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어로 노믹스’ 임영웅, 신중년 여성을 소비 전선으로 끌어내다 [21세기 경영학의 키워드 ‘팬덤’]

[21세기 경영학의 키워드 ‘팬덤’]

가수 임영웅. 사진=물고기뮤직

2020년 쌍용차(현 KG모빌리티)는 벼랑 끝 위기에 몰려 있었다. 11분기 연속 적자가 지속되며 자본 잠식에 빠졌고 부채 비율도 심각했다. 위기의 쌍용차가 선택한 것은 때아닌 TV 예능 프로그램 ‘내일은 미스터트롯’이었다. 쇼 프로그램 우승자에게 상금 1억원과 쌍용차 모델인 ‘G4 렉스턴’을 제공하기로 했다.

3월 14일 새벽, 가수 임영웅이 ‘미스터트롯’의 우승자가 되면서 쌍용차와 임영웅의 인연은 시작됐다. “우리 영웅님 믿고 렉스턴 선택했어요. 차 애칭은 ‘히어로(HERO)’입니다.” 임영웅 팬들의 사랑은 고가의 차량 구매로까지 이어졌다. 하나둘이 아니었다. 쌍용차에 따르면 임영웅이 모델이 된 지 두 달 만에 렉스턴 모델의 판매량이 전달에 비해 53% 정도 늘었다. G4 렉스턴은 화이트 에디션 1호 모델인 임영웅 효과였다.

돌풍이었다. 쌍용차는 임영웅의 신곡 쇼케이스와 함께 신차 모델인 ‘올 뉴 렉스턴’ 출시 이벤트를 진행했다. 쇼케이스 참석 티케팅은 1분 만에 매진되며 대박을 예고했다. 사전 계약에서만 3800여 대 계약을 마쳤다. 당시 내수 판매는 전년 동월보다 23.1%나 증가했다. 쌍용차는 기사회생의 전기를 마련했다.

2020년 쌍용차(현 KG모빌리티)의 브랜드 '렉스턴' 모델로 활약한 가수 임영웅. 사진=KG모빌리티
‘떴다 하면 완판’ 임영웅 효과임영웅 공식 팬 카페인 영웅시대의 회원 수는 19만5170명이다, 회원들의 연령대는 5060대의 비율이 가장 높은 것으로 알려졌다. 팬덤의 주축이 일반적으로 1020, 2030세대지만 영웅시대는 다르다.

이들은 임영웅의 노래를 음악 차트 1위에 올리기 위해 ‘스트리밍’하는 법부터 배워야 하는 초보 덕후였지만 끝은 창대했다. 앨범이 나왔다 하면 100만 장 돌파는 예사다. 팬 사인회 없이 이 정도의 앨범을 파는 가수는 아이돌 그룹에서도 전무후무하다. 콘서트 소식이 들렸다 하면 전 국민적 관심을 받는다. 부모님의 티켓을 대리 구매하기 위한 자녀들의 ‘효도 전쟁’으로 1020대부터 주 팬층인 5060대까지 티켓 전쟁에 나서기 때문이다. 오죽하면 “‘호남평야’에서 콘서트를 열어 달라”는 하소연이 나올 정도다. 한국에서는 톱 아이돌을 넘어 원 톱 가수로 평가받는다. 트로트 가수의 성공 신화다.

2019년 ‘미스터트롯’의 전작인 ‘미스트롯’을 방영할 때만 해도 우려의 시선이 짙었다. 방송가에서 홀대 받던 트로트를 전면에 내세웠다는 이유에서다. 하지만 ‘미스트롯’은 장르의 희소성과 참가자들의 상향 평준화된 실력을 내세워 대박을 쳤다. 트로트 가수 송가인이 그해의 인물이 됐고 이듬해 임영웅이 탄생했다.

새로운 팬덤도 탄생했다. 고령의 팬덤이다. 송가인에 이어 임영웅까지 트로트를 매개로 중·장년층이 팬덤 시장의 큰손으로 떠올랐다. 이들은 단순히 무대를 보거나 노래를 듣는 수동적인 역할이 아니라 트로트를 찾아 직접 소비하고 무대와 영상을 즐기는 주체로 거듭나면서 트로트의 부흥을 이끌었다. 2020년 신한카드가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연령대별 음악·영상 스트리밍 서비스 이용 증가율은 20~40대가 71%인 데 비해 5060세대는 101%로 크게 늘었다. 트로트 열풍의 결과다. 이들은 다른 세대에 비해 경제력이 탄탄하다는 특징을 갖고 있다.



