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조원대 BTS 팬덤 경제, 왜 지금 팬덤을 주목하나 [21세기 경영학의 키워드 ‘팬덤’]
입력 2023-09-25 06:48:38
수정 2023-09-25 14:20:33
[21세기 경영학의 키워드 ‘팬덤’]
가수 임영웅의 전국 투어 콘서트 ‘아임 히어로(IM HERO)’의 서울 공연 6회 차 티켓은 9월 14일 판매를 시작한 지 1분 만에 최대 트래픽인 약 370만을 기록하며 전석 매진됐다. 그야말로 ‘없어서’ 못 판다. 이날 티케팅에는 5060대 주력 팬부터 그들의 자녀인 1020대까지 참전했다. 티켓을 못 산 이들은 “‘호남평야’에서 콘서트를 열어 달라”고 하소연할 정도다. 암표 시장에서는 16만원짜리 티켓 2장이 180만원까지 치솟았다. ‘히어로노믹스’의 등장임영웅 파워는 음악계를 넘어 산업계를 강타한다. 아티스트의 오리지널 지식재산권(IP)인 앨범·콘서트 외에도 자체적으로 판매하는 굿즈·출판물·예능 출연·광고 등으로 돈을 번다. 업계에 따르면 2022년 상반기에만 임영웅은 약 375억원의 매출을 올렸다. 3번의 콘서트로 92억원, 편당 4억원의 개런티로 추정되는 5개 광고로 20억원, 솔로 가수 최초 초동 밀리언셀러를 기록한 앨범으로 262억원의 매출을 기록했다는 것이다. ‘걸어다니는 기업’ 소리를 듣는 이유다.
임영웅의 경제 효과는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5060대 오팔세대로 일컬어지는 신중년 팬덤의 소비를 이끌어 낸다. 2020년 쌍용차(현 KG모빌리티)가 임영웅을 모델로 내세워 단일 모델의 판매량이 53%나 증가한 사례는 유명하다. 임영웅의 팬들은 기꺼이 임영웅 1호 딱지가 붙은 차량을 구매했다. 자동차는 물론 치킨·피자·샴푸·남성복·의약품·정수기·임플란트 등 분야를 막론하고 임영웅이 떴다 하면 ‘완판’ 행렬이 이어졌다. 임영웅의 팬 카페에는 “정수기 광고 모델 끝났나요. 재계약하면 저도 교체하려고요”, “간장에 영웅님 얼굴이 있어 바로 사왔습니다”, “본죽 쇼핑백에 영웅님 사진이 있어 버리지도 않고 간직합니다” 등의 소비 인증 글이 가득하다. 이들은 다양한 방법을 동원해 애정하는 스타를 지원하며 산업계에 경제적 부가 가치를 창출하고 있다.
팬(fan)이 소비의 한 축이 된 지는 오래다. 이들은 일반 소비자와는 다르다. 팬은 커뮤니티를 이루고 좋아하는 대상에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할애하며 실제로 좋아하는 대상의 이미지를 형성하고 변화시키는 데까지 참여한다. 어떤 대상의 팬들이 모인 하나의 집단을 ‘팬덤’이라고 칭하는데 광신자를 뜻하는 퍼내틱(fanatic)의 ‘팬’과 나라를 뜻하는 ‘덤(-dom)’의 합성어다.
과거 팬덤은 그저 공동체의 역할이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팬덤이 문화적 영향을 넘어 경제적인 영향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이들을 중심으로 한 경제 활동을 ‘팬덤 경제(이코노미)’, ‘팬덤 경영(비즈니스)’으로 부른다. 팬과 산업을 더한 팬코노미(팬+이코노미)라는 조어도 있다.
팬덤이 ‘오빠(누나) 부대’라고 불릴 1970~1990년대만 해도 팬들의 소비는 앨범·콘서트·신문·잡지 등 아티스트의 오리지널 IP에 그쳤다. 하지만 팬덤의 규모가 초국적 한류 팬덤과 만나면서 소속사와 아티스트들이 오리지널 IP를 넘어 MD·라이선싱·출판·웹툰·게임·캐릭터 등 간접 참여형 사업에까지 나서면서 팬덤 경제는 그 덩치를 점점 더 키우고 있다. 이 과정에서 팬들은 단순 소비자를 넘어 능동적인 참여 주체의 지위를 얻었다. 팬덤 경제의 본질이다.
