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와이, LA, 뉴욕…아메리칸 드림의 주요 도시 [왜 워싱턴인가⑤]

[왜 워싱턴인가 : K스트리트 달려가는 기업들]
⑤하와이, LA, 뉴욕...아메리칸 드림의 주요 도시

올해는 한인이 미국 땅을 처음 밟은 지 120년 되는 해다. 일제강점기 당시 102명의 한인들은 요코하마를 거쳐 1903년 하와이 호놀룰루에 정착했다. 이후 10년이 채 지나지 않아 2000여 명이 캘리포니아 로스앤젤레스(LA)를 중심으로 미국 전역에 진출하기 시작했다. 120년이 흐른 지금, 우리에게 중요한 미국의 도시는 어디일까. 첫 포문을 연 하와이, 삶의 터전이 돼 준 LA, 국제통화기금(IMF) 관리 체제 때 한국 경제를 뒤집어 놓은 뉴욕, 정보기술(IT)의 홍수와 함께 찾아온 새로운 물결 실리콘밸리…. 120년간 한국인의 삶과 한국 경제에 영향을 미친 미국의 주요 도시는 천천히, 하지만 거대한 흐름 속에 변화하고 있다.
낙원 아닌 치욕의 땅, 하와이1904년 한 소년이 미국 군함을 타고 조선을 떠난다. 격변하는 역사 속에서 그는 1917년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미국의 지원병으로 입대한다.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 속 유진초이(이병헌 분)의 실제 모델인 황기환 지사의 이야기다.

황 지사가 미국에 온 초기의 스토리는 알려져 있지 않다. 하지만 그가 도착한 1904년은 미국으로의 한국 이민이 시작된 지 딱 1년 후다.

미주 한인을 실은 이민선. 사진=국가기록원
101명의 한인을 실은 최초의 이민선은 1902년 12월 22일 인천을 출발해 1903년 1월 13일 호놀룰루에 도착했다. 이후 1905년 일본의 제지로 미국으로의 한인 이민이 중단되기까지 총 7226명의 한인들이 하와이에 도착했다. 이들 중 84%는 20대의 젊은 남자들이었고 9% 정도만이 여성들이었으며 7%는 어린이들이었다. 이들은 사탕수수 농장에서 노예와 다름없는 노동자의 삶을 살았다. 당시 하와이 노동자의 80%를 차지한 일본인들이 높은 임금과 처우 개선을 요구하면서 그 자리를 한국인이 대체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래서 초기 한인 이민자들은 빠른 시기에 큰돈을 벌어 자기 고향으로 금의환향하려는 임시 체류자의 성격이 짙었다.

이들은 미국 본토의 철도 건설 현장이나 과수원에서 일하면 하와이보다 높은 임금을 받을 수 있다는 소식에 1903년부터 1915년까지 총 1087명의 한인들이 본토로 이주했다.

초기 한인 이민에서 또 하나의 중요한 부류는 일본의 지배를 벗어나 해외에서 독립운동을 하려고 미국으로 건너간 정치 망명자들이다. 1910년부터 1924년까지 541명 정도의 학생들이 미국 대학에서 공부한다는 명목으로 미국으로 이주했다. 이들은 하와이와 미국 본토의 한인 사회의 정치적 지도자로 부상했고 해외 독립운동을 주도했다. 한인 이민 사회는 1945년 조선이 독립을 쟁취하기까지 하와이에는 6500명 그리고 미국 본토 특히 캘리포니아에 약 3000명이 미국 주류 사회와 고립된 상태로 존재했다.

<사진->미주이민 100주년 특집-뉴욕의 코리아 타운 한인상가가 밀집해있는 미국 뉴욕의 코리아타운.//민족뉴스취재본부 기사참조/사회/ 2002.12.27 (서울=연합뉴스) <저작권자 ⓒ 2002 연 합 뉴 스.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아메리칸 드림의 공간, LA“나성에 가면 편지를 띄우세요
꽃모자를 쓰고 사진을 찍어보내요
나성에 가면 소식을 전해줘요
예쁜 차를 타고 행복을 찾아요”

1978년 발표된 보사노바 스타일의 노래 ‘나성에 가면’은 당시 미국으로의 한인 이민이 정점을 이룬 시기에 연인의 이별을 그린 곡이다. 원곡은 ‘LA에 가면’이었지만 당시 규정상 영어를 쓸 수 없어 미국 LA를 음차해 나성으로 표현했다.

노래는 공전의 히트를 쳤다. 첫 소절을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였다. 1965년 미국의 이민법 개정 이후 미국으로 한인 이민이 급증하면서 사회 이슈가 될 때였다.