학계의 분석도 이어졌다. 송가인을 주축으로 한 ‘미스트롯’이 2019년을 휩쓴 뒤였다. 김난도 서울대 교수는 2020 트렌드 중 하나로 5060세대인 ‘오팔(OPAL)세대’를 지목했다. 오팔세대는 ‘올드 피플 위드 액티브 라이프(Old People with Active Life)’의 영문 앞글자를 딴 조어로, 새로운 소비층으로 부각되고 있는 5060세대를 일컫는다. 베이비부머 세대인 1958년생을 뜻하기도 한다. 오팔세대는 스스로를 과거의 5060대 중년으로 인식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이전 세대와 차별됐다. 경제력과 여유로움을 가진 이들은 모바일로 최신 트렌드를 접하고 소비 시장에서 큰 영향력을 발휘하는 것도 이들의 특징이다.

영웅시대의 팬덤은 오팔세대의 특징을 그대로 닮았다. 임영웅의 팬 카페인 영웅시대는 주된 일자리에서 떠난 오팔세대들의 대안적 공동체로서 역할을 했다. 이들에게 소속감을 부여하고 팬덤 안에서 소통함으로써 정체성을 확립했다. 이들은 팬 카페 안에서 임영웅으로 하나가 되면서도 그 안에서 부모로서, 은퇴자로서, 중·장년 이후의 삶에 대해 이야기했다. ‘38년 근무하고 이제 막 은퇴했어요’, ‘첫 손자가 태어났네요’, ‘건강검진했는데 많이 울었어요’….

오팔세대는 1020세대 팬들과 달리 경제적·시간적 여유도 갖고 있다. 이들은 유통업계와 광고주에게 적극적으로 ‘내 가수를 써 달라’고 어필했다. 또한 산업계가 이들 계층의 소비 행태 변화에 주목하도록 적극적으로 구매했다.

강력한 팬덤을 기반으로 한 ‘광고계 블루칩’ 임영웅의 등장은 산업계를 집어삼켰다. 자동차는 물론 치킨·피자·샴푸·남성복·의약품·정수기·임플란트 등 분야를 막론하고 임영웅이 떴다 하면 ‘완판’ 대박 행렬이 이어졌다. “피자 안 좋아하는데 청년피자를 먹고 박스 사진을 깨끗하게 잘라 거실 창가에 걸어두었다”는 70대 어르신의 이야기부터 “임영웅 광고 그만 했으면 좋겠다. 엄마가 ‘티바두마리’, ‘청년피자’만 먹는다”는 20대 자녀의 이야기가 임영웅의 광고 효과를 입증하듯이 쏟아져 나왔다.

실제 인지도가 낮았던 브랜드 ‘청년피자’는 임영웅을 모델로 발탁한 뒤 가맹 계약 300건을 돌파했고 청호나이스에서 임영웅 커피머신으로 불린 ‘에스프레카페’는 판매량이 전년 대비 3배가 늘었다. 세정 웰메이드 광고에서 입은 셔츠 또한 판매량이 510% 증가하며 임영웅 효과를 입증했다. ‘걸어다니는 중소기업’이란 별칭도 생겼다.

그의 경제 효과는 탁월했다. 방탄소년단(BTS)과 경제를 합친 ‘BTS노믹스’처럼 임영웅 팬덤도 한국 산업계에 상당한 경제 효과를 가져다줬다. ‘히어로(HERO)노믹스’라고 불려도 손색이 없다는 게 업계의 평가다.
오팔세대의 소비 주체 부상 팬덤의 파급력에서 문화 활동의 수동적 소비자였던 오팔세대가 적극적인 구매자로 바뀐 것은 양적·질적 측면 모두에서 의미 있는 변화였다.

전문가들은 앞으로도 “여가·문화를 비롯한 소비 시장 전반에 오팔세대가 미치는 영향력이 커질 것”이라고 예측한다. 이들은 이전 세대와 달리 1970~2000년대 고도 성장기에 청·장년기를 보낸 세대로, 사회적 제도와 인프라 혜택을 누리면서 산업화의 주역으로 활약했다. 해당 기간 국내총생산(GDP) 연평균 성장률이 10%에 달할 정도로 경제 성장의 결실을 경험한 집단으로, 대부분 금융과 부동산으로 자산을 형성했고 2010년을 기점으로 은퇴를 시작했다. 또한 해외 대중문화가 유입되고 한국 영화와 대중음악이 전성기를 맞았던 1960~1970년대에 유년기·청년기를 보내며 다양한 문화 콘텐츠를 경험한 세대다.

하나금융경영연구소는 앞서 오팔세대를 분석한 자료에서 “이전 세대와 다른 사회·문화적 성장 배경에서 비롯된 노년기 삶의 대한 태도, 타 연령대 대비 많은 자산 규모에 비춰 볼 때 앞으로도 문화를 포함한 소비 시장에서 오팔세대의 잠재력은 무궁무진할 것”이라고 분석했다. 신(新)중년들의 ‘임영웅 신드롬’이 ‘히어로노믹스’를 창출한 배경이기도 하다.

한경비즈니스 <히어로노믹스 : 21세기 경영학의 키워드 ‘팬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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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채희 기자 poof34@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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