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겨진 교황 선출 기관, 방키(Banchi) [최정봉의 대박몽]
입력 2023-08-28 07:57:08
수정 2023-08-28 07:57:08
로또 이야기 8
2013년 3월 13일 전 세계에서 115명의 가톨릭 추기경들이 모였다. 콘클라베, 즉 교황 선출을 위한 추기경들의 비밀 회동을 위해서다. 다음날 현 교황 프란치스코가 탄생했다.
콘클라베(conclave)는 라틴어로 ‘열쇠와 함께(with a key)’라는 뜻이다. 외부와의 완벽한 단절 그리고 일체의 간여 배제를 상징한다. 교황 선출의 역사가 극심한 외부 개입으로 시달려 왔다는 것을 방증하기도 한다. 13~16세기는 외부 개입이 절정에 달한 시기다. 특히 16세기는 돈과 도박의 힘이 콘클라베를 뒤흔든 흑역사로 기록된다.
1513년 교황에 즉위한 레오 10세는 이렇게 말했다. “교황 선거에 대한 베팅은 과거부터 흔한 일이었다. 이를 주도하는 것은 방키(Banchi)의 은행들이고 그들이 고용한 센살리(sensali)들은 베팅 전표를 가지고 추기경 회의실 주변과 금융가를 바쁘게 누비고 다녔다. 이렇게 도박꾼들은 시시각각 변하는 배당률을 면밀히 파악할 수 있었다.”
레오 10세가 언급한 은행 지구는 방키라고 불린다. 이곳에 있는 은행들 상당수는 메디치가의 소유였다. 르네상스의 발상지 피렌체를 쥐락펴락했던 명문 메디치 가문. 레오 10세 자신도 메디치가 배출한 교황들 중 한 명이었다. 이쯤 되면 교황 선거-방키-메디치를 잇는 선들이 꽤 선명히 나타날 법하다.방키의 힘, 정보
방키는 각종 상인·브로커·공증인·투기자들이 집결된 곳이다. 서북쪽에 바티칸 성베드로 성당, 동남쪽에 출판업자들이 밀집된 파리오네(Parione)를 끼고 있었고 인근에 전당포와 고리대금업을 운영하는 유대인 밀집 지역 게토(Ghetto)가 자리했다. 산업·자금·정보·인력 인프라를 망라한 최상의 입지를 갖췄다. 교황 선거 투기 본부로서 말이다.
바움가르트너는 그의 저서 ‘교황 선거의 역사’에서 방키 지구의 절대적인 영향력은 최고급 정보에 기초한다고 주장한다. 그들의 말 한마디에 로마시 전체가 들썩이기도 했다는 거다. 외교 대사나 해외 스파이들도 방키의 베팅 현황과 정보를 가장 신뢰할 만한 첩보로 삼았다.
로마 주재 베네치아 대사 마테오 단돌로의 보고서는 이를 우회적으로 증명한다. 그는 본국 상원에 발송하는 긴급 통지문에서 “레지날드 폴레 추기경이 1550년 12월 5일 밤 투표에서 교황에 선출되기 직전까지 왔다”고 보고한다.
그가 첩보의 근거로 제시한 내용은 다소 어이없다. “방키의 베팅 80%가 이미 그의 선출 쪽으로 기울었고 또 바로 다음날 아침 투표에서 최종 결론이 날 것에 30%의 베팅이 있다”고 진술한 것이다. 도박판의 베팅 확률을 긴급 첩보의 근거로 삼다니 너무 엉성한 것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생긴다.
방키의 베팅 현황이 중요한 관측의 척도로 신뢰성을 누릴 수 있었던 이유는 간단하다. 바티칸 콘클라베(교황 선출 비밀 회의) 내에서 유출되는 확실하고 ‘따끈한’ 정보들 덕택이었다. 방키에는 수많은 정보들이 다양한 소스에서 유입됐지만 그중 극소수에게만 전달되는 특급 정보들이 있었다.
단돌로의 설명은 이렇다. “투기에 참여한 일부 상인들과 은행가들은 현재 진행되고 있는 투표의 상황을 꿰차고 있는 듯했다. 콘클라베에 배석 중인 추기경들의 수행 비서들과 모종의 파트너십을 맺고 있기 때문에 수십만 스쿠디(교황 영지 내 화폐)가 오가는 도박에도 자신감이 넘쳤다.”
