘대박’의 단꿈에 찬물을 끼얹고 있던 차다.

기획 자체도 엉성했다. 발행된 40만 장의 복권은 각각 10실링(0.5파운드)이었는데 이는 당시 일반 노동자의 약 2~3주 임금에 해당하는 가격이었다.

또 모든 티켓 구매자가 상품을 받도록 설계됐지만 당첨품으로 제시된 은쟁반과 고급 리넨 등은 다수 대중의 구미를 자극하지 못했다. 더 큰 문제는 상품의 총 가치가 복권 전체 판매액과 같아 수익 자체가 불가능한 구조였다는 점이다.


<그림 1> 1656~1958년 영국에서 발행된 복권 홍보 전단

초기 복권이 부진하자 궁여지책으로 고안된 포맷이 길거리 즉석 복권이었다. <그림1>처럼 경품 내용을 스케치한 포스터가 도처에 나붙었다. “단숨에 부자가 될 수 있는 ‘꽝’없는 일반 복권”이란 상단 문구도 눈을 자극한다. 복권 구매자에게 살인이나 반역죄 같은 중범죄가 아닌 경우에 한해 한 번의 체포 면책권을 부여한 파격적 조건도 강한 유인책으로 작용했다.

교통과 통신 제약으로 복권 발행에서 추첨 완료까지 대략 몇 년이 소요됐던 시절인 만큼 즉석 복권은 자금의 빠른 유통과 회수의 비책이 됐다. 식민지 경쟁에서 뒤처졌던 영국에는 그야말로 ‘신의 한 수’였던 것이다. 아무튼 즉석 복권은 대성공이었고 회사는 4년간 약 2만9000파운드(현재 약 800만 파운드, 133억원)의 식민지 개척 자금을 적립했다.
명문대 설립과 운영 자금도 복권 수익으로영국인들에게 복권이 신천지 개발의 꿈이었다면 초기 미국 정착민들에게 복권은 자립을 위한 토대였다. 그래서 일부 학자들은 미국 초기 복권을 경품 당첨의 기회가 가미된 ‘자발적 세금’으로 규정한다. 투기보다 주민들의 공적 의무 성격이 강했다는 뜻이다.

실로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도모했던 미국 13개 식민지가 재정 자립을 위해 동원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수단이 복권이었다. 복권의 용처는 다양했다. 공공 건물, 도로, 운하 건설뿐만 아니라 도서관·교회·대학 등 문명과 윤리 인프라 구축에도 적극 활용됐다. 더 많은 정착민 모집을 위해 유럽으로부터의 이주를 지원하는 패시지 복권(Passage Lottery)이 등장하기도 했다.

후발 도시인 필라델피아가 버지니아 초기 정착촌의 성장을 추월할 수 있었던 동력도 복권 사업의 힘이었다. 복권을 통해 델라웨어 강에 포대를 쌓아 도시를 방어했고 강과 개울에 수많은 다리를 놓았으며 시골에서 도시로 이어지는 도로를 건설하는 공적 자금의 80% 이상이 복권 사업으로 충당됐다고 한다.

건국 영웅으로 칭송되는 조지 워싱턴, 벤저민 프랭클린, 존 핸콕도 다양한 복권 사업에 간여했다. 특히 벤저민 프랭클린은 필라델피아의 첫 병원, 도서관은 물론이고 유펜대(University of Pennsylvania, UPenn) 설립에 절대적 영향력을 미쳤다. 유펜의 두 설립자는 벤저민 프랭클린과 복권이었다는 농담이 있을 정도다.

하버드·예일·프린스턴·컬럼비아(당시 킹스 칼리지)·다트머스 등 아이비리그 대학의 설립과 운영의 상당 부분도 복권 판매 기금에 의존해야 했다.


사진 1. 프린스턴대(당시 칼리지 오브 뉴저지, College of New Jersey)의 운영 자금 확보와 확장 이전을 위해 1753년 발행된 복권.

하버드대(당시 Harvard College)의 복권 발행은 유펜과 프린스턴보다 늦은 1765년 시작됐다. 1772년 의회가 법안을 통과시켰고 1774년 복권 판매가 시작됐지만 이듬해 발발한 독립전쟁으로 인해 중단됐다. 복권 발행 권리는 20년이 지난 1794년 갱신됐고 이때부터 판매된 복권 수익으로 1804년 지어진 건물이 스토튼 홀(Stoughton Hall)이다.

이 복권은 발행 후 무려 10년에 걸쳐 판매됐고 1804년 추첨이 완료되는 시점에 1만8400달러의 수익을 거둘 수 있었다. 수익 중 1만 달러는 대학이 2000달러를 들여 구매한 티켓에서 발생한 당첨금(복권번호 18547)이었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사진 2. 하버드대(당시 하버드 칼리지, Harvard College)가 발행한 복권.

1810년 하버드대 당국은 또다시 복권 발행을 결정한다. 총 2만9000달러가 복권 판매로 모금되지만 운영 비용으로 무려 2만4500달러나 지출하고 말았다. 아무튼 이 수익금으로 또 하나의 기숙사 홀워시 홀(Holworthy Hall)이 건립되지만 수많은 종류의 복권이 남발돼 치열한 각축이 전개됐음을 증명하는 좋은 사례다.

애틀랜틱(The Atlantic)의 수석 편집자 사라 라스코(Sarah Laskow)는 17~18세기 미국의 복권은 공공 기관과 개인 기업가 모두가 열광한 유망한 사업이었고 복권이 없었다면 초기 미국은 존립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녀는 1720년 필라델피아의 한 신문에 실린 복권 광고가 당첨자에게 ‘3번가와 아치거리 모퉁이에 있는 새 벽돌집’을 약속했듯이 복권은 미국인 모두에게 새 땅과 새 집 그리고 새 출발의 약속과 같았다고 말한다.

영국의 아메리카 식민지 개척도, 그 식민지의 독립전쟁 자금도 복권으로 마련했다는 사실은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아메리카합중국은 복권이 탄생시킨 첫 국가이고 그 국가가 세계를 경영하고 있다. 감히 누가 복권을 비웃으랴.

최정봉 사회평론가, 전 NYU 영화이론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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