노래의 주인공은 고학력 이민자들이었다. 1965년 이민법의 특징이 국적에 상관없이 미국에 필요한 전문직과 숙련 기술직 이민을 받겠다는 것이었기 때문에 한국에서는 유학생, 객원 간호사, 의사의 신분으로 미국에 건너간 이들이 주를 이뤘다.

이들은 1960년대 말 1970년대 초 한인 이민을 주도했다. 1987년엔 한인 이민이 3만5849명으로 정점을 이뤘다. 당시 멕시코와 필리핀 다음으로 미국에 이민을 많이 간 3대 이민국이 한국이었을 정도다.

당시 한인 이민자들은 신분 상승의 기회를 좇아 미국 이민을 택했다. 영어를 가사에 쓸 수는 없었지만 미군 주둔에 의해 ‘미국 판타지’, ‘미국병’이 퍼지기 시작할 때였다. 급여도 상상 초월이었다. 1979년과 1982년 사이 미국 노동자의 시간당 평균 임금은 11.79달러에 달했지만 한국 노동자는 1.22달러에 불과했을 때다.

미국 캘리포니아 주 남부에 있는 대도시 LA는 ‘아메리칸 드림’을 상징하는 공간이었다. ‘나성에 가면’이란 곡에서 나타나듯이 나성, 즉 LA는 ‘꽃모자’를 쓴 사람들이 ‘예쁜 차를 타고 행복을 찾아’ 다니는 낙원으로 인식됐다. 20세기 초반부터 일부 한인이 이곳에 정착했을 뿐만 아니라 지역 경제 성장도 꾸준히 진행된 곳이다.

하지만 드림은 쉽지 않았다. 기대와 달리 한인 이민자들은 언어 장벽과 문화적 차이, 인종 차별 등으로 인해 미국 사회와 주류 노동 시장에서 다양한 차별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기대에 걸맞은 일자리를 찾는 데 실패한 한인들은 외곽으로 밀려나기 시작했다. LA 다운타운에서 서쪽으로 약 5km 떨어져 있는 코리아타운과 다운타운 바로 아래에 자리한 흑인 밀집 지역 사우스센트럴 로스앤젤레스에서 자영업을 운영하기 시작했다. 청과물·음료·주류를 판매하는 그로서리와 리거 스토, 세탁소 등….

<사진->미주이민 100주년 특집-뉴욕의 코리아 타운 한인상가가 밀집해있는 미국 뉴욕의 코리아타운.//민족뉴스취재본부 기사참조/사회/ 2002.12.27 (서울=연합뉴스) <저작권자 ⓒ 2002 연 합 뉴 스.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1970년대 중반 한인들의 자영업체들이 늘어나면서 코리아타운 상업 지구는 크게 확장됐고 LA 한인들의 인구도 빠르게 증가했다. 지금의 코리아타운 상업 지구는 LA를 동서로 관통하는 윌셔 블러버드를 중심으로 형성돼 있지만 1970년대와 198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남쪽에 있는 올림픽 블러버드와 피코 블러버드였다. 이 도로들을 따라 수백 개의 한인 자영업체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다. 1986년 500명의 한인들을 상대로 조사한 미국의 원로 사회학자 민병갑 뉴욕 퀸즈칼리지 석좌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응답자의 48%가 자영업을 한다고 답했을 정도다.

이전까지 백인 중심의 도시였던 LA도 극적인 변화를 마주해야만 했다. 타임지는 1983년 “LA가 아시아와 라틴아메리카 출신의 이국적인 다중에 의해 침략당하면서 ‘에스닉 폭발’을 겪고 있다”고 선언했다. 1992년엔 인종 차별에 격분한 흑인 사회가 한국인들이 밀집한 LA 코리아타운을 공격하는 역사상 최대 규모의 무장 폭동이 발생하며 미국 사회에 큰 파장을 불러왔다. 이 사태로 코리아타운의 90%가 파괴됐다. 한국인에겐 투표에 참여해 메인 스트림에 목소리를 전달해야 한다는 각성의 시간이기도 했다.

이후 LA의 시간은 한동안 계속됐다. 한국에선 LA 한인타운을 무대로 현지 교포들의 삶을 그린 코믹 시트콤 ‘LA 아리랑’이 1995년부터 2000년까지 5년에 걸쳐 방영됐다. 이 시트콤은 ‘아메리칸 드림’을 성취하려고 LA로 이민을 간 한국 교포 김 변호사의 가족 이야기를 신랄하게 풀어내며 큰 인기를 누렸다. 미국 생활에 정착하지 못하는 한인, 교육 문제에 엄격한 한인, 인종 간·국가 간 갈등을 다루며 아메리칸 드림의 이면을 보여주는 데 성공하는 등 방영 내내 많은 인기를 끌었지만 국제통화기금(IMF) 관리체제 이후 막을 내렸다. 미국 판타지 ‘나성’의 시간이 막을 내리는 시기이기도 했다.