단돌로는 추기경들의 수행 비서들을 언급했지만 그 비서들은 어떻게 특급 비밀 정보를 입수했을까. 일반 추기경들은 콘클라베 현장에 있더라도 투표마다 변하는 상위권 후보자와 득표 현황을 알 도리가 없다. 콘클라베는 기명식 투표였고 집표와 개표는 소수 감독관에게만 허용됐기 때문이다. 이 감독관 업무는 명망과 영향력 있는 시니어 추기경들에게 주어졌다. 그렇다면…?
몸통을 흔드는 꼬리
물론 방키에는 오보와 의도된 역정보도 넘쳐났다. 일부 브로커들이 대사나 스파이를 통해 그럴싸한 가짜 뉴스를 흘렸고 드라마틱한 정보에 따라 출렁이는 투심을 이용해 수익을 극대화한 경우들도 있다. 그 대표 사례가 1555년 선거였다.
콘클라베의 첫 투표 결과 의외의 후보가 등장했다. 나폴리 출신의 잔 피에트로 카라파(후에 교황 바오로 4세)가 선두권에 진입한 것이다. 그러자 돌연 그가 사망했다는 소문이 방키에 돌기 시작했다. 그가 아침 미사와 오후 회동에 불참했던 터라 추기경단들조차 이 소문을 믿었다고 한다. 그에게 몰렸던 베팅이 대거 이탈했고 이를 틈타 큰손들의 베팅이 빈자리를 독식했다.
트릭에도 불구하고 특정 추기경이 방키 전표에서 두각을 나타내면 일반 투기자들은 부화뇌동했다. ‘개미’들이 대거 움직여 베팅 확률이 기울기 시작하면 콘클라베의 해당 후보는 실질적인 모멘텀을 받았다. 그 소식이 다시 바티칸 선출 회의로 흘러 들어가 투표에 참가하는 추기경들의 심리에 영향을 줬기 때문이다.
1590년 선거 사례다. 볼로냐 출신 가브리엘 파레오티 추기경의 약진 소식이 방키에 떠돌았고 다음날 뉴스레터 속보는 “수요일 22시께 팔레오티 추기경이 교황이 될 것이라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고 다음날 오전 그의 선출에 70%의 베팅이 몰렸다. 곧 로마 시내 곳곳에 그의 휘장이 나붙었고 성베드로 성당의 사제들은 촛불을 켜는 등 즉위식 준비를 서둘렀다”고 보도했다.
전형적인 왝더독(wag the dog) 현상이다. 교황 선출 결과에 따라 투기의 희비가 갈리는 것이 아니라 투기꾼들의 베팅에 따라 교황 선출의 향배가 좌우되는 이런 본말 전도를 목도하면서 당시 작가 지오반니 베르투아는 “바티칸이 아니라 방키에서 진행되는 콘클라베가 교황을 결정한다”고 조롱했다.
다소 과장됐지만 방키 은행과 투전판의 영향력이 바티칸 콘클라베의 결정력에 버금간다는 당대의 모순을 적절히 포착한다. 바티칸과 방키, 완벽히 분리된 공간에 상이한 목적을 지닌 집단들이었지만 사실상 방키가 숨겨진 또 하나의 콘클라베였다는 것을 부정하기는 힘들다.
내부자 거래
참석자 3분의 2 이상의 득표가 요구되는 교황 선출 선거는 적게는 수차례, 많게는 수십 차례 투표를 치른다. 하루에도 아침저녁 두 번씩 진행됐다. 바티칸의 콘클라베에서 투표가 종료되면 방키의 브로커들은 새로 구성된 후보군과 각 후보들의 확률을 예측한 베팅 전표를 제시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이 대목에서 방키의 핵심 세력과 일부 추기경들의 직접적 결탁을 상정할 수밖에 없다. 단돌로의 1550년 기록에 따르면 “일부 추기경들은 간접적으로 투기에 동참했고 현찰과 함께 호박 묵주, 사향 장갑, 심지어 당나귀 등으로도 베팅을 대신했다”고 한다. 얼마나 확신에 찼으면 장거리 교통수단인 당나귀마저 걸었을까.
추기경 외에도 교황의 가족이나 교황청 직원들의 연루도 비일비재했다. 16세기 가장 엄격한 교황이었던 식스토 5세도 집안 단도리에 실패했다. 그의 누이 카멜라 페레티가 방키와 연루된 것이었다. 그녀 명의로 추기경 승진 도박에 5백 스쿠디를 베팅했다가 적발된 하인의 자백으로 모든 진상이 드러났다.
