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솔로’가 보여준 날 것의 힘 [김희경의 컬처 인사이트]

'나는 솔로' 포스터 / 자료=SBS


“연애 프로가 아니라 인간 다큐다.” “하나의 문화인류학 도감이다.”

예능 프로그램, 그중에서도 연애 프로그램에 이토록 웅장하고 화려한 수식어가 붙은 적이 있었던가. ENA, SBS플러스에서 방영되고 있는 예능 ‘나는 솔로’에 대한 평가들이다. 심지어 “ENA가 아니라 EBS에서 방영됐어야 한다”라는 우스갯소리까지 나오고 있다.

화제성, 인기도 측면에서 봤을 때도 ‘나는 솔로’는 올해 대한민국 예능판을 뒤흔든 명실상부한 대표 콘텐츠라 할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일상에서 “‘나는 솔로’ 봤냐?”라는 대화를 자연스럽게 주고받았다. 상철과 영숙 등 낯선 일반인 출연자의 이름도 연예인 못지않게 자주 언급됐다. 올 상반기 3~4%대를 유지하던 ‘나는 솔로’의 시청률은 가장 화제가 된 16기 출연자들의 방송 이후 상승세를 나타냈다. 이들의 커플 매칭이 최종적으로 이뤄졌던 지난 4일 방송분의 시청률은 7.9%까지 치솟았다.

이 방송의 포맷은 기존의 연애 프로그램들과 동일하다. 다수의 남녀가 만나 짝을 찾는 방식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리얼리티 프로그램, 일반인 예능 역사에 한 획을 그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대체 비결이 뭘까? 답은 실화가 된 예능, 그 펄떡이는 ‘날 것’의 힘에 있다.

각본 없음+필터링 없음의 효과

‘나는 솔로’는 과거 ‘짝’(2011)을 만든 남규홍 PD가 연출을 맡은 만큼 ‘짝’과 거의 유사하게 진행된다. 2021년부터 매 기수별로 10여 명의 남녀 출연자를 선정해 운영하고 있다. 이들은 ‘솔로나라’에 입성해 5박 6일 동안 합숙을 하며 서로에 대해 알아가는 시간을 갖는다.

그런데 이들의 합숙 과정을 따라가다 보면, 윌리엄 골딩의 소설 ‘파리대왕’과 비슷한 점을 발견할 수 있다. ‘파리대왕’은 무인도에 불시착한 소년들의 모험담을 담고 있지만, 성장 소설이라고 할 순 없다. 인간의 내면 깊숙이 자리한 본성, 그 본성이 드러나면서 일어나는 일련의 사건들에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독자는 극단적 상황, 폐쇄적 공간에서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다양한 인간 군상과 마주하게 된다.

‘나는 솔로’ 역시 마찬가지다. 이 프로그램이 최근 큰 화제가 된 것은 ‘빌런’들의 탄생 덕분이었다. 연애 프로그램과 빌런은 크게 어울리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이들은 다른 참가자나 시청자들에게 어떻게 보일 것인가에 신경 쓰기보다 욕망을 자유롭게 표출하면서 여러 갈등 상황을 만들어낸다. 짧은 기간 내에 이뤄야 할 확고한 목표가 존재하고, 한정된 공간 안에서 다수가 함께 머문다는 설정 자체가 인간 내면의 본성을 들춰내기에 최적화된 형태인 것이다. 남 PD도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누구나 ‘나는 솔로’ 같은 특수한 상황에 놓이면 빌런이 될 수 있다”라고 말했다. 결국 애초에 프로그램의 취지가 연애 감정 자체에만 있는 것이 아님을 짐작할 수 있다.

마침 그 취지에 딱 부합하는 출연자들도 나타났다. 다른 작품들과 달리 이 프로그램은 인위적인 섭외 과정을 거치지 않는다. 오직 자발적으로 지원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선정한다. 그래서인지 카메라 앞에서도 거리낌이 전혀 없고, 자신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인물들이 여럿 등장하게 됐다.

최근 폭발적인 화제성을 보여준 16기 출연진은 이 같은 특성이 돋보이는 인물들로 구성됐다. 영숙은 상대를 조련하듯 밀고 당기기를 능숙하게 해낼 뿐 아니라, 자기 철학과 주장이 확고한 인물로 그려진다. 상철은 영숙에게 길들여지는 듯하면서도 자신이 살고 있는 미국으로 같이 떠나길 반복적으로 요구하는가 하면, 다른 여성에게 관심을 보이기도 했다. 출연자 사이의 여러 갈등 상황은 더욱 몰입도를 높였다. 옥순의 마음을 굳건히 믿고 있던 광수에게 영숙이 “경각심을 가지라”라고 말하면서 오해가 불거졌는데, 이는 남녀관계를 떠나 사회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에 해당했다. 시청자들은 그 과정에서 ‘뇌피셜’, ‘가짜뉴스’ 등에 대해 생각해 보고, 쉽게 감정을 투영하게 됐다. 일부 네티즌은 출연자들을 보며 자신을 돌이켜 볼 수 있게 됐다는 의미를 담아 “거울치료를 하게 됐다”라는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여기서 한 가지 의문점이 든다. 최근 2~3년 사이 나온 ‘하트 시그널’, ‘환승연애’, ‘솔로지옥’ 등 연애 리얼리티 프로그램도 짧은 시간 다수의 남녀가 합숙을 하는 과정을 담았다는 점에서 비슷하다. 그런데 왜 유독 ‘나는 솔로’에서 이런 효과가 극대화됐고 큰 화제가 됐을까?
‘나는 솔로’는 처음엔 연애 프로그램 가운데서도 최약체로 여겨졌다. 다른 작품과 달리 대규모 자본이 투입되지도 않았고, 화려한 세트도 없기 때문이다. 예쁘고 세련되게 화면을 구성하거나 연출하려는 흔적도 보이지 않는다. 게다가 엄청난 스펙이나 외모를 가진 사람이 출연하는 것도 아니다. 특히 16기 출연진은 이혼의 아픔을 가진 ‘돌싱’들로만 구성됐다. 출연자 이름도 요즘 감성과는 잘 맞지 않는다. 이 프로그램에선 각 인물들에 가명을 부여하는데, 주로 영숙, 광수, 옥순 등 1970~80년대 많이 볼 수 있었던 이름들을 붙인다.