팬덤 경제의 시작“우리는 음악을 만들지 않는다. 우리는 스타를 만든다.”
2001년 JYP엔터테인먼트의 간판 프로듀서 박진영은 직원들을 불러놓고 이렇게 말했다. 당시 온라인 음악 파일 공유 서비스인 ‘냅스터’와 같은 서비스가 나와 한국의 CD 기반 음반 시장의 90%가 무너졌을 때다. 박진영은 음악 산업의 비즈니스 모델을 바꿀 때라는 것을 간파했다. 그리고 디지털 시대에도 바뀌지 않을 것은 가장 아날로그적인 것, 바로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소비자들은 영원히 스타를 원할 것이란 믿음이었다. 그때부터 JYP엔터테인먼트는 인재를 찾아 나섰다. 가수 비와 그룹 원더걸스가 그의 손에서 탄생했다. 한국에서 성공한 후 아시아·미국의 로드맵을 그렸다. 해외에서의 성공 여부를 떠나 박진영의 계획대로 만들어진 스타는 팬과 초국적 팬덤을 가져왔다.
그즈음부터 한국에서는 팬덤과 팬덤 경제라는 말이 미디어를 장식하기 시작했다. 2000년대 초반에는 드라마 ‘겨울연가’의 주연 배우를 맡은 배용준이 일본에서 문화를 넘어 경제·산업 부문에서 시너지 효과를 일으키자 ‘주식회사 욘사마의 경제 효과’를 분석하는 글들이 줄을 이었다. 잘나가던 일본이 장기 불황에 빠지자 일본 중년 여성들은 남성에 대한 신뢰를 잃었고 그 결핍을 욘사마가 채운 시절이었다.
팬덤이 경제의 영역으로 더욱 확장한 것은 2010년대 들어서다. 원더걸스나 소녀시대와 같은 걸그룹, 빅뱅과 동방신기와 같은 보이그룹들이 일본·중국 등 아시아에서 상당한 성과를 거두자 ‘9인 기업 소시의 경제학’, ‘동방신기 1000억 대박…아이돌 해외 콘서트의 경제학’ 등 경제 관점에서 아이돌을 조명하는 기사가 쏟아졌다.
스타는 사람만이 아니었다. 기업과 브랜드에서도 스타가 탄생했다. 이는 곧 스타를 추종하는 팬덤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2010년대 초반에는 ‘애플빠’, ‘삼성빠’가 등장했다. 스마트폰·태블릿PC 등 모바일 정보기술(IT) 기기가 본격적으로 활성화되자 IT업계에서 마니아 층의 영향력이 강해진 것이다. 특히 애플은 ‘맥북’, ‘아이폰’으로 팬덤을 불려 나갔다. ‘맥가이’, ‘애플가이’란 말이 유행했다. 이 말은 곧 “넌 달라, 평범하길 거부하고 규칙에 얽매이지 않는 사람이야”를 내포했다. 애플의 창업자인 스티브 잡스가 ‘다르게 생각하라’는 슬로건을 내세운 광고로 대중에게 창조적이고 혁신적인 회사 이미지를 심어 줬기 때문이다. 애플의 스토리는 지금까지도 애플 팬덤을 형성하며 애플이 IT 시장에서 독보적인 지위를 유지하는 데 일조하고 있다.
하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팬덤은 ‘(오)빠’라는 멸칭을 들을 때였다. 시끄럽게 소리를 지르고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10대 소년소녀, 드라마나 영화에 나오는 사회 부적응자. 팬덤에 대한 고정 관념은 사회 깊숙이 뿌리 깊게 박혀 있었다.팬덤 경제의 중흥“방탄소년단(BTS)이 한국인 최초로 ‘빌보드 핫100’ 1위에 올랐습니다.” 2020년 9월 1일은 팬덤에 대한 기존 방정식이 바뀌는 날이었다. 한국의 보이그룹 BTS가 한국인 최초로 미국 빌보드 차트 정상에 오르자 국민적 관심은 BTS의 성공 원인에 집중됐다. 그들의 음악·퍼포먼스·스타성·제작사 등등 이모저모가 조명됐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큰 관심을 받은 것은 BTS의 글로벌 팬덤, ‘아미(ARMY)’였다. 평론가들 사이에선 BTS를 키운 80%가 아미란 평가가 나왔다.
