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사가 만드는 팬덤 이코노미, 실력 그 이상의 무엇[EDITOR's LETTER]
입력 2023-09-25 14:09:43
수정 2023-10-16 14:30:48
[EDITOR's LETTER]
“여기 미친 사람들이 있습니다. 부적응자 혁명가 문제아. 사물을 다르게 보는 사람들입니다.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할 만큼 미친 사람들이 결국 세상을 바꿀 것입니다.”
1997년 스티브 잡스는 애플의 ‘싱크 디퍼런트(think different)’ 광고를 직접 녹음했습니다. 이 광고에는 간디, 아인슈타인, 아멜리아 에어하트, 밥 딜런 등이 등장합니다. 식민주의, 뉴턴의 물리학, 성차별, 전쟁 등 인간에게 제약을 가하는 규범에 저항한 반란자들입니다.
이 광고를 통해 애플은 1984라는 슈퍼볼 광고에서 시작된 자신의 반란자 서사를 확장합니다. 핵심 질문은 “당신은 창조적 반란자인가?”였습니다. 이 서사는 팬덤으로 이어졌고 애플 제국의 기초가 됩니다.
팬덤과 서사의 관계 하면 역시 문화 산업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몇 해 전 TV에서 ‘어느 60대 노부부의 이야기’가 흘러나왔습니다. 김광석 버전이 아니었습니다. 발라드도 아니고 트로트도 아니 뭐가 섞여 있었습니다. 임영웅이란 가수였습니다. ‘누구지?’ 하고 지나쳤습니다.
뒤늦게 그의 위력을 알게 됐습니다. 음악 스트리밍 서비스에 톱 100곡을 틀어놓으면 계속 임영웅 노래가 나와 짜증이 날 정도였기 때문입니다. 콘서트 표를 구하기 위해 광클릭을 하고 대기 순번은 50만 번에 이르렀습니다. 티켓 한 장에 10만원만 잡아도 대기 자금이 500억원이라는 얘기입니다. 출연하는 프로그램은 시청률이 급등하고 그가 건강검진을 받으라고 권하면 병원에는 수요가 넘쳐납니다. ‘히어로노믹스’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을 정도입니다.
이번 주 한경비즈니스는 팬덤의 경제학을 다뤘습니다. 팬덤이 불러오는 경제 효과. 미국의 사례는 스위프트노믹스입니다. 몇 달 전 미국에서는 보수적인 필라델피아 연방은행이 테일러 스위프트 효과를 언급해 화제가 됐습니다. 필라델피아 경기가 좋아질 것이라고 예측하며 그 이유로 스위프트의 현지 공연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스위프트가 공연할 때는 리히터 규모 2.3의 지진이 관측되기도 할 정도였습니다.
물론 팬덤 이코노미를 말할 때 방탄소년단(BTS)을 빼놓을 수 없을 겁니다. 8조원에 이른다는 경제 효과는 왠지 너무 축소된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한국에서 팬덤은 어떻게 이런 힘을 갖게 됐을까요. 1980년대로 돌아가 볼까요. 돌아보면 1980년대는 혁명의 시대였습니다. 정치적 민주화만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두 자릿수 경제 성장은 중산층을 양산했습니다. 수많은 공장 노동자가 중소기업 사장이 됐습니다. 빈농의 자식, 어부의 자식은 대통령이 되고 세계적 기업의 최고경영자(CEO)가 됐습니다. 이성계의 역성혁명 이후 공식적으로 계급이 바뀌는 첫 혁명이 일어났다고도 합니다.
1990년대, 혁명의 시대는 막을 내립니다. 이념과 가치에 기반한 신념 공동체는 해체됐습니다. 그 빈자리를 채울 무언가가 등장했습니다. 취향이었습니다. 혁명의 시대가 가고 취향의 시대가 왔습니다. 해체된 신념 공동체의 자리를 취향 공동체가 대체했습니다. 패션·음악·영화·드라마·음식은 다양해졌고 같은 취향을 공유하는 사람들은 다양한 형태로 모여들었고 그중 일부는 팬덤으로 진화합니다.
팬덤의 운명도 순탄치는 않았습니다. 오랜 기간 ‘빠순이’, ‘사생팬’ 등 비하 발언을 견뎌야 했습니다. 하지만 팬덤은 진화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의미를 찾고 조직화하며 스타와 함께 성장했습니다. 그렇게 성장한 한국의 팬덤은 2000년대 이후 문화 산업에서 한 축을 담당하게 됩니다. K팝이나 드라마가 세계로 뻗어나가는 과정에서 팬덤은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유튜브 등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SNS)는 팬덤이 힘을 키우는 무기가 됐습니다.
팬덤을 들여다보면 공통점이 발견됩니다. 실력(제품력)은 기본이고 그 이상의 무언가가 있습니다. 서사 없는 감동 없고 감동 없는 팬덤은 없습니다. 팬덤 없이 스타이코노미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임영웅의 서사는 말 그대로 흙수저 서사입니다. 얼굴에 난 상처는 그 서사의 상징입니다. 이런 종류의 서사는 실력과 결합해 중·장년층 여성들을 흡수했습니다. 내가 지켜줘야 할 무언가가 된 셈이지요.
BTS의 서사는 성장 서사였습니다. 그러나 이 서사는 전형적인 성장 서사와 달랐습니다. 위로와 공감 희망이란 메시지가 빠지지 않았습니다. 이 서사는 전 세계를 점령했고 팬덤 이코노미의 새로운 정형을 보여줬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가을입니다. 유명인과 대기업에만 서사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누구에게나 서사는 있습니다. 내 서사를 내가 찾지 않으면 누가 찾아줄까요. BTS의 노래 가사처럼 말이지요. ‘어쩌면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어려운 게 나 자신을 사랑하는 거야.’
