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공채 문화의 역사 [김홍유의 산업의 窓]

게티이미지

최근 삼성은 관계사 20여 곳이 채용 공고를 내고 올해 하반기 신입 사원 공개 채용을 시작한다고 밝혔다. 공채의 계절이 시작된 것이다. 이때면 늘 그랬듯이 졸업을 앞둔 예비 사회인들의 인간 시장(?)이 형성되는 것이다. 코로나19 사태 이후 요즘같이 취업 시장이 경색된 환경에서 대학가는 다양한 공채를 준비하기에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다.

한국의 직업사는 산업 사회의 변화 과정과 직업인을 생성하는 속성과 제도가 내재돼 있다. 한국 최초의 임금 노동자가 등장한 시기는 일제강점기 때 부두 노동자인 것으로 알려졌다. 일제하의 직업사는 농업인과 수업인을 포함해 일제가 운영하던 일부 공업인이 직업 세계를 차지하던 주요 구성원들이었다. 1920년대 대학생의 취업 실태를 보면 세브란스의전·이화여전 졸업생은 대부분 취업했고 연희전문대·보성전문대는 약 65%만이 취업했다. 광복을 전후해 남북한 사회에서 최고의 인기 직업은 관공서 직원과 은행원, 교육인과 언론 종사자, 운송 관련 사업자, 일부 기업 샐러리맨 등을 꼽을 수 있다.

1950년대에 접어들면서 한국의 공채사는 다시 한 번 6·25전쟁으로 단절의 시대를 맞이하게 된다. 6·25 전란 동안 우리 공채사는 일자리 창출이 전무한 가운데 남한 내 44%의 산업 시설이 파괴돼 127만 명의 실업자를 배출했다. 기업이 없으니 채용이 없고 채용이 없으니 직장이 없는 악순환이 이어졌다. 6·25전쟁의 복구 사업이 어느 정도 진행되던 1957년 1월 삼성물산공사가 한국 기업 최초로 공채 시대를 개막하게 된다. 민간 기업 최초의 공채인 만큼 1200여 명이 지원한 가운데 최종 합격자 27명을 배출하는 사상 초유의 취업 경쟁률을 보였다.

1970년대 잇단 대기업의 출현은 개발 경제로 가기 위한 정부의 고단수 정책으로 해석할 수 있다. 필기 시험과 면접은 당시 사원을 채용하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이러한 채용 패턴은 1980년대 중반까지 그대로 이어져 왔다.

1980~1990년대는 대기업 공채가 그룹 단위로 이뤄졌다. 기업에 따라 일부 차이는 있었지만 대부분의 그룹사들이 상·하반기 정기 공채로 대규모 채용을 시도했다. 인턴 사원 제도가 한국 사회에 처음 모습을 보인 시기도 1980년대부터였다. 1984년 당시 럭키금성그룹(현 LG)이 한국 기업 최초로 이 제도를 도입한 이후 1990년대 인턴 사원 제는 기존 공채 시험과 함께 한국 채용 제도의 핵심 축으로 자리 잡았다.

1990년대 한국의 공채사는 대변혁을 맞이하는 전환기로 볼 수 있다. 그룹사들이 정기 공채와 함께 1994년 상시 채용 제도를 도입했고 삼성은 1995년 ‘열린 채용’을 선언했다. 블루라운드 출범과 국제화·개방화의 파고에 따라 전사적인 기업 경쟁력의 제고가 불가피했기 때문이다. 상시 채용 제도는 공채의 탄력성을 갖게 만들었고 열린 채용은 학력 철폐를 통한 우수 인재 확보에 박차를 가했다. 특히 1997년의 국제통화기금(IMF) 관리체제 사태는 한국의 취업 문화에 엄청난 변화를 가져 왔다. 대규모 정기 공채가 사라졌고 보통형 인재들은 취업 시장에서 경쟁력을 잃게 됐다.

IMF 사태로 대대적인 구조 조정을 거친 기업들이 새로운 사원 공채 제도로 신 채용 기법을 도입했다. 신 채용 기법은 소수·수시 채용과 특이형 인재 선호, 현장 채용 방식으로 압축된다. IMF 사태 이후 최근까지 한국의 공채 시스템은 신 채용 기법이 주도해 오고 있다. 2000년대 한국의 공채사는 핵심 역량을 지닌 인재 선발에 주력하고 있다. 2002년 삼성의 면접 대변화를 기점으로 대기업들의 면접이 심층 면접으로 돌아섰다. 또한 기업의 세계화, 인재의 국제화에 부응해 외국어와 인공지능(AI) 관련 능력에 인재 선발의 초점이 모아지고 있다.

2020년 이후 대기업들이 인재의 기초 지식, 직무 능력, 인성 분야를 종합 평가에 역점을 두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올가을의 충만한 햇살과 함께 취업 시장에서 풍성한 소식이 들려왔으면 한다.

김홍유 경희대 교수, 전 한국취업진로학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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