<사진->미주이민 100주년 특집-뉴욕의 코리아 타운 한인상가가 밀집해있는 미국 뉴욕의 코리아타운.//민족뉴스취재본부 기사참조/사회/ 2002.12.27 (서울=연합뉴스) <저작권자 ⓒ 2002 연 합 뉴 스.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한국 경제를 삼킨 공간, 뉴욕1997년 10월 28일 뉴욕 월스트리트에서 심상치 않은 움직임이 포착된다. 뉴욕시에 본사를 둔 세계에서 가장 큰 투자은행인 모간스탠리가 ‘아시아를 떠나라’는 제하의 보고서를 펴낸 것. 경제 호황기라던 1997년 미국 은행의 위기 진단은 한국 경제에 결정타를 날렸다. 그해 6월 800선을 넘보던 코스피지수는 500선을 내줘야 했다. 이튿날 정부가 ‘금융 시장 안정 대책’을 내놓았지만 시장의 흐름을 돌리지는 못했다.

1997년 11월 16일 미셸 캉드시 당시 IMF 총재가 극비리에 한국을 방문했다. 그리고 5일 후인 11월 21일 한국 정부는 외화 차입 완전 불가능을 선언하며 IMF에 구제 금융을 공식 요청했다. IMF는 김대중·이회창·이인제 등 당시 유력 대선 후보들에게도 ‘자금 지원 협정 준수 이행 각서’에 서명하도록 요구했다. 이튿날 신문들은 거의 모든 지면을 할애해 ‘경술년 국권 피탈 이후의 최악의 국치일’로 규정하고 비통한 심정을 전했다. 세계 경제를 지배하는 미국, 그 중심의 뉴욕이 한국 경제의 명줄을 쥐게 된 일대 사건이다.

1997년 11월24일 IMF 협상단이 한국 정부와 긴급자금 지원문제를 논의하고 있다. ♣♣한경DB

IMF에 구제금융 요청을 발표하는 임창렬 경제부총리(1997년 11월 22일자 신문)


경술년 이후 최악의 국치 상황에 한국인들은 절치부심했다. 경제 전문가들 사이에선 한국이 전례 없는 경제 위기를 맞게 된 원인 중 하나가 국제 금융 시스템과 뉴욕의 월스트리트(월가)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했기 때문이란 분석이 나왔다.

미국 뉴욕시 맨해튼 남부에 있는 금융가를 뜻하는 월스트리트는 미국의 뉴욕증권거래소, 나스닥과 거대 금융사, 투자은행 등의 대형 금융회사와 기업이 몰려 있는 미국 금융 시장의 중심이자 세계 금융 시장의 메카다.

1990년대 말, 당시 금융 시장은 급속한 정보 혁명에 따른 자본의 이동으로 세계 경제에 미치는 파급력이 커지는 시기였다. 1997년 세계 주요 금융 시장의 하루 거래량은 1조3000억 달러로, 이 중 미국의 거대 금융 자본이 70%를 차지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됐다. 특히 뉴욕은 세계 금융 시장의 메카다. 뉴욕 증권거래소(NYSE)의 시가 총액 규모는 1996년 말 11조2000억 달러로 일본과 영국의 시가 총액을 5배 가까이 넘어섰다. 당시 세계 제2의 경제 대국인 일본의 도쿄와 런던의 주식 시장이 미국의 채권 시장 규모에 지나지 않았던 셈이다.

월가는 유례없는 호황을 누릴 때였다. 시장에선 절대 우위의 시장 규모와 성장을 바탕으로 뉴욕 월가가 21세기 세계 금융 질서를 지배할 것이란 전망이 나왔다. 한국에선 세계 최대의 금융 자본을 움직이는 월스트리트를 이해하기 위한 움직임이 시작됐다. 미디어에선 국제적 감각을 키우자며 월가 리포트를 내는 등 늦은 스터디가 진행될 때였다.

