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대기업 ‘통 큰’ M&A, 불황에 민낯 드러나[비즈니스 포커스]
입력 2024-01-23 06:00:01
수정 2024-01-23 10:17:59
호황기 ‘조 단위’에 인수한 화제 기업, 이름값 못해 손실 쌓이기도
‘유동성 시대’ 국내 대기업이 성사시킨 대형 인수합병(M&A) 건들이 이제 성적표를 받아들 때가 됐다. 금리인상 여파가 시장을 휩쓴 지 1년여가 훌쩍 지났기 때문이다. 저금리에 코로나19 팬데믹까지 겹치며 시장에 풀렸던 자금은 급격히 말라가고 있다. 기업들은 이제 ‘실적’를 통해 진검 승부를 할 때다.
지난해 말 하림이 HMM 인수 우선협상대상자에 선정됐다. 또 최근 오리온은 항암치료제 회사 레고켐바이오사이언스(레고켐바이오) 지분 25%를 5500억원에 사들였다. 돈줄이 말라가는 중이긴 하지만 여전히 ‘빅딜’은 종종 터져나온다.
그러나 기업데이터연구소 CEO스코어 집계에 따르면 2023년 500대 기업의 기업 인수는 60건으로 2022년 158건 대비 절반 이상 줄었다. M&A 시장이 한창 호황이던 2021년 166건을 기록한 뒤 감소 추세가 더 가팔라지고 있다. 인수금액 역시 14조9480억원으로 1년 만에 12%가 줄었다. 2021년 29조5000억원을 넘긴 뒤 기준금리 인상이 본격화한 2022년 이미 17조원으로 10조원 이상 감소한 터였다.
최근 들어 M&A가 위축된 원인으로는 시장 불확실성과 잉여자금 감소, 두 가지가 꼽힌다. 미국 기준금리 인하 시기가 시장 예상보다 연기되고 있는 가운데 동유럽, 중동 등에서 정치·군사적 긴장 상태가 쉽게 해소되지 못하고 있다. 게다가 2023년 3분기 기준 500대 기업 상장사의 누적 잉여현금흐름 또한 마이너스(-2조5787억원)로 전환됐다. 글로벌 경기 불안으로 실적은 크게 늘지 못하고 비용만 증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같은 상황에서 기존에 인수된 기업들 일부는 모회사 연결실적과 자금흐름에 더 큰 부담을 안기고 있다. 장기적 안목을 가진 경영진의 ‘통 큰 결단’으로 ‘조 단위’ 몸값을 지불했지만 당장은 손실을 키워가는 상황이다. 인수 당시 기대하던 시너지 효과가 날 때까지 일단은 적자를 감내하며 지켜봐야 할 수밖에 없다. 하필 사자마자…갑자기 꺾인 업황
최근 몇 년간 가장 주목받은 대기업의 ‘빅딜’은 SK가 이끌었다. SK는 현재 재계서열 2위에 오르기까지 핵심 그룹사를 인수합병해 성장해왔다. 이 같은 ‘인수합병 DNA’는 최태원 회장이 2012년 하이닉스 인수를 결정하면서 절정에 이른다. 당시 하이닉스는 오랜 연구개발(R&D) 투자 부족과 악화하던 반도체 업황으로 인해 인수기업을 찾는 데 번번이 실패했다. 그런데 통신, 정유 등 내수기업에서 수출기업으로 변화를 꾀하던 SK가 과감하게 3조원대 베팅에 나선 것이다.
결과적으로 하이닉스 인수는 ‘신의 한 수’가 됐다. 얼마 안 돼 메모리 반도체 호황이 이어졌기 때문이다. SK에 인수된 뒤 대대적인 설비투자에 나선 SK하이닉스는 2014년 연간매출 17조1000억원, 영업이익 5조1000억원을 달성했다. 업황이 절정이던 2017년에는 영업이익 13조원, 2018년 영업이익 20조원을 돌파했다.
이처럼 SK하이닉스가 캐시카우 역할을 하면서 최근 몇 년간 SK그룹의 M&A 실탄 역할을 했다. 특히 주요 M&A는 그룹 내 중추가 된 SK하이닉스의 기술력과 제품군을 다양화할 수 있는 방향으로 진행됐다. 다른 글로벌 반도체 제조기업과 비교할 때 SK하이닉스는 D램에 강한 반면 낸드플래시에 약했다.
이에 따라 2017년 베인캐피탈와 함께 낸드플래시 시장점유율 2위인 도시바 메모리 부문(현 키옥시아)을 간접 지분 투자형태로 인수한 데 이어 2020년에는 데이터센터용 eSSD(기업용 SSD)에 강점이 있는 인텔 낸드사업부(현 솔리다임) 전체를 10조3000억원에 사들였다. 2021년에는 비메모리 업종인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진출의 일환으로 키파운드리(현 SK키파운드리)를 5800억원에 인수했다.