이런 ‘투박함’은 오히려 리얼리티를 극대화하는 효과적인 장치가 됐다. TV나 인스타그램에나 있을 법한 인물들의 멀고 먼 사랑 이야기가 아니라 나와 지인의 이야기처럼 가깝게 느낄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이같이 ‘각본 없음’에 ‘필터링 없음’ 전략까지 더해지면서 ‘나는 솔로’는 방송과 현실의 견고한 벽을 무너뜨렸다.

시청자들은 16기 방송분이 끝나고서도 출연자의 현실 속 모습을 찾아보는 등 과몰입 현상까지 보이고 있다. 급기야 출연자들이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서 한 말들과 행동은 실시간 공유되고 기사화되는 단계에 이르렀다. 그야말로 방송이 곧 현실이 되고, 현실이 곧 방송이 됐다고 할 수 있다.

새로 쓴 성공 방정식: 거룩함, 인위성과의 결별

예능의 새로운 성공 사례를 만들어낸 ‘나는 솔로’. 이 프로그램에 대한 폭발적인 반응을 보며 예능계 종사자들의 고민은 더욱 깊어졌을 것 같다. 앞으로 예능은 어떤 길을 가야 할까? 다큐처럼 거룩하지 않고 드라마처럼 인위적이지 않게, 실화의 묘미를 잘 살린 ‘나는 솔로’와 같은 프로그램이 예능 산업의 주도권을 잡게 되지 않을까.

예능에서 리얼리티 프로그램은 이미 주요 장르로 자리매김했다. 하지만 연예인들의 일상을 관찰하는 리얼리티 프로그램은 종종 부자연스럽게 느껴진다. 각본에 쓰여진 대로 하루를 보내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는가 하면, 때론 간접광고까지 불쑥 나와 당황스러울 때도 있다. 부와 여유를 만끽하는 연예인들의 일상을 보면 그저 남의 이야기처럼 멀게 생각되고 공감하기 어렵다는 의견도 많다.

일반인의 출연은 그 대안으로 각광받고 있다. ‘유 퀴즈 온 더 블럭’에서 다양한 사연을 가진 일반인들이 나와 호평을 받으며, 그 필요성은 더욱 부각됐다. 이후 일반인 예능은 더욱 다양한 방식으로 진화하고 있다. ‘나는 솔로’와 같은 일반인 중심 연애 리얼리티 프로그램, 여러 직업군의 일반인이 출연한 서바이벌 예능 ‘피지컬: 100’과 같은 프로그램이 대표적이다.

물론 일반인 출연은 아직 보완해야 할 점이 많다. 일일이 검증을 하기 어렵기 때문에 도덕성 논란이 쉽게 일어날 수 있다. 지나치게 자극적으로 전개되거나 편집되면서 일반인 출연자의 피해가 커질 수 있다는 의견도 나온다. 이런 점들을 차츰 해소해 나가야만 일반인 예능은 더욱 발전할 수 있다.

오늘날 우리는 콘텐츠를 통해 언제든지 쉽게 무한한 상상의 세계에 빠져들 수 있다. 독창적인 상상력이 접목된 웹툰·웹소설을 즐기기도 하고, 이를 원작으로 한 드라마와 영화를 보기도 한다. 그 세계를 통해 때론 우주를 누비고, 때론 초능력을 가진 히어로가 되어보기도 한다.

그러나 실화를 접목한 콘텐츠는 상상력에 기댄 작품과는 또 다른 매력과 힘을 갖고 있다. 로버트 매키 서던캘리포이나대 시네마텔레비전학 교수는 저서 ‘스토리’에서 “이야기는 인생을 살아가기 위한, 자신의 삶을 이해하기 위한 장치”라고 말한다. 사람들은 콘텐츠를 보며 자기 스스로에 대해 생각하고 발전시키기 위한 의미를 찾고 싶어 한다는 뜻이다. 이 같은 취지엔 상상력에 기반한 이야기보다 실화를 접목한 콘텐츠가 더 부합한다. 그래서 앞으로도 실화는 큰 사랑을 받을 것이며, 이를 활용해 날것의 힘을 고스란히 살린 예능의 영향력은 갈수록 커질 것이다.

김희경 한국예술종합학교 겸임교수, 영화평론가 pressia@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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