BTS의 데뷔 초 다른 이름은 ‘중소돌(중소아이돌)’이었다. 소속사의 영향력이 크지 않다 보니 공중파보다는 음악 케이블 TV 위주로 활동을 펼쳤다. BTS는 공백을 채우기 위해 일찍부터 트위터·유튜브 등 소셜 미디어로 눈을 돌렸다. 데뷔 전부터 무대 밖 일상을 소셜 미디어로 공유하고 팬들과 활발하게 소통했다. 그들이 공유하는 모든 일상은 팬들에게 ‘덕질’할 맛나게 하는 ‘떡밥’이 됐다.
콘텐츠는 그 자체로 확산될 뿐만 아니라 팬들을 통해 재생산됐다. 팬들은 스스로 BTS의 영상을 각국 언어로 번역하거나 재미있는 콘텐츠만 모아 재가공했다. 팬들이 만들어 낸 번역 영상은 BTS가 언어 장벽을 뛰어넘을 수 있는 디딤돌이 됐다. 국적을 초월한 세계적 팬을 거느리게 된 이유이기도 하다. 한국정치사회연구소는 “BTS와 팬 사이는 흔한 권력 관계 대신 팬덤이 곧 해당 세력의 주체가 되는 상호 관계성을 갖는다”고 분석했다.
분석은 정확했다. 스타와 팬덤의 상호 관계성이 BTS의 제작자인 방시혁 하이브 이사회 의장의 성공 전략이기도 했다. “BTS가 팬들과의 직접적인 접촉을 통해 쌓은 충성심이 미국에서의 성공과 관련이 있습니다. 유사한 전략을 펼친 디즈니·애플을 인용했죠.” 방 의장은 2019년 10월 10일 미국 시사 주간지인 타임과의 인터뷰에서 “미국의 주류 공식과 다른 공식을 통해 BTS가 미국 가요 시장에서 성공을 거뒀다”며 이같이 말했다. 그는 “(팬의) 충성심을 바탕으로 한 모델이 당시 가요계가 갖고 있던 음반 판매 부진이라는 문제의 해결책이 될 것이라고 예측했다”고 말했다. 18년 전 박진영의 ‘스타’ 제작 선언에서 더 나아가 스타 뒤에 있던 ‘팬덤’을 전면에 내세운 것이다.
그의 전략은 적중했다. 음반 시장이 음원·디지털 시장으로 재편되면서 2000~2010년대만 하더라도 앨범 판매량의 규모가 감소했지만 BTS의 팬덤은 조직적으로 앨범을 구매하고 스트리밍을 하며 아티스트를 홍보함으로써 앨범 판매량이 다시 증가하는 현상을 보였다. 음원·스트리밍 위주의 시장이 아이돌 팬덤에 따라 앨범 판매량이 다시 증가하는 기현상이 나타난 것이다.
아미의 팬덤 경제는 센세이션 그 자체였다. 미국의 한 잡지는 BTS가 한국 국내총생산(GDP)에 기여하는 바를 조사했다. 이들은 BTS의 연간 수익이 46억5000만 달러에 달하며 이는 삼성과 현대와 같은 리그에 있다고 주장했다(2018년 매출 비교). 당시 국가 경제에 첫째로 기여하는 삼성의 매출은 2120억 달러로 한국 GDP의 13%에 달했고 2위인 현대차는 5.3% 기여했다. BTS는 2018년 GDP의 0.3%인 46억5000만 달러다. 1·2위와는 큰 격차가 났지만 7명의 보이그룹이 만든 매출로 본다면 적지 않은 규모다.
