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정책의 부활 부른 탈탄소 전환 경쟁 [ESG2]

[한경ESG] 이슈 브리핑

한미 외교차관 양자협의 내용 말하는 페르난데스 미 국무부 차관. 지난 1월 한미 양국은 공급망 기술협력, 인플레이션 감축법 내 한국산 전기차 차별 문제 등을 논의했다. 사진 : 연합뉴스


파리기후변화협정 이전 저탄소화 핵심 전략은 ‘탄소가격’ 정책이다. 대표적 가격 정책은 배출권거래제와 탄소세로, 이 두 제도는 온실가스를 배출하는 활동에 ‘비용’을 지불하게 함으로써 기업이나 가계가 탄소배출량을 줄이는 선택을 하도록 설계됐다.

당시 배출집약적 기초 원자재를 어떻게 생산할 것인가, 수요가 급증하지만 공급은 제한된 광물과 탄소집약적 원자재를 어떻게 생산하고 재활용할 것인가는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 기후변화에 관한 국제적 논의 창구였던 교토 체계가 대안을 마련하지 못하고 끝날 수 있다는 더 다급한 현안이 있었고, 탄소가격만 적정 수준에서 책정되면 시장 논리에 따라 화석연료는 무탄소 전원으로 대체되고 산업계는 녹색 전환을 서두를 것이라는 가격 메커니즘에 대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파리협정은 탄소가격 외에 ‘저탄소 기술’을 글로벌 협상의 주요 논제로 가져왔다. 선진국뿐 아니라 기후변화에 상대적으로 책임이 적은 개발도상국 역시 온실가스 감축 의무를 갖는 대신 선진국이 개발도상국의 기후 대응에 자금과 기술을 지원하기로 했다. 2015년까지만 해도 탄소감축 기술은 국가 간 치열한 경쟁의 대상이기보다 국제 협력 대상으로 여겨진 것이다. 수송·건물·발전, 탄소중립 시대 유망 시장

맥킨지는 2022년 6월 보고서에서 탈탄소 전환이 이루어지는 것을 고려해 11개 유망 탄소중립 관련 시장을 정리한 바 있다. 재생에너지나 수전해 수소를 포함한 저탄소 또는 무탄소에너지와 전원, 재생에너지나 수소를 주요 에너지로 사용하기 위해 필요한 배터리 등 에너지 저장장치, 탄소포집·저장장치, 무탄소에너지를 사용하는 수송 부문 및 건물 냉난방, 기후변화 영향을 줄이기 위한 물관리와 저탄소 농업, 이 모든 생산·소비 활동에 필요한 제품 생산에 필수적 산업과 광물 등 11개 분야가 포함됐다.


산업 중에서는 에너지집약도와 탄소집약도가 높은 소재 산업이 유망 분야에 주로 포함되었는데, 이는 이들 산업이 재생에너지 생산설비는 물론 기후변화와 함께 메가트렌드로 꼽히는 디지털화와 우주 시대 관련 산업에 두루 사용될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 각국 115명의 전문가는 무탄소 연료, 산업 부문 전환 공정, 계절별 에너지 저장 등을 2026~2030년 R&D 우선순위 1~3위로 선정한 바 있다.(Future Cleantech Architects, 2021)

문제는 이 기술 중 재생에너지를 제외한 대부분이 구체적으로 어떤 기술인지 특정되어 있지 않거나, 특정돼 있어도 아직 개발 전이거나, 개발됐어도 연구실에 머물러 있고 상용화되지 않았다는 데 있다. 기술개발이 지연되는 근본적 이유는 사회적으로 시급성이 크지만, 기술의 불확실성이 높고 개발·운용 비용이 많이 들어 개별 기업 차원에서는 ‘혁신적 리더’가 되어 기술개발이나 상용화를 선도하기 어렵다는 데 있다.

이러한 조건은 탄소가격만으로 탈탄소 전환을 이루기 어렵다는 점을 의미한다. 물론 탄소가격이 100달러를 훨씬 넘어서는 수준에서 형성되면 시장 기능에 의해 기업의 탄소중립 R&D 투자가 확대되고 관련 기술 분야에서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기업은 고비용에 시달리며 정부는 생산과 일자리가 해외로 유출되는 탄소 누출 위험을 감내해야 한다.

이러한 탄소중립 기술의 불확실성과 고비용 문제, 이로 인한 시장 실패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정부가 주도적 역할을 해야 한다는 논리가 부상하고 있다. 특히 전기차, 재생에너지, 배터리, 그린 수소 등 핵심적 탄소중립 기술 부문에서 중국이 비교우위에 있고, 이러한 비교우위는 중국 정부가 국영기업을 통해 자금과 기술을 지원하는 강력한 산업 지원 정책을 실시한 결과라는 주장이 미국과 유럽연합(EU)에서 확산됐다. 이것이 바로 이들 정부가 기후변화를 근거로 한 무역 규제를 도입하고, 탄소중립 R&D 투자에 적극 관여하거나 강력한 산업정책을 추진하는 배경이 됐다. 보호주의를 동반한 산업정책의 귀환



탄소중립 기술이 국가 간 치열한 경쟁 대상이 된 시기는 비교적 최근으로 코로나19 이후 주요 국가가 제시한 경기 회복 전략(recovery package)에 저탄소 기술과 이에 기반한 산업 경쟁력이 중심축을 구성하면서부터다. 빈번해진 기후 재난과 코로나19는 환경에 대한 소비자의 인식을 변화시켰고, 이에 반응해 기업은 단기적 이윤 추구 대신 ESG(환경·사회·지배구조) 경영을 선언했다.

이러한 움직임은 더욱 강화될 것으로 예상된다. 향후 온난화가 더욱 진행되며 온실가스배출량이 무역 규제 대상이 되고, 기후변화의 영향이 소비자가 상품을 선택하는 데 영향을 미치며, 이를 반영해 글로벌 바이어와 투자자가 글로벌 공급망을 재편할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이다. 특히 코로나19 이후 경기에 활력을 불어넣기 위해 정부가 확대 재정정책을 실시하며 저탄소에너지와 상품 시장에서 자국 산업의 경쟁력 제고를 적극 추진함에 따라 관련 기술을 대상으로 한 경쟁이 본격화됐다.

대표적으로 독일을 포함한 EU의 ‘그린딜’, 미국의 인플레이션 감축법(IRA), 일본의 그린 트랜스포메이션(GX) 전략 등이 이에 해당하며, 다른 국가들 역시 유사한 정책기조를 채택하는 추세다. 이들 국가가 채택한 구체적 정책은 다소 차이가 있지만 무탄소 전원, 저탄소 기술 개발과 상용화 활동에 대한 대규모 보조금 지원 또는 세금 감면, 기술개발과 혁신을 방해하는 규제 정책 개선, 녹색 공공 조달, 탄소발자국 표시 의무화, 순환경제화, 전환 금융 확대 등이 공통적으로 추진되는 정책에 해당한다.

그간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시장’을 중시했던 정책기조가 시장 실패가 존재하는 곳에 정부가 정책을 가지고 적극 ‘개입’하는 방향으로 전환된 것으로 보인다. 영국 경제학자 마리아나 마추카토의 표현대로 ‘산업정책의 귀환’이 일어난 것이다.

오형나 경희대 국제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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