방키와 바티칸의 관계를 경제적 측면으로만 제한할 수는 없다. 콘클라베의 ‘천기누설’은 정략적 성격을 띠기도 했기 때문이다. 방키의 베팅 스프레드가 일종의 여론 조사 혹은 여론 조성 성격을 지녔기 때문에 이를 활용한 선거판 세싸움이 치열했다. 요즘으로 치면 조작도 왜곡도 용이한 정당 혹은 대통령 지지율 조사라고나 할까.
당시 추기경들 사이에는 학연·지연·혈연에 따른 수많은 파벌이 할거했다. 유럽 왕족들과의 원근친소, 종교 개혁에 대한 의견차라는 변수까지 겹치면서 대립은 정점에 달했다. 기존 파당의 경합과 새로운 합종연횡의 극점이었던 교황 선거는 방키로 유통되는 정보를 통해 정치적 포석과 계략을 도모했다. 이렇게 방키는 바티칸의 장외 공간이 됐고 방키의 베팅은 바티칸 투표의 변형이 되기도 했다.
방키 지구에서 검거된 스페인 출신 후안 아길라르의 소지품에서 도박 쿠폰과 함께 콘클라베에 참석 중이던 드 멘도자 추기경과 콜롱나 추기경이 스페인 왕궁으로 보낸 밀서가 발견됐다. 이 밀서에는 두 추기경이 어떻게 프랑스가 후원하는 추기경들을 견제할 것이고 어떻게 방키 내 여론을 조성할 것인지의 계획들이 담겨 있었다.
이렇듯 16세기 교황 선거는 신 이외에 다른 세력들과 밀월했다. 바티칸은 방키와 공조했고 투표는 투기와 병행됐다. 교회와 은행, 신성과 세속의 이분법은 공식적 이념에 불과했다. 교황청처럼 화려한 건축, 견고한 질서, 조직화된 인력을 갖추지는 않았지만 물욕의 무질서한 집합체였던 방키야말로 16세기 콘클라베의 실세이자 실체였을지도 모른다.
최정봉 문화평론가, 전 NYU 교수
2013년 3월 13일 전 세계에서 115명의 가톨릭 추기경들이 모였다. 콘클라베, 즉 교황 선출을 위한 추기경들의 비밀 회동을 위해서다. 다음날 현 교황 프란치스코가 탄생했다.
콘클라베(conclave)는 라틴어로 ‘열쇠와 함께(with a key)’라는 뜻이다. 외부와의 완벽한 단절 그리고 일체의 간여 배제를 상징한다. 교황 선출의 역사가 극심한 외부 개입으로 시달려 왔다는 것을 방증하기도 한다. 13~16세기는 외부 개입이 절정에 달한 시기다. 특히 16세기는 돈과 도박의 힘이 콘클라베를 뒤흔든 흑역사로 기록된다.
1513년 교황에 즉위한 레오 10세는 이렇게 말했다. “교황 선거에 대한 베팅은 과거부터 흔한 일이었다. 이를 주도하는 것은 방키(Banchi)의 은행들이고 그들이 고용한 센살리(sensali)들은 베팅 전표를 가지고 추기경 회의실 주변과 금융가를 바쁘게 누비고 다녔다. 이렇게 도박꾼들은 시시각각 변하는 배당률을 면밀히 파악할 수 있었다.”
레오 10세가 언급한 은행 지구는 방키라고 불린다. 이곳에 있는 은행들 상당수는 메디치가의 소유였다. 르네상스의 발상지 피렌체를 쥐락펴락했던 명문 메디치 가문. 레오 10세 자신도 메디치가 배출한 교황들 중 한 명이었다. 이쯤 되면 교황 선거-방키-메디치를 잇는 선들이 꽤 선명히 나타날 법하다.방키의 힘, 정보
방키는 각종 상인·브로커·공증인·투기자들이 집결된 곳이다. 서북쪽에 바티칸 성베드로 성당, 동남쪽에 출판업자들이 밀집된 파리오네(Parione)를 끼고 있었고 인근에 전당포와 고리대금업을 운영하는 유대인 밀집 지역 게토(Ghetto)가 자리했다. 산업·자금·정보·인력 인프라를 망라한 최상의 입지를 갖췄다. 교황 선거 투기 본부로서 말이다.