BTS가 빌보드 핫 100에 최초로 오른 해, 2020년에 하이브(구 빅히트엔터테인먼트)도 BTS의 시장성을 내다봤다. 당시 이들이 바라본 팬덤 경제의 시장 규모는 총 7조9000억원으로 추정됐다. 하이브는 아티스트·음원·공연 등 1차 IP를 활용하는 데서 더 나아가 영상 콘텐츠 제작과 굿즈 판매, 캐릭터 산업, 팬 플랫폼 등을 기반으로 한 2차 IP 사업으로 발전시키는 간접 참여형 매출을 통해 규모의 확장을 꾀했다.
지금은 잘 알려진 팬 플랫폼인 ‘위버스’란 비즈니스 모델이다. 팬들과의 소통을 강화하고 이들의 반응을 실시간 확인하는 팬 플랫폼 시스템에서 소속사는 아티스트의 일상을 실시간으로 공유하는 것은 물론 음반과 굿즈 관련 상품도 팔았다. 해당 아티스트와 메시지를 주고받는 식의 채팅 기능도 갖췄다. 이를 통해 아티스트와 팬과의 친밀도를 높이는 전략이다. 물론 유료 서비스다. 팬들은 돈을 지불하고 기꺼이 팬 플랫폼 안에서 국내외 팬들끼리 서로 소통하며 화합의 장을 만들었다. 제작사로서는 팬덤 경제·경영의 중심 무대다.왜 지금, 팬덤인가기업들도 팬덤 경제의 성공 방정식을 도입하고 있다. CNBC에 따르면 BTS와의 컬래버레이션을 진행한 맥도날드는 팬데믹(감염병의 세계적 유행)으로 인해 30%가량의 매장이 운영되지 않고 있을 때도 기업 전체 총 순 매출이 57% 증가했다.
실제 삼일회계법인(PWC)에 따르면 팬데믹으로 콘서트, 사인회 등의 대면 엔터테인먼트가 타격을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엔터테인먼트 산업은 2021년 한 해 6.5%의 성장률을 기록했다. 한국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요즘 미국에서는 ‘스위프트노믹스’라는 말이 있다. 인기 가수인 테일러 스위프트가 공연하는 도시들의 지역 경제가 팬데믹 이전 수준으로 좋아진다는 것을 뜻하는 말이다. 미국에서 총 52회 일정으로 진행된 이 투어 콘서트로 미국 20여 개 도시의 공연장 근처 호텔과 음식점 등 공연장 주변 상권은 코로나19 이전 수준의 매출을 회복했다. 공연 예상 수익은 총 10억 달러, 우리 돈 1조2000억원을 넘을 것으로 추산된다. 미국 중앙은행(Fed)은 경제 동향 보고서에서 스위프트 콘서트의 경제적 가치를 언급했다. ‘스위프트의 투어가 슈퍼볼급 경제 효과를 가져왔다’는 언론 보도까지 나올 정도다.
세계 경제를 녹다운시킨 코로나19 사태로 대부분의 산업이 주춤할 때 대면 사업이 중심인 엔터테인먼트가 타격 받지 않은 것은 경제학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이지은 대신증권 애널리스트는 “팬덤 소비는 전통적인 경제학에서 설명되지 않는 비이성적 소비에 가깝다”며 “따라서 팬덤 소비는 경기 침체에 민감하게 반응하지 않고 금리 인상, 물가 상승률에 따라 소비 감소 가능성은 매우 낮다”고 분석했다.
기업과 경제 주체들도 팬덤을 구축하고 충성심과 소비력을 바탕으로 혁신과 브랜드 확장을 이어 나가는 노력을 하고 있다. 많은 기업과 경제 주체들이 스스로의 팬덤을 키우기도 하고 다른 팬덤 주체와의 협력을 통해 다른 팬덤을 새로운 소비자군으로 이끌어 내기도 한다. 충실한 팬덤만이 불황을 극복할 수 있는 성공 열쇠가 됐기 때문이다. ‘팬덤 경제학’을 쓴 글로벌 마케팅 전문가인 데이비드 미어먼 스콧은 “불황 때 고객은 떠나도 팬은 떠나지 않는다”며 “단순히 제품과 서비스를 구매하는 고객을 넘어 브랜드 자체에 대한 애정을 가진 ‘팬’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폭등하는 물가, 경제 불황 우려에 지갑을 닫는 요즘 ‘팬덤 경제학’을 다시 새겨야 할 때가 왔다.