그런데 엔데믹 이후 반도체 업황이 급격히 악화하며 이들 기업은 모기업인 SK하이닉스에 부담으로 작용하고 있다. 특히 솔리다임은 2022년 3조원이 넘는 적자를 낸 뒤 지난해 3분기 기준 3조6700억원 순손실을 이어갔다. 지난해 3분기 SK하이닉스의 7조7000억원 규모 누적 순손실의 절반 가까이를 차지하는 셈이다. 키옥시아 역시 2023년 1분기 1031억 엔(약 9400억원)에 이어 2분기에도 680억 엔(약 7800억원) 순손실을 기록했다. 너무 비쌌나…애매한 시너지
메모리 반도체만큼이나 업황을 타는 건설 역시 예외가 아니다. 중흥은 2021년 말 부동산 경기가 정점일 때 대우건설 인수를 결정했다. 하지만 인수 계약을 체결한 지 불과 1년이 지나지 않아서 주택경기 불황이 찾아왔다. 우량 사업장이 많고 토목·플랜트, 해외사업 등으로 포트폴리오를 다양화한 덕에 당장 적자는 아니지만 수익성이 아쉬운 상황이다. 지난해 3분기 대우건설 매출과 영업이익은 2조9901억원, 1902억원으로 매출은 증가한 반면 영업이익이 7.4% 감소하면서 영업이익률이 6.4%가량에 그쳤다.
2021년 신세계그룹에 편입된 지마켓(옛 이베이코리아)은 7분기 연속 적자를 기록하고 있다. 당시 이마트의 이베이코리아 인수는 ‘로켓배송’을 무기로 한 쿠팡이 유통시장을 서서히 잠식하던 시기, 오프라인 유통강자로서 e커머스를 강화하기 위해 내린 결단이었다. 이베이코리아는 쿠팡 대비 오랜 업력을 바탕으로 2005년부터 2020년까지 16년 연속 흑자를 냈다. 2017년에는 e커머스 업계 최초로 멤버십 제도(스마일클럽)을 선보이면서 2000만 명에 달하는 회원수를 보유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이마트에 인수된 이후 적자를 거듭하고 있다. 온라인 시장의 코로나19 특수가 끝난 데다 SSG닷컴을 비롯한 기존 이마트의 온오프라인 채널과 제대로 된 시너지를 내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각에선 소비자들이 지갑을 닫으며 유통업계에 불황이 닥친 상태에서 이미 쿠팡과 네이버에 밀리고 있던 지마켓을 너무 비싼 가격에 인수했다는 지적도 나온다. 2021년 이마트는 부동산 호황에 힘입어 본사가 위치한 이마트 성수점과 이마트 가양점 등 ‘알짜 부지’를 매각하며 충분한 ‘실탄’을 보유한 상황이었다. 신세계의 라이벌인 롯데그룹 역시 롯데쇼핑을 앞세워 인수 경쟁에 나서려 했지만 이베이코리아의 몸값이 예상보다 높아지면서 결국 발을 뺐다.
시장에 유동성이 풍부한 시기에 진행된 인수합병 사례는 비슷한 지적을 많이 받는다. 솔리다임 역시 인수 당시부터 “인텔에서 몇 년 동안 내놨지만 안 팔리던 낸드사업부를 SK가 너무 비싸게 샀다”는 말이 나왔다. 알고 보니 ‘효자’, 미래 경쟁력 봐야
그러나 그룹 차원에서 장기적인 전망을 갖고 인수를 추진했던 만큼 성과를 단언하기는 이르다. 삼성전자가 2017년 인수한 하만 인터내셔널(하만)과 LG전자와 ㈜LG가 이듬해 사들인 ZKW는 전장 분야에서 모회사와 본격적인 시너지를 내며 성장세에 들어서고 있다. 지난해 LG전자 BS(전장)부문은 전장사업 진출 10년 만에 연 매출 10조원을 돌파했다. LG전자 전장사업 3대 축 중 하나가 바로 차량용 조명 시스템을 담당하는 ZKW이다.
LG가 1조4000억원에 사들인 ZKW는 2020년부터 코로나19에 따른 완성차 공급 위축의 여파로 매출 감소를 이어갔다. 이 같은 실적 감소를 바탕으로 ZKW는 인력감축과 후미등 개발 등 사업 다변화를 진행하며 체질개선에 성공했다. 그 결과 ZKW는 2022년부터 영업이익을 내기 시작했고 전장업계 후발주자인 LG전자 역시 시장에 안착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
하만 역시 2021년부터 실적 성장을 기록하고 있다. 2022년 8800억원을 기록한 연간 영업이익은 2023년 1조원을 돌파한 것으로 알려졌다. 반도체 불황을 겪고 있는 삼성전자는 하만과 공동개발한 스마트 전장기술을 ‘CES 2024’에 선보이며 전장사업에서 시너지를 본격화하기도 했다. 그중 레디 케어는 심박수 등 운전자 상태를 감지해 상황에 따라 최상의 운전 컨디션을 유지하도록 공조시스템, 음향, 조명 등을 변화시킨다. 하만의 음향 시스템을 이용해 시트좌석에서 음파 진동을 느낄 수 있는 ‘시트 소닉’도 있다.
긴 기다림 끝에 업황이 돌아오며 웃게 된 회사도 있다. 한진그룹은 코로나19 확산이 한창이던 2020년 아시아나항공 인수를 결정했다. 최근 항공업계에 따르면 유럽연합(EU) 집행위원회가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의 기업결합을 승인할 것이 유력하다. 여행수요가 늘며 항공권 가격이 가파르게 오르고 있는 상황에서 아시아나항공 실적은 성장하는 모습이다. 2023년 상반기 매출과 영업이익은 3조5730억원, 3181억원으로 전년 동기 대비 각각 27.8%, 12.4% 늘었다. 오랜 인수 과정이 끝나면 국내 여객 시장을 주도하던 두 대형항공사(FSC)가 독점체제를 확립하며 실적은 더욱 개선될 전망이다.
민보름 기자 brmi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