뉴욕의 시간은 오래 그리고 지속적으로 한국 경제에 침투했다. “미국이 기침하면 한국은 독감에 걸린다”는 오랜 증시 격언도 이즈음 나왔다. 미국을 배우자는 움직임 아래 유학생도 급증했다. 정부 기관과 기업들도 뉴욕에서 한국 경제 설명회를 열거나 채용 박람회를 개최했다. 뉴욕 거주민을 뜻하는 ‘뉴요커’를 열망하는 이들로 제2의 아메리칸 드림을 꿈꿀 때였다.

뉴욕에 대한 선망은 2008년 금융 위기에 한풀 꺾였다. 당시 미국의 3대 투자은행 중 하나인 리먼브라더스가 파산 신청을 하고 또 다른 투자은행인 메릴린치가 매각되면서 세계 경제를 집어삼킨 2008년 금융 위기가 터졌다. 한국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때 진원지도 역시나 뉴욕 월가였다. 대공황을 겪지 못한 세대에게 미국의 위기는 예측할 수 없는 충격이었다. 김경수 전 한국은행 금융경제연구원장은 당시 인터뷰에서 “지난 40년간 개도국과 선진국을 막론하고 120회 정도의 외환·금융 위기가 있었다. 하지만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 주택 담보 대출) 부실 사태는 인류 역사상 가장 글로벌화된 세계에서, 주변부가 아니라 중심 국가인 미국에서 일어났다는 사실이 우리에게 큰 충격을 준 사건”이라고 말했다.21세기 기회의 땅, 실리콘밸리
2005년 당시 미국 벤처기업들이 몰려있는 실리콘밸리(Silicon Valley) 전경. 미 캘리포니아주 샌프란시스코반도 초입에 위치한 샌타클래라 일대의 첨단기술 연구단지. 사진=한국경제 DB


‘기회의 땅’은 뉴욕만이 아니었다. 뉴욕이 금융 경제의 산실이라면 한국의 벤처·과학업계에는 실리콘밸리가 있었다. ‘닷컴(IT)’ 열풍이 진행될 1990년대 말 한국에서는 유망 한국 벤처기업들이 세계 벤처 산업의 모태로 불리는 실리콘밸리에 잇달아 진출했다. 세계적 기술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벤처기업에 인색한 자금 지원과 새 상품에 대한 시장의 미성숙 등으로 아이디어 단계에서 사장되는 한국 시장의 한계에 한국 신생 기업들의 실리콘밸리 진입이 열풍처럼 번졌다.

미국 캘리포니아 주 샌프란시스코만 지역 남부에 자리한 실리콘밸리는 첨단 기술의 상징이자 기술 혁신의 성지다.

과거 실리콘밸리는 과수원과 채소밭이 많았던 지역이었지만 1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 정부의 방위 산업 투자 증가로 대규모 연구·개발(R&D) 시설이 들어서는 1930년부터 미국 전자 산업의 중심으로 부상했다. 이곳에 스탠퍼드대의 기술 산업 단지가 조성되면서부터 첨단 산업이 밀집했다. 반도체 산업 발전의 시작도 실리콘밸리다. 애플·구글·인텔·페이스북(현 메타)·엔비디아·오라클·세일즈포스 등 첨단 산업 기술이 밀집한 곳으로, 전 세계 고급인력이 이곳 실리콘밸리에 몰려들었다. 한국에서는 기업들의 진출과 함께 한국판 실리콘밸리를 만들어야 한다는 움직임이 커졌다. IT 기업이 밀집한 ‘판교 테크노밸리’의 탄생 배경이다.

공간뿐만 아니라 실리콘밸리 DNA를 한국 사회에 심어야 한다는 주장도 나왔다. 창업 활동이 세계에서 가장 활발한 곳이자 실패를 재기의 뿌리로 인식하는 문화, 능력 중심의 개방적 사회가 전 세계 우수 인재를 끌어당기는 유인이라며 실리콘밸리의 혁신 DNA에 대한 공부가 오랜 시간 한국에서 진행됐다. 지금도, 현재 진행형이다.

<사진->미주이민 100주년 특집-뉴욕의 코리아 타운 한인상가가 밀집해있는 미국 뉴욕의 코리아타운.//민족뉴스취재본부 기사참조/사회/ 2002.12.27 (서울=연합뉴스) <저작권자 ⓒ 2002 연 합 뉴 스.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올해는 한인이 미국 땅을 처음 밟은 지 120년 되는 해다. 120년간 눈물의 하와이에서 치욕 그리고 경탄의 뉴욕, 경외심을 가져다준 실리콘밸리까지…. 세계 주요 도시, 그중에서도 미국의 주요 도시는 한국의 정치·경제·사회·문화에 상당한 파급력을 가져왔다. 이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다음 도시는 워싱턴이다.

정채희 기자 poof34@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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