정채희 기자 poof34@hankyung.com
가수 임영웅의 전국 투어 콘서트 ‘아임 히어로(IM HERO)’의 서울 공연 6회 차 티켓은 9월 14일 판매를 시작한 지 1분 만에 최대 트래픽인 약 370만을 기록하며 전석 매진됐다. 그야말로 ‘없어서’ 못 판다. 이날 티케팅에는 5060대 주력 팬부터 그들의 자녀인 1020대까지 참전했다. 티켓을 못 산 이들은 “‘호남평야’에서 콘서트를 열어 달라”고 하소연할 정도다. 암표 시장에서는 16만원짜리 티켓 2장이 180만원까지 치솟았다. ‘히어로노믹스’의 등장임영웅 파워는 음악계를 넘어 산업계를 강타한다. 아티스트의 오리지널 지식재산권(IP)인 앨범·콘서트 외에도 자체적으로 판매하는 굿즈·출판물·예능 출연·광고 등으로 돈을 번다. 업계에 따르면 2022년 상반기에만 임영웅은 약 375억원의 매출을 올렸다. 3번의 콘서트로 92억원, 편당 4억원의 개런티로 추정되는 5개 광고로 20억원, 솔로 가수 최초 초동 밀리언셀러를 기록한 앨범으로 262억원의 매출을 기록했다는 것이다. ‘걸어다니는 기업’ 소리를 듣는 이유다.
임영웅의 경제 효과는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5060대 오팔세대로 일컬어지는 신중년 팬덤의 소비를 이끌어 낸다. 2020년 쌍용차(현 KG모빌리티)가 임영웅을 모델로 내세워 단일 모델의 판매량이 53%나 증가한 사례는 유명하다. 임영웅의 팬들은 기꺼이 임영웅 1호 딱지가 붙은 차량을 구매했다. 자동차는 물론 치킨·피자·샴푸·남성복·의약품·정수기·임플란트 등 분야를 막론하고 임영웅이 떴다 하면 ‘완판’ 행렬이 이어졌다. 임영웅의 팬 카페에는 “정수기 광고 모델 끝났나요. 재계약하면 저도 교체하려고요”, “간장에 영웅님 얼굴이 있어 바로 사왔습니다”, “본죽 쇼핑백에 영웅님 사진이 있어 버리지도 않고 간직합니다” 등의 소비 인증 글이 가득하다. 이들은 다양한 방법을 동원해 애정하는 스타를 지원하며 산업계에 경제적 부가 가치를 창출하고 있다.
팬(fan)이 소비의 한 축이 된 지는 오래다. 이들은 일반 소비자와는 다르다. 팬은 커뮤니티를 이루고 좋아하는 대상에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할애하며 실제로 좋아하는 대상의 이미지를 형성하고 변화시키는 데까지 참여한다. 어떤 대상의 팬들이 모인 하나의 집단을 ‘팬덤’이라고 칭하는데 광신자를 뜻하는 퍼내틱(fanatic)의 ‘팬’과 나라를 뜻하는 ‘덤(-dom)’의 합성어다.
과거 팬덤은 그저 공동체의 역할이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팬덤이 문화적 영향을 넘어 경제적인 영향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이들을 중심으로 한 경제 활동을 ‘팬덤 경제(이코노미)’, ‘팬덤 경영(비즈니스)’으로 부른다. 팬과 산업을 더한 팬코노미(팬+이코노미)라는 조어도 있다.
팬덤이 ‘오빠(누나) 부대’라고 불릴 1970~1990년대만 해도 팬들의 소비는 앨범·콘서트·신문·잡지 등 아티스트의 오리지널 IP에 그쳤다. 하지만 팬덤의 규모가 초국적 한류 팬덤과 만나면서 소속사와 아티스트들이 오리지널 IP를 넘어 MD·라이선싱·출판·웹툰·게임·캐릭터 등 간접 참여형 사업에까지 나서면서 팬덤 경제는 그 덩치를 점점 더 키우고 있다. 이 과정에서 팬들은 단순 소비자를 넘어 능동적인 참여 주체의 지위를 얻었다. 팬덤 경제의 본질이다.
