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권 추첨으로 하는 민주주의 [최정봉의 대박몽]

로또 이야기 12

믿거나 말거나 민주주의의 발원지 고대 아테네는 복권 추첨으로 지도자를 뽑았다. 무작위 추첨에 의한 선출이야말로 최고의 시민 정치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 방식이 로토(로터리)와 동일하다는 측면에서 이들의 민주주의를 로토크라시(lottocracy)라고 부르기도 한다.

더 놀라운 사실은 그들이 선거와 투표를 폐쇄적 정치 행위로 인식하고 경계했다는 점이다. 선거를 기득권 엘리트들의 소모적 축제로, 투표를 분파와 부패의 온상으로 규정했다. 선거는 민주주의의 꽃이요, 투표는 국민의 신성한 권리이자 의무라고 배운 우리 시대의 믿음에 찬물을 끼얹는다.

소크라테스의 제자 크세노폰(Xenophon)은 선거와 투표는 불필요한 자원과 시간 소모, 무의미한 경쟁 과열로 인한 파벌의 난립 그리고 무엇보다 힘과 권력을 쥔 기득권 세력들의 배타적 군림이라는 치명적 약점을 지녔다고 했다.

막대한 인력과 자금이 소모되는 우리의 선거를 되돌아보지 않을 수 없다. 소수 정당이 독점한 추천권, 거액의 공탁금, 선거 자금 기부자와의 결탁, 재임 중 특혜 시비, 퇴임 후 후사 보장과 비리의 판도라. 70년간 반복돼 온 이 패습의 버팀목은 시민들의 인내심인가, 민주주의에 대한 오해인가.
클레로테리온과 이소노미아

민주주의를 뜻하는 데모크라시는 데모스(Demos : 사람들)와 크라시아(Cratia : 통치)를 합성한 그리스어다. ‘시민 스스로’의 정치를 내세운 고대 아테네에서도 대표자 선출은 중차대한 일이었다. 단 그들의 선출 방식은 선거가 아닌 무작위 추첨이란 차이를 지닌다. 일부 치안판사를 비롯해 법원의 배심원, 오늘날 국회에 해당하는 500인 평의회 불레(Boule)도 로토 추첨으로 구성했다.

추첨 대표자가 시정을 끌었다면 왜 그들의 시스템을 ‘직접’ 민주주의라고 불렀을까. 그 의문은 투키디데스의 유명한 장례식 연설이 풀어준다. "우리가 지향하는 것은 소수가 아닌 다수에 의한 행정입니다. 이것이 바로 민주주의라고 불리는 이유입니다."

그가 말한 ‘다수’는 특정 자격을 갖춘 정치·행정 전문인이 아니라 모든 시민의 순환적 참여를 뜻했다. 이 순환적 참여를 구체화하기 위해 세 가지 원칙이 필요했다. 첫째는 절대적 기회 균등, 둘째는 공직자의 정기적 교체, 셋째는 연임·재임 금지다.

놀랍게도 공직자 선출은 클레로테리온(Kleroterion)이라는 일종의 슬롯머신(slot machine)이 담당했다. 요즘으로 치면 인공지능(AI) 추첨이라고나 할까. 시민들의 이름이 적힌 슬롯에서 특정 색의 돌이나 토큰이 무작위 추출되는 기구였다. 예컨대 흰색 토큰은 공직에 배정된 사람, 검은색은 선택되지 않은 사람을 나타냈다. 선택된 사람들은 또 다른 추첨을 통해 구체적 지위와 역할에 배정됐다.

활용한 ‘추첨식’ 민주주의의 배경에는 이소노미아(ἰsonomia), 즉 ‘정치 권리의 평등’이란 개념이 버티고 있다. 헤로도토스와 투키디데스가 주장하듯 ‘민’이 진정한 ‘주’가 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정치 참여 기회의 균등이 핵심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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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자유주의 경제학의 대부 프리드리히 하이에크도 그의 저서 ‘자유의 헌법’에서 이소노미아를 재소환했다. 근대의 만인 평등과 보편 인권을 이소노미아의 확장으로 해석한 그는 자유 경쟁 시장을 위해서라도 정치적 기회 균등이 선행 조건이라고 주장한다.

만인이 평등하고 동등한 권리를 지니고 있기에 누구나 대표자가 될 수 있는 것이고 피선거권의 보편적 기회를 현실화하기 위해서는 위계적이고 조직적인 선거 캠페인이 아닌 무작위 로토 추첨이 가장 공정한 방식이라는 결론이다.

기원전 5세기 아테네의 클레로테리온 /사진=위키피디아

솔티션
솔티션(Sortition)은 무작위 추첨 혹은 제비뽑기에 의한 의사 결정을 지칭하는 일반 명사다. 솔티션에 의한 대표자 선출은 간소한 절차로 균등한 정치 참여를 보장하고 일반 시민의 행정 능력을 고양하는 한편 공직자의 정기 교체로 부패 방지의 장점을 지녔다.

공정과 형평을 앞세운 아테네 민주주의에 안성맞춤이었지만 민주주의를 의심한 플라톤은 솔티션에도 적대적이었다. 지혜와 덕을 갖춘 철학자 왕의 통치를 주창한 그는 “가축 떼도 아닌 우리들이 제비뽑기로 지도자를 선출한다는 것은 터무니없는 일이다(‘국가’, 제8권)”며 일축한다.

