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보드 차트에 담긴 한류 견제의 기류 [김희경의 컬처 인사이트]
입력 2023-08-16 09:31:09
수정 2023-08-16 09:31:09
미국 빌보드 차트를 살펴보는 일은 이제 K팝 팬들에게 일상이 됐다. 방탄소년단(BTS)·블랙핑크·뉴진스·스트레이키즈 등 K팝 아티스트들이 잇달아 빌보드 차트에 오르고 있으니 말이다. 갓 데뷔하는 신인 아이돌 그룹들도 한국 1위가 아닌 ‘빌보드 1위 가수’가 되고 싶다는 꿈을 꿀 정도다.
그런데 K팝의 놀라운 성장세가 불편했던 것일까. 빌보드가 제동을 거는 모양새다. 빌보드는 7월 7일 돌연 차트 집계 방식을 바꿨다. 메인 싱글 차트 ‘핫 100’에서 아티스트 공식 홈페이지를 차트 집계 대상에서 제외한 것이다. 이를 두고 K팝을 겨냥한 조치란 분석이 나온다.
파죽지세로 나아가던 한류를 견제하는 묘한 기류가 곳곳에서 감지되고 있다. 지금까지는 미국·유럽 등 문화 산업의 중심지를 파고든 한류를 전 세계인들이 신기하게 바라봤다. K-컬처 열풍의 다양한 사례를 살펴보고 성공 비결을 분석하는 양상까지 나타났다. 하지만 슬슬 이를 불편해 하는 분위기가 감지되고 있다. 과연 이대로 한류는 괜찮은 것일까. 지속적인 성장을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할까.차트 집계 변화에 이런 의도가?!
‘빌보드가 차트 집계 하나 바꾼다고 달라지는 게 있나’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차트의 의미, 빌보드의 행적을 살펴보면 장기적으로 K팝에 미칠 큰 영향을 짐작할 수 있다.
이번에 집계 방식이 바뀐 빌보드의 핫 100 차트는 남다른 의미를 갖고 있다. 핫 200 차트가 전 세계 200개 국가의 성적을 집계한 것이라면 핫 100은 미국 내에서 대중적으로 큰 사랑을 얻은 작품들을 집계한 차트다. 빌보드에서 가장 중요시되는 차트이자 아티스트와 음악이 가진 인기의 척도인 셈이다.
핫 100의 기존 집계 방식은 음원과 뮤직 비디오 스트리밍, 라디오 방송, 실물 음반과 디지털 다운로드 판매량 합산으로 이뤄졌다. 그런데 빌보드는 연이어 다운로드 관련 규정을 바꿔 왔다. 지난해엔 특정 노래에 대한 다운로드를 1인당 4건에서 1건으로 축소했다. 그리고 올해엔 특정 아티스트의 홈페이지에서 음원을 다운받는 것조차 제외했다.
디지털 다운로드는 그동안 글로벌 K팝 팬들이 자주 애용하던 방식이다. 미국 현지 시장에서 K팝 가수의 뮤직비디오 스트리밍, 라디오에서의 노래 재생 횟수 등은 크게 떨어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팬들은 아티스트의 홈페이지를 찾아 다운로드함으로써 아티스트를 적극 응원해 왔다. 그런데 빌보드가 집계 방식을 바꾸면서 이런 노력은 더 이상 힘을 발휘할 수 없게 됐다.
K팝뿐만 아니라 콘텐츠 시장에서도 집계 방식에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넷플릭스는 지난 6월 ‘톱10’ 리스트 산정 방식을 바꿨다. 이전엔 하나의 콘텐츠를 일정 기간 동안 얼마나 많이 봤는지를 따지는 ‘작품별 총 시청 시간’을 기준으로 삼았다. 하지만 이를 변경, 통합 시청 시간을 작품의 러닝타임으로 나눠 계산하기 시작했다. 넷플릭스가 이같이 집계 방식을 바꾸자 넷플릭스를 포함해 다수의 글로벌 온라인 동영상 서비스(OTT) 작품 순위를 공개하는 사이트 ‘플릭스패트롤’도 변경된 방법을 적용했다.
문제는 이로 인해 넷플릭스와 TV에서 동시 방영된 한국 드라마는 불리한 처지에 놓인다는 점이다. TV에서 방영되는 한국 드라마는 기본적으로 OTT가 자체 제작한 드라마, 다른 나라의 드라마에 비해서도 분량이 많다. 대부분의 주요작들은 16회 차에 달한다. 회차가 많으면 러닝타임이 당연히 길다. 그리고 변경된 방식에 따르면 러닝타임이 길수록 순위가 밀려나게 된다.