팬덤 경제의 시작“우리는 음악을 만들지 않는다. 우리는 스타를 만든다.”
2001년 JYP엔터테인먼트의 간판 프로듀서 박진영은 직원들을 불러놓고 이렇게 말했다. 당시 온라인 음악 파일 공유 서비스인 ‘냅스터’와 같은 서비스가 나와 한국의 CD 기반 음반 시장의 90%가 무너졌을 때다. 박진영은 음악 산업의 비즈니스 모델을 바꿀 때라는 것을 간파했다. 그리고 디지털 시대에도 바뀌지 않을 것은 가장 아날로그적인 것, 바로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소비자들은 영원히 스타를 원할 것이란 믿음이었다. 그때부터 JYP엔터테인먼트는 인재를 찾아 나섰다. 가수 비와 그룹 원더걸스가 그의 손에서 탄생했다. 한국에서 성공한 후 아시아·미국의 로드맵을 그렸다. 해외에서의 성공 여부를 떠나 박진영의 계획대로 만들어진 스타는 팬과 초국적 팬덤을 가져왔다.
그즈음부터 한국에서는 팬덤과 팬덤 경제라는 말이 미디어를 장식하기 시작했다. 2000년대 초반에는 드라마 ‘겨울연가’의 주연 배우를 맡은 배용준이 일본에서 문화를 넘어 경제·산업 부문에서 시너지 효과를 일으키자 ‘주식회사 욘사마의 경제 효과’를 분석하는 글들이 줄을 이었다. 잘나가던 일본이 장기 불황에 빠지자 일본 중년 여성들은 남성에 대한 신뢰를 잃었고 그 결핍을 욘사마가 채운 시절이었다.
팬덤이 경제의 영역으로 더욱 확장한 것은 2010년대 들어서다. 원더걸스나 소녀시대와 같은 걸그룹, 빅뱅과 동방신기와 같은 보이그룹들이 일본·중국 등 아시아에서 상당한 성과를 거두자 ‘9인 기업 소시의 경제학’, ‘동방신기 1000억 대박…아이돌 해외 콘서트의 경제학’ 등 경제 관점에서 아이돌을 조명하는 기사가 쏟아졌다.
스타는 사람만이 아니었다. 기업과 브랜드에서도 스타가 탄생했다. 이는 곧 스타를 추종하는 팬덤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2010년대 초반에는 ‘애플빠’, ‘삼성빠’가 등장했다. 스마트폰·태블릿PC 등 모바일 정보기술(IT) 기기가 본격적으로 활성화되자 IT업계에서 마니아 층의 영향력이 강해진 것이다. 특히 애플은 ‘맥북’, ‘아이폰’으로 팬덤을 불려 나갔다. ‘맥가이’, ‘애플가이’란 말이 유행했다. 이 말은 곧 “넌 달라, 평범하길 거부하고 규칙에 얽매이지 않는 사람이야”를 내포했다. 애플의 창업자인 스티브 잡스가 ‘다르게 생각하라’는 슬로건을 내세운 광고로 대중에게 창조적이고 혁신적인 회사 이미지를 심어 줬기 때문이다. 애플의 스토리는 지금까지도 애플 팬덤을 형성하며 애플이 IT 시장에서 독보적인 지위를 유지하는 데 일조하고 있다.
하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팬덤은 ‘(오)빠’라는 멸칭을 들을 때였다. 시끄럽게 소리를 지르고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10대 소년소녀, 드라마나 영화에 나오는 사회 부적응자. 팬덤에 대한 고정 관념은 사회 깊숙이 뿌리 깊게 박혀 있었다.팬덤 경제의 중흥“방탄소년단(BTS)이 한국인 최초로 ‘빌보드 핫100’ 1위에 올랐습니다.” 2020년 9월 1일은 팬덤에 대한 기존 방정식이 바뀌는 날이었다. 한국의 보이그룹 BTS가 한국인 최초로 미국 빌보드 차트 정상에 오르자 국민적 관심은 BTS의 성공 원인에 집중됐다. 그들의 음악·퍼포먼스·스타성·제작사 등등 이모저모가 조명됐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큰 관심을 받은 것은 BTS의 글로벌 팬덤, ‘아미(ARMY)’였다. 평론가들 사이에선 BTS를 키운 80%가 아미란 평가가 나왔다.