김용준 편집국장 junyk@hankyung.com
“여기 미친 사람들이 있습니다. 부적응자 혁명가 문제아. 사물을 다르게 보는 사람들입니다.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할 만큼 미친 사람들이 결국 세상을 바꿀 것입니다.”
1997년 스티브 잡스는 애플의 ‘싱크 디퍼런트(think different)’ 광고를 직접 녹음했습니다. 이 광고에는 간디, 아인슈타인, 아멜리아 에어하트, 밥 딜런 등이 등장합니다. 식민주의, 뉴턴의 물리학, 성차별, 전쟁 등 인간에게 제약을 가하는 규범에 저항한 반란자들입니다.
이 광고를 통해 애플은 1984라는 슈퍼볼 광고에서 시작된 자신의 반란자 서사를 확장합니다. 핵심 질문은 “당신은 창조적 반란자인가?”였습니다. 이 서사는 팬덤으로 이어졌고 애플 제국의 기초가 됩니다.
팬덤과 서사의 관계 하면 역시 문화 산업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몇 해 전 TV에서 ‘어느 60대 노부부의 이야기’가 흘러나왔습니다. 김광석 버전이 아니었습니다. 발라드도 아니고 트로트도 아니 뭐가 섞여 있었습니다. 임영웅이란 가수였습니다. ‘누구지?’ 하고 지나쳤습니다.
뒤늦게 그의 위력을 알게 됐습니다. 음악 스트리밍 서비스에 톱 100곡을 틀어놓으면 계속 임영웅 노래가 나와 짜증이 날 정도였기 때문입니다. 콘서트 표를 구하기 위해 광클릭을 하고 대기 순번은 50만 번에 이르렀습니다. 티켓 한 장에 10만원만 잡아도 대기 자금이 500억원이라는 얘기입니다. 출연하는 프로그램은 시청률이 급등하고 그가 건강검진을 받으라고 권하면 병원에는 수요가 넘쳐납니다. ‘히어로노믹스’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을 정도입니다.
이번 주 한경비즈니스는 팬덤의 경제학을 다뤘습니다. 팬덤이 불러오는 경제 효과. 미국의 사례는 스위프트노믹스입니다. 몇 달 전 미국에서는 보수적인 필라델피아 연방은행이 테일러 스위프트 효과를 언급해 화제가 됐습니다. 필라델피아 경기가 좋아질 것이라고 예측하며 그 이유로 스위프트의 현지 공연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스위프트가 공연할 때는 리히터 규모 2.3의 지진이 관측되기도 할 정도였습니다.
물론 팬덤 이코노미를 말할 때 방탄소년단(BTS)을 빼놓을 수 없을 겁니다. 8조원에 이른다는 경제 효과는 왠지 너무 축소된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한국에서 팬덤은 어떻게 이런 힘을 갖게 됐을까요. 1980년대로 돌아가 볼까요. 돌아보면 1980년대는 혁명의 시대였습니다. 정치적 민주화만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두 자릿수 경제 성장은 중산층을 양산했습니다. 수많은 공장 노동자가 중소기업 사장이 됐습니다. 빈농의 자식, 어부의 자식은 대통령이 되고 세계적 기업의 최고경영자(CEO)가 됐습니다. 이성계의 역성혁명 이후 공식적으로 계급이 바뀌는 첫 혁명이 일어났다고도 합니다.
1990년대, 혁명의 시대는 막을 내립니다. 이념과 가치에 기반한 신념 공동체는 해체됐습니다. 그 빈자리를 채울 무언가가 등장했습니다. 취향이었습니다. 혁명의 시대가 가고 취향의 시대가 왔습니다. 해체된 신념 공동체의 자리를 취향 공동체가 대체했습니다. 패션·음악·영화·드라마·음식은 다양해졌고 같은 취향을 공유하는 사람들은 다양한 형태로 모여들었고 그중 일부는 팬덤으로 진화합니다.
팬덤의 운명도 순탄치는 않았습니다. 오랜 기간 ‘빠순이’, ‘사생팬’ 등 비하 발언을 견뎌야 했습니다. 하지만 팬덤은 진화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의미를 찾고 조직화하며 스타와 함께 성장했습니다. 그렇게 성장한 한국의 팬덤은 2000년대 이후 문화 산업에서 한 축을 담당하게 됩니다. K팝이나 드라마가 세계로 뻗어나가는 과정에서 팬덤은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유튜브 등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SNS)는 팬덤이 힘을 키우는 무기가 됐습니다.
팬덤을 들여다보면 공통점이 발견됩니다. 실력(제품력)은 기본이고 그 이상의 무언가가 있습니다. 서사 없는 감동 없고 감동 없는 팬덤은 없습니다. 팬덤 없이 스타이코노미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임영웅의 서사는 말 그대로 흙수저 서사입니다. 얼굴에 난 상처는 그 서사의 상징입니다. 이런 종류의 서사는 실력과 결합해 중·장년층 여성들을 흡수했습니다. 내가 지켜줘야 할 무언가가 된 셈이지요.
BTS의 서사는 성장 서사였습니다. 그러나 이 서사는 전형적인 성장 서사와 달랐습니다. 위로와 공감 희망이란 메시지가 빠지지 않았습니다. 이 서사는 전 세계를 점령했고 팬덤 이코노미의 새로운 정형을 보여줬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가을입니다. 유명인과 대기업에만 서사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누구에게나 서사는 있습니다. 내 서사를 내가 찾지 않으면 누가 찾아줄까요. BTS의 노래 가사처럼 말이지요. ‘어쩌면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어려운 게 나 자신을 사랑하는 거야.’
김용준 편집국장 juny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