이런 변화들 속에서 현재는 아쉬움과 안도하는 마음이 복잡하게 교차하고 있다. BTS 멤버 정국은 솔로곡 ‘세븐(Seven)’으로 발매 1주일 만에 핫 100 차트 1위를 차지했고 이후에도 3주 연속 상위권에 올랐다. 뉴진스 역시 ‘슈퍼 샤이(Super Shy)’, ‘ETA’, ‘쿨 위드 유(Cool With You)’로 빌보드 핫 100에 동시 진입했다. K팝 아티스트들이 집계 방식이 바뀐 악조건 속에서도 큰 사랑을 받고 있어 다행이지만 ‘이전 집계 방식이었다면 훨씬 더 좋았을 걸’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콘텐츠 부문에서도 마찬가지다. 총 16부작에 해당하는 JTBC 드라마 ‘킹더랜드’는 넷플릭스에서 7월 마지막 주(24~30일) 기준 비영어권 TV쇼 부문 3위에 올랐다. 이 또한 훌륭한 성적이지만 못내 아쉬움도 느껴진다. 통합 시청 시간으로 순위를 매겼던 기존 방식이 유지됐다면 이 작품은 같은 기간 1위를 차지했을 것이다.한류, 이제 ‘철옹성’ 증명할 때
물론 그동안 한류가 걸어온 길도 순탄치는 않았다. 1997년 드라마 ‘사랑이 뭐길래’가 중국에서 방영되며 처음 시작된 한류는 26년간 지속돼 왔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온갖 장벽에 부닥쳐 왔다.
가장 큰 변수는 지정학적·정치적 문제와 연결된 것이었다. 2016년부터 시작된 중국 정부의 한한령(限韓令 : 한류 제한령)이 대표적이다. 지금까지도 여파가 이어지고 있는 한한령은 중국 수출 의존도가 절대적으로 높았던 콘텐츠 시장에 직격탄을 날렸다. 일본의 혐한 분위기도 악영향을 미쳤다. ‘사랑의 불시착’ 등 다양한 콘텐츠가 일본 내에서 인기를 얻으며 다소 완화되긴 했지만 이런 분위기는 현재도 여전히 남아 있다.
저작권 문제는 갈수록 심화되고 있다. 올 상반기 중국에서 불법 유통된 한류 콘텐츠는 적발된 건수만 2만 건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는 20여 개의 중국 사이트에서 불법 유통됐다.
한류가 이전보다 더 광범위하게 나타나고 있는 만큼 리스크 역시 지역적·장르적 범위가 확장돼 나타나고 있다. 아시아 주변 국가에 한정됐던 한류에 대한 견제 분위기는 미국과 유럽 등으로 퍼지고 있다. 저작권 문제 역시 영상 콘텐츠에 국한되지 않고 웹툰·웹소설·캐릭터 등 다양한 장르에 걸쳐 나타나고 있다. 카카오엔터테인먼트의 글로벌 웹툰·웹소설 불법 유통 대응 전단팀 ‘피콕’이 지난해 11월부터 올해 5월까지 6개월간 차단한 불법 웹툰·웹소설만 1420만 건에 달했다.
이 같은 현상이 한류를 뒤흔드는 커다란 위기로 이어지지 않으려면 다양한 전략이 필요하다. 과거 한한령이 시작되자 위기를 수출 다변화 기회로 바꿨던 것을 떠올리면 된다. 그때까지만 해도 콘텐츠 수출은 사실상 중국 시장에 의존해 이뤄졌다. 하지만 한한령을 계기로 기업들은 미국·유럽·중남미 등 여러 지역으로 수출 활로를 뚫기 시작했다. 이 국가들에 무작정 완성작 자체를 팔기엔 문화적 간극이 큰 점을 감안해 새로운 전략도 마련했다. 완성작 대신 드라마나 예능의 콘셉트, 줄거리 등을 담은 포맷을 판매하는 방식을 취해 큰 효과를 냈다.
현재도 한류 견제 움직임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은 지속되고 있다. 아티스트와 작품을 유튜브와 같은 영상 플랫폼, 팬플랫폼 등을 통해 널리 알리고 새로운 수익 모델을 만들고 있다. 카카오엔터테인먼트의 피콕처럼 기업 차원에서 리스크를 줄이고 해결 방안을 찾는 경우도 늘어나고 있다.
이젠 한 발 더 나아가 과거 수출 다변화 전략과 같은 적극적인 패러다임의 전환이 필요하다. 기존의 대응 방식에 안주한다면 여러 돌발 변수에 대응하기 힘들어질 수밖에 없다. 동시에 정부의 제도적 지원, 기업 차원의 재정비도 수반돼야 한다.
‘한류 위기론’은 26년간 잊힐 만하면 꾸준히 고개를 들었다. 그만큼 장애물이 많았다는 얘기다. 하지만 지금까지 무너지지 않고 발전해 온 사실 자체가 한류가 결코 ‘모래성’이 아니라는 점을 증명한 것이다. 그리고 이젠 또 다른 사실을 증명할 시간이 다가왔다. 한류는 누구도 흔들 수 없는 견고하고 높은 ‘철옹성’이라는 것을….
김희경 한국예술종합학교 겸임교수, 영화평론가 pressia@daum.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