BTS의 데뷔 초 다른 이름은 ‘중소돌(중소아이돌)’이었다. 소속사의 영향력이 크지 않다 보니 공중파보다는 음악 케이블 TV 위주로 활동을 펼쳤다. BTS는 공백을 채우기 위해 일찍부터 트위터·유튜브 등 소셜 미디어로 눈을 돌렸다. 데뷔 전부터 무대 밖 일상을 소셜 미디어로 공유하고 팬들과 활발하게 소통했다. 그들이 공유하는 모든 일상은 팬들에게 ‘덕질’할 맛나게 하는 ‘떡밥’이 됐다.
콘텐츠는 그 자체로 확산될 뿐만 아니라 팬들을 통해 재생산됐다. 팬들은 스스로 BTS의 영상을 각국 언어로 번역하거나 재미있는 콘텐츠만 모아 재가공했다. 팬들이 만들어 낸 번역 영상은 BTS가 언어 장벽을 뛰어넘을 수 있는 디딤돌이 됐다. 국적을 초월한 세계적 팬을 거느리게 된 이유이기도 하다. 한국정치사회연구소는 “BTS와 팬 사이는 흔한 권력 관계 대신 팬덤이 곧 해당 세력의 주체가 되는 상호 관계성을 갖는다”고 분석했다.
분석은 정확했다. 스타와 팬덤의 상호 관계성이 BTS의 제작자인 방시혁 하이브 이사회 의장의 성공 전략이기도 했다. “BTS가 팬들과의 직접적인 접촉을 통해 쌓은 충성심이 미국에서의 성공과 관련이 있습니다. 유사한 전략을 펼친 디즈니·애플을 인용했죠.” 방 의장은 2019년 10월 10일 미국 시사 주간지인 타임과의 인터뷰에서 “미국의 주류 공식과 다른 공식을 통해 BTS가 미국 가요 시장에서 성공을 거뒀다”며 이같이 말했다. 그는 “(팬의) 충성심을 바탕으로 한 모델이 당시 가요계가 갖고 있던 음반 판매 부진이라는 문제의 해결책이 될 것이라고 예측했다”고 말했다. 18년 전 박진영의 ‘스타’ 제작 선언에서 더 나아가 스타 뒤에 있던 ‘팬덤’을 전면에 내세운 것이다.
그의 전략은 적중했다. 음반 시장이 음원·디지털 시장으로 재편되면서 2000~2010년대만 하더라도 앨범 판매량의 규모가 감소했지만 BTS의 팬덤은 조직적으로 앨범을 구매하고 스트리밍을 하며 아티스트를 홍보함으로써 앨범 판매량이 다시 증가하는 현상을 보였다. 음원·스트리밍 위주의 시장이 아이돌 팬덤에 따라 앨범 판매량이 다시 증가하는 기현상이 나타난 것이다.
아미의 팬덤 경제는 센세이션 그 자체였다. 미국의 한 잡지는 BTS가 한국 국내총생산(GDP)에 기여하는 바를 조사했다. 이들은 BTS의 연간 수익이 46억5000만 달러에 달하며 이는 삼성과 현대와 같은 리그에 있다고 주장했다(2018년 매출 비교). 당시 국가 경제에 첫째로 기여하는 삼성의 매출은 2120억 달러로 한국 GDP의 13%에 달했고 2위인 현대차는 5.3% 기여했다. BTS는 2018년 GDP의 0.3%인 46억5000만 달러다. 1·2위와는 큰 격차가 났지만 7명의 보이그룹이 만든 매출로 본다면 적지 않은 규모다.
BTS가 빌보드 핫 100에 최초로 오른 해, 2020년에 하이브(구 빅히트엔터테인먼트)도 BTS의 시장성을 내다봤다. 당시 이들이 바라본 팬덤 경제의 시장 규모는 총 7조9000억원으로 추정됐다. 하이브는 아티스트·음원·공연 등 1차 IP를 활용하는 데서 더 나아가 영상 콘텐츠 제작과 굿즈 판매, 캐릭터 산업, 팬 플랫폼 등을 기반으로 한 2차 IP 사업으로 발전시키는 간접 참여형 매출을 통해 규모의 확장을 꾀했다.