한편 그의 제자 아리스토텔레스는 다양한 사회 계층이 정치 권력을 공유하는 혼합형 거버넌스를 지지했다. 선거는 힘있는 엘리트들의 과두정치를 유발하는 매개체라고 비판한 그는 선거와 투표가 민주주의를 보장하기보다 왜곡할 수 있다며 경계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권력 분산과 정치 주체 다양성의 해법으로 솔티션을 옹호했지만 그 한계 또한 분명히 지적한다. 특히 무능하고 무책임한 사람이 선출될 가능성이 상존하므로 전문 지식과 경험을 요하는 고위 직책은 소수 지도자들의 숙의에 기초한 투표 결정이 필요하다고 제안했다.

실제로 고대 아테네에서 군지휘관과 재무관리처럼 고도의 전문성을 요하는 10% 공직은 소수 지도자의 투표로 선출했다. 또 실용 정치 교육을 제공해 무능 공직자 예방을 도모했고 시민 평의회·배심원단 등 솔티션으로 선발된 공직의 약 90%는 실무 트레이닝을 거쳐야 했다.

솔티션의 전통은 고대 아테네에 국한되지 않는다. 중세와 근대 초입 세계 각지에서 실행되는데 특히 르네상스 이탈리아의 계승이 두드러졌다. 세습제를 폐지한 베네치아공화국은 통치권자 도지(Doge) 선발위원회를 최소 4단계에 걸친 추첨으로 구성해 13세기부터 18세기까지 운영했다.

같은 시기 제노아와 피렌체공화국도 최고 의사 결정 기구 ‘시뇨리아(Signoria)’ 9명 전원을 후보자 풀에서 추첨해 선발했다. 또 15세기에는 치안판사 역시 추첨으로 결정했는데 이는 메디치 같은 유력 가문의 정치 사유화를 억제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북유럽에서도 유사한 전통이 강세였다. 아이슬란드 연방은 930년부터 1262년까지 추첨을 통해 지도자를 선출했고 스위스의 슈비츠, 운터발덴 같은 칸톤 지방에서는 복권 추첨으로 최고 통치 기구 란츠게마인데를 구성했다. 특히 칸톤은 아직도 솔티션에 기초한 직접 민주주의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

북미 아메리카 원주민 이로쿼이연방도 16세기부터 현재까지도 제비뽑기를 통해 지도자를 선출하고 있다. 지도자는 신의 선택이고 공정한 선택 절차만이 현명한 통치를 보장한다는 믿음으로 지켜 온 제도다.

옛날 옛적 남들의 이야기만이 아니다. 오늘날 우리도 솔티션을 활용하고 있다. 2008년 한국에 도입된 국민참여재판이 그것이다. 납세자 명부에서 무작위 추첨을 통해 배심원을 선정하는 이 영미 제도는 2500년 전 고대 아테네 이소노미아 이념에 뿌리를 두고 있다.한국 선거를 반추하다
정치 사상가 한나 아렌트는 대의민주주의 속 시민들은 소외감과 냉소를 띤 관중으로 전락한다고 했다. 같은 맥락에서 조지프 슘페터는 현대 선거 민주주의가 시민의 역할을 주기적 투표로 축소시키면서 실질적 주권은 정치 및 관료 엘리트에게 이양된다고 주장했다.

슘페터의 ‘엘리트 이론’은 특정 학력·인물·직업군들의 반영구적 통치 이벤트로 고착된 한국 선거를 상기시킨다. 여야로 나뉜 대립은 연출된 스포츠 게임의 복제판이고 ‘짜고 치는’ 유사 적대성 뒤에는 ‘업자들’ 간의 더 끈끈한 연대와 유착이 지배하는….

번갈아 ‘골’을 넣는 승부차기에 몰입하는 정치 선수들, 수익성 높은 선거 이벤트에 긴박감을 버무려 엔터테인먼트 세일즈에 나서는 언론들, 광적 팬심을 시민적 소양으로 오인하는 유튜브 치어리더들, 짭짤한 수입에 단맛들인 생계형 데모꾼들, 이 모든 도식 행위가 진정한 민주주의의 징후라고 믿고 싶은 집단 자기 최면까지….

“그 X들끼리 다 해 처먹는다”고 욕지거리하면서도 여전히 정당 갈아 치우기 놀이에 기웃거리는 민심. “그X이 그X이다”는 해묵은 저주에도 불구하고 또다시 투표 심판론에 미혹되는 대의제 중독증…. 주권을 주기적 투표 권리로 등치하는 우리 시대의 민주주의는 안녕한 것일까, 과연 우리의 선거와 투표가 2500년 전 무작위 추첨보다 우월한 시스템이라고 합리적으로 장담할 수 있을까.

투표가 민주주의의 초석이라는 믿음은 우리 시대의 이념이다. 선거가 대표자나 공직자를 뽑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생각도 다분히 조작적이다. ‘싱크 아웃사이드 더 박스(Think outside the box)’라는 표현이 있다. 전형·관습·틀을 벗어나 생각해 보자는 뜻이다. 민주주의의 위기가 왕왕 거론되는 오늘, 투표함이라는 박스를 벗어나 생각해 볼 필요가 점증하고 있다.

1997년 선거관리직원들이 종로구 관철동 담벼락에 제15대 대통령 후보 벽보를 게시하고 있다./사진=한국경제


최정봉 사회평론가, 전 NYU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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