바움가르트너는 그의 저서 ‘교황 선거의 역사’에서 방키 지구의 절대적인 영향력은 최고급 정보에 기초한다고 주장한다. 그들의 말 한마디에 로마시 전체가 들썩이기도 했다는 거다. 외교 대사나 해외 스파이들도 방키의 베팅 현황과 정보를 가장 신뢰할 만한 첩보로 삼았다.
로마 주재 베네치아 대사 마테오 단돌로의 보고서는 이를 우회적으로 증명한다. 그는 본국 상원에 발송하는 긴급 통지문에서 “레지날드 폴레 추기경이 1550년 12월 5일 밤 투표에서 교황에 선출되기 직전까지 왔다”고 보고한다.
그가 첩보의 근거로 제시한 내용은 다소 어이없다. “방키의 베팅 80%가 이미 그의 선출 쪽으로 기울었고 또 바로 다음날 아침 투표에서 최종 결론이 날 것에 30%의 베팅이 있다”고 진술한 것이다. 도박판의 베팅 확률을 긴급 첩보의 근거로 삼다니 너무 엉성한 것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생긴다.
방키의 베팅 현황이 중요한 관측의 척도로 신뢰성을 누릴 수 있었던 이유는 간단하다. 바티칸 콘클라베(교황 선출 비밀 회의) 내에서 유출되는 확실하고 ‘따끈한’ 정보들 덕택이었다. 방키에는 수많은 정보들이 다양한 소스에서 유입됐지만 그중 극소수에게만 전달되는 특급 정보들이 있었다.
단돌로의 설명은 이렇다. “투기에 참여한 일부 상인들과 은행가들은 현재 진행되고 있는 투표의 상황을 꿰차고 있는 듯했다. 콘클라베에 배석 중인 추기경들의 수행 비서들과 모종의 파트너십을 맺고 있기 때문에 수십만 스쿠디(교황 영지 내 화폐)가 오가는 도박에도 자신감이 넘쳤다.”
단돌로는 추기경들의 수행 비서들을 언급했지만 그 비서들은 어떻게 특급 비밀 정보를 입수했을까. 일반 추기경들은 콘클라베 현장에 있더라도 투표마다 변하는 상위권 후보자와 득표 현황을 알 도리가 없다. 콘클라베는 기명식 투표였고 집표와 개표는 소수 감독관에게만 허용됐기 때문이다. 이 감독관 업무는 명망과 영향력 있는 시니어 추기경들에게 주어졌다. 그렇다면…?
몸통을 흔드는 꼬리
물론 방키에는 오보와 의도된 역정보도 넘쳐났다. 일부 브로커들이 대사나 스파이를 통해 그럴싸한 가짜 뉴스를 흘렸고 드라마틱한 정보에 따라 출렁이는 투심을 이용해 수익을 극대화한 경우들도 있다. 그 대표 사례가 1555년 선거였다.
콘클라베의 첫 투표 결과 의외의 후보가 등장했다. 나폴리 출신의 잔 피에트로 카라파(후에 교황 바오로 4세)가 선두권에 진입한 것이다. 그러자 돌연 그가 사망했다는 소문이 방키에 돌기 시작했다. 그가 아침 미사와 오후 회동에 불참했던 터라 추기경단들조차 이 소문을 믿었다고 한다. 그에게 몰렸던 베팅이 대거 이탈했고 이를 틈타 큰손들의 베팅이 빈자리를 독식했다.
트릭에도 불구하고 특정 추기경이 방키 전표에서 두각을 나타내면 일반 투기자들은 부화뇌동했다. ‘개미’들이 대거 움직여 베팅 확률이 기울기 시작하면 콘클라베의 해당 후보는 실질적인 모멘텀을 받았다. 그 소식이 다시 바티칸 선출 회의로 흘러 들어가 투표에 참가하는 추기경들의 심리에 영향을 줬기 때문이다.
1590년 선거 사례다. 볼로냐 출신 가브리엘 파레오티 추기경의 약진 소식이 방키에 떠돌았고 다음날 뉴스레터 속보는 “수요일 22시께 팔레오티 추기경이 교황이 될 것이라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고 다음날 오전 그의 선출에 70%의 베팅이 몰렸다. 곧 로마 시내 곳곳에 그의 휘장이 나붙었고 성베드로 성당의 사제들은 촛불을 켜는 등 즉위식 준비를 서둘렀다”고 보도했다.