지금은 잘 알려진 팬 플랫폼인 ‘위버스’란 비즈니스 모델이다. 팬들과의 소통을 강화하고 이들의 반응을 실시간 확인하는 팬 플랫폼 시스템에서 소속사는 아티스트의 일상을 실시간으로 공유하는 것은 물론 음반과 굿즈 관련 상품도 팔았다. 해당 아티스트와 메시지를 주고받는 식의 채팅 기능도 갖췄다. 이를 통해 아티스트와 팬과의 친밀도를 높이는 전략이다. 물론 유료 서비스다. 팬들은 돈을 지불하고 기꺼이 팬 플랫폼 안에서 국내외 팬들끼리 서로 소통하며 화합의 장을 만들었다. 제작사로서는 팬덤 경제·경영의 중심 무대다.왜 지금, 팬덤인가기업들도 팬덤 경제의 성공 방정식을 도입하고 있다. CNBC에 따르면 BTS와의 컬래버레이션을 진행한 맥도날드는 팬데믹(감염병의 세계적 유행)으로 인해 30%가량의 매장이 운영되지 않고 있을 때도 기업 전체 총 순 매출이 57% 증가했다.
실제 삼일회계법인(PWC)에 따르면 팬데믹으로 콘서트, 사인회 등의 대면 엔터테인먼트가 타격을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엔터테인먼트 산업은 2021년 한 해 6.5%의 성장률을 기록했다. 한국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요즘 미국에서는 ‘스위프트노믹스’라는 말이 있다. 인기 가수인 테일러 스위프트가 공연하는 도시들의 지역 경제가 팬데믹 이전 수준으로 좋아진다는 것을 뜻하는 말이다. 미국에서 총 52회 일정으로 진행된 이 투어 콘서트로 미국 20여 개 도시의 공연장 근처 호텔과 음식점 등 공연장 주변 상권은 코로나19 이전 수준의 매출을 회복했다. 공연 예상 수익은 총 10억 달러, 우리 돈 1조2000억원을 넘을 것으로 추산된다. 미국 중앙은행(Fed)은 경제 동향 보고서에서 스위프트 콘서트의 경제적 가치를 언급했다. ‘스위프트의 투어가 슈퍼볼급 경제 효과를 가져왔다’는 언론 보도까지 나올 정도다.
세계 경제를 녹다운시킨 코로나19 사태로 대부분의 산업이 주춤할 때 대면 사업이 중심인 엔터테인먼트가 타격 받지 않은 것은 경제학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이지은 대신증권 애널리스트는 “팬덤 소비는 전통적인 경제학에서 설명되지 않는 비이성적 소비에 가깝다”며 “따라서 팬덤 소비는 경기 침체에 민감하게 반응하지 않고 금리 인상, 물가 상승률에 따라 소비 감소 가능성은 매우 낮다”고 분석했다.
기업과 경제 주체들도 팬덤을 구축하고 충성심과 소비력을 바탕으로 혁신과 브랜드 확장을 이어 나가는 노력을 하고 있다. 많은 기업과 경제 주체들이 스스로의 팬덤을 키우기도 하고 다른 팬덤 주체와의 협력을 통해 다른 팬덤을 새로운 소비자군으로 이끌어 내기도 한다. 충실한 팬덤만이 불황을 극복할 수 있는 성공 열쇠가 됐기 때문이다. ‘팬덤 경제학’을 쓴 글로벌 마케팅 전문가인 데이비드 미어먼 스콧은 “불황 때 고객은 떠나도 팬은 떠나지 않는다”며 “단순히 제품과 서비스를 구매하는 고객을 넘어 브랜드 자체에 대한 애정을 가진 ‘팬’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폭등하는 물가, 경제 불황 우려에 지갑을 닫는 요즘 ‘팬덤 경제학’을 다시 새겨야 할 때가 왔다.
정채희 기자 poof34@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