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 위기설’이 현실화한 적은 없었다지만…[하영춘의 경제이슈 솎아보기]



1999년이었다. ‘11월 대란설’이 기승을 부렸다. 그해 7월 대우그룹이 해체되자 대우그룹 채권을 편입한 펀드에 대한 환매 요구가 봇물을 이뤘다. 대우채를 편입한 펀드는 110조원. 한꺼번에 환매된다면 자본 시장은 붕괴될 게 뻔했다.

정부가 나서 ‘8·12 환매 연기 조치’를 취했다. 환매를 90일 연기할 때마다 대우채 원금을 95%까지 보장해 주기로 했다. 문제는 80% 원금 보장이 이뤄지는 11월 10일이었다. 환매 요구가 한꺼번에 몰려 자본 시장이 무너질 수 있다는 게 11월 대란설의 골자였다. 결과는 아시는 바와 같다. 대란은 없었다.

얼마 전부터 ‘9월 위기설’이 불거졌다. 한국 외환 위기(1997년), 리먼브라더스 파산 사태(2008년), 유럽 재정 위기(2011년), 레고랜드 사태(2022년) 등이 모두 9월에 발생했다는 경험과 맞물려 위기설은 제법 그럴듯했다.

9월 위기설은 크게 세 가지를 근거로 한다. 우선 코로나19 사태 때 중소기업 등에 취했던 대출 만기 연장과 상환 유예 조치가 9월로 끝난다는 점, 은행들이 한꺼번에 대출금 회수에 나서면 연쇄 부도가 불가피할 것이란 우려다.

다른 하나는 경기 침체로 부동산 프로젝트 파이낸싱(PF) 대출이 위험 수위에 이르고 있다는 점이다. PF 연체율이 작년 말 1.19%에서 3월 말 2.01%로 높아진 데다 PF 대출 잔액도 131조원에 이르니 그럴 만도 했다. 여기에 중국 경제 위기도 불안감을 부채질하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위기설이 번지자 김주현 금융위원장과 최상목 대통령실 경제수석 등이 직접 나서 “9월 위기는 없다”고 단언했다. 대출 만기 연장(78조8000억원)은 2025년 9월까지 가능한데 이를 간과했다고 했다. PF 연체율도 6월 말 2.10%로 상승세가 주춤해졌고 대주단 협약을 통해 해결의 실마리를 풀었다는 설명이었다.

맞는 말이다. 설득력도 있다. 더욱이 위기설이 현실화하려면 전조가 있어야 한다. 외환 위기가 발발했던 1997년에는 연초부터 한보건설과 삼미그룹 등 대기업들이 줄줄이 쓰러졌다. 2008년 리먼브라더스가 파산하기 전 미국 경제는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 주택 담보 대출) 부실 사태로 홍역을 치렀다.

이런 전조는 아직 없다. 금융 시장과 자본 시장은 그런대로 안정돼 있다. 코스피지수와 원·달러 환율도 박스권에서 움직이고 있다. 경기가 기대만큼 회복세를 보이지 않지만 크게 나빠지지도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관론자들은 주택 담보 대출의 증가세와 연체율 상승세, 생산·소비·투자 등 산업 활동 지표의 트리플 약세, 수출 둔화 등을 내세워 위기설을 부추긴다.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중국 경제 위기, 미국 긴축 기조 유지와 이에 따른 중소형 은행권 불안이라는 변수도 들먹인다.

따지고 보면 금융 위기설은 툭하면 불거졌다. 하지만 위기설이 퍼진 뒤 위기는 거의 발생하지 않았다. 정작 진짜 위기는 위기를 넘겼다고 방심했을 때 엄습했다.

더욱이 디지털 시대엔 위기의 확산 속도가 확 빨라졌다. 미국에서 서브프라임 모기지 위기가 한창이던 2008년 5대 투자은행인 베어스턴스는 유동성 위기설이 나온 지 6일 후 문을 닫았다. 15년이 지난 올 3월 미국 실리콘밸리은행(SVB)은 유동성 위기설이 나돈 이후 단 하루 만에 파산했다. 스마트폰을 통한 뱅크런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9월 위기설이 아무리 근거 없다고 해도 위기설이 먹고사는 불안감부터 잠재울 수밖에 없다. 디지털 시대엔 특히 그렇다.

하영춘 한경비즈니스 편집인 hayou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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