전형적인 왝더독(wag the dog) 현상이다. 교황 선출 결과에 따라 투기의 희비가 갈리는 것이 아니라 투기꾼들의 베팅에 따라 교황 선출의 향배가 좌우되는 이런 본말 전도를 목도하면서 당시 작가 지오반니 베르투아는 “바티칸이 아니라 방키에서 진행되는 콘클라베가 교황을 결정한다”고 조롱했다.
다소 과장됐지만 방키 은행과 투전판의 영향력이 바티칸 콘클라베의 결정력에 버금간다는 당대의 모순을 적절히 포착한다. 바티칸과 방키, 완벽히 분리된 공간에 상이한 목적을 지닌 집단들이었지만 사실상 방키가 숨겨진 또 하나의 콘클라베였다는 것을 부정하기는 힘들다.
내부자 거래
참석자 3분의 2 이상의 득표가 요구되는 교황 선출 선거는 적게는 수차례, 많게는 수십 차례 투표를 치른다. 하루에도 아침저녁 두 번씩 진행됐다. 바티칸의 콘클라베에서 투표가 종료되면 방키의 브로커들은 새로 구성된 후보군과 각 후보들의 확률을 예측한 베팅 전표를 제시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이 대목에서 방키의 핵심 세력과 일부 추기경들의 직접적 결탁을 상정할 수밖에 없다. 단돌로의 1550년 기록에 따르면 “일부 추기경들은 간접적으로 투기에 동참했고 현찰과 함께 호박 묵주, 사향 장갑, 심지어 당나귀 등으로도 베팅을 대신했다”고 한다. 얼마나 확신에 찼으면 장거리 교통수단인 당나귀마저 걸었을까.
추기경 외에도 교황의 가족이나 교황청 직원들의 연루도 비일비재했다. 16세기 가장 엄격한 교황이었던 식스토 5세도 집안 단도리에 실패했다. 그의 누이 카멜라 페레티가 방키와 연루된 것이었다. 그녀 명의로 추기경 승진 도박에 5백 스쿠디를 베팅했다가 적발된 하인의 자백으로 모든 진상이 드러났다.
방키와 바티칸의 관계를 경제적 측면으로만 제한할 수는 없다. 콘클라베의 ‘천기누설’은 정략적 성격을 띠기도 했기 때문이다. 방키의 베팅 스프레드가 일종의 여론 조사 혹은 여론 조성 성격을 지녔기 때문에 이를 활용한 선거판 세싸움이 치열했다. 요즘으로 치면 조작도 왜곡도 용이한 정당 혹은 대통령 지지율 조사라고나 할까.
당시 추기경들 사이에는 학연·지연·혈연에 따른 수많은 파벌이 할거했다. 유럽 왕족들과의 원근친소, 종교 개혁에 대한 의견차라는 변수까지 겹치면서 대립은 정점에 달했다. 기존 파당의 경합과 새로운 합종연횡의 극점이었던 교황 선거는 방키로 유통되는 정보를 통해 정치적 포석과 계략을 도모했다. 이렇게 방키는 바티칸의 장외 공간이 됐고 방키의 베팅은 바티칸 투표의 변형이 되기도 했다.
방키 지구에서 검거된 스페인 출신 후안 아길라르의 소지품에서 도박 쿠폰과 함께 콘클라베에 참석 중이던 드 멘도자 추기경과 콜롱나 추기경이 스페인 왕궁으로 보낸 밀서가 발견됐다. 이 밀서에는 두 추기경이 어떻게 프랑스가 후원하는 추기경들을 견제할 것이고 어떻게 방키 내 여론을 조성할 것인지의 계획들이 담겨 있었다.
이렇듯 16세기 교황 선거는 신 이외에 다른 세력들과 밀월했다. 바티칸은 방키와 공조했고 투표는 투기와 병행됐다. 교회와 은행, 신성과 세속의 이분법은 공식적 이념에 불과했다. 교황청처럼 화려한 건축, 견고한 질서, 조직화된 인력을 갖추지는 않았지만 물욕의 무질서한 집합체였던 방키야말로 16세기 콘클라베의 실세이자 실체였을지도 모른다.
최정봉 문화평론가, 전 NYU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