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든 영국’을 보여주는 네 가지 장면 …얼마나 심각하길래?




영국 경제가 ‘병들어 가고 있다’는 진단이 나온 건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한때 ‘대영제국’으로 불렸던 영국은 2020년 브렉시트와 팬데믹으로 인해 고꾸라지기 시작했다. 2023년 3분기 기준 영국의 국내총생산(GDP)은 팬데믹 이전인 2019년 4분기와 비교해 1.4% 증가한 것으로 나타난다.

GDP가 소폭 성장하긴 했지만 같은 기간 유로존 3%, 미국 7.4%보다 낮다. 독일(0.3% 증가)을 제외하고는 G7 중에서 가장 낮은 성장률을 기록한 국가다. 성장은 멈췄고, 물가는 높아졌으며, 국민들은 고달파졌다. 몇 년째 지속되는 저성장과 점점 더 심화되고 있는 불평등의 악순환은 영국 경제를 점점 더 깊은 위기로 몰아넣고 있는 중이다.

지금 영국의 문제는 ‘병들어 있다’는 그 자체가 아니라, 병들어 있는 현재의 상황에서 ‘회복할 방법’을 찾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역사적으로 영국 경제가 가장 암울했던 때를 꼽으라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시기가 1970년대다.

지금 영국의 경제 상황은 “1970년대보다 암울하다”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심각한 상황의 영국 경제를 네 가지 장면을 통해 살펴봤다.
장면 1.
5가지 공약 실패한 리시 수낵, 점점 높아지는 정권교체 가능성

“영국의 총리로서 저는 영국의 낙관주의, 희망, 자부심을 회복하는 미래를 위해 밤낮으로 일할 것을 약속합니다. 우리의 미래를 위해, 우리 후손들의 미래를 위해 더 나은 미래를 건설할 수 있는 다섯 가지를 우선순위 목표로 이뤄 갈 것입니다.”

2023년 1월 4일 리시 수낵 영국 총리가 스트랫퍼드에서 연설대 앞에 섰다. 수낵 총리는 이날 국민에게 ‘다섯 가지 약속’을 내걸었다.

2024년까지 인플레이션을 절반으로 낮춰 국민들의 생활고를 낮추고 재정적 안정을 제공할 것. 둘째, 경제를 성장시켜 전국적으로 더 나은 보수의 일자리와 기회를 창출할 것. 셋째, 국가부채를 줄여 공공 서비스의 미래를 보장할 수 있도록 할 것. 넷째, NHS(영국 국가의료제도) 대기자 명단이 줄어들고 사람들은 필요한 치료를 더 빨리 받을 수 있도록 할 것. 다섯째, 소형 보트 단속을 위한 새로운 법을 통과시켜 불법 이주민들을 구금하고 신속히 추방할 것 등이었다.

1년여가 지난 지금, 이 약속 가운데 지켜진 것은 인플레이션을 절반으로 줄이겠다는 것뿐이다. 2023년 12월 기준 영국의 CPI(소비자물가지수)는 4%를 기록했다. 인플레이션율이 최고치에 다다랐던 2022년 10월 11.1%와 비교하면 5% 이하로 줄이는 데 성공한 것이다.

지켜내지 못한 약속이 더 많다. 2023년 10월 영국의 GDP 성장률은 0.3% ‘역성장’했다. 가장 최신 지표라 할 수 있는 2023년 11월 기준 영국 GDP 성장률이 0.3%를 기록하긴 했지만, 영국은 팬데믹 이후 0%에 가까운 GDP 성장률을 지속하고 있다.

앞으로도 이와 같은 추세가 지속될 가능성이 높다. 영국 예산책임처(OBR)가 전망한 2024년 GDP 성장률 또한 0.7%에 그친다. ‘성장 엔진’은 멈췄다. 급증한 정부부채도 줄어들지 않고 있다. 영국의 정부부채는 2020년 2조 파운드에서 2023년 2조5400억 파운드로 늘었다.

그 결과 수낵 총리와 보수당에 대한 국민들의 신뢰 또한 바닥으로 떨어지고 있다. 여론조사 기관인 입소스가 최근 진행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보수당 지지율은 27%인 반면, 노동당에 대한 지지율은 49%에 이른다.

오는 5월로 예정돼 있는 영국 지방선거에서 지난 13년간 경제를 잘못 운용한 보수당의 책임을 물을 가능성이 높다는 전망이 제기되고 있다. 수낵 총리의 임기는 2025년 1월까지다. 1년 내에 영국 경제가 회복할 가능성은 매우 낮다. 14년여 만의 영국 정부의 ‘정권교체’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장면 2.
높아지는 생활고에 거리로 뛰쳐나온 국민들, 10년 만의 최대 파업


수치상으로 인플레이션율이 4%까지 떨어졌다고 해도 국민들이 느끼는 ‘생활비 위기(cost of living crisis)’는 여전히 심각하다.

영국은 2022년 9월부터 2023년 3월까지 무려 7개월 동안의 ‘두 자릿수 인플레이션’을 경험했다. 이후 CPI가 떨어졌다고는 하지만 2023년 10월까지도 6.7%의 높은 인플레이션이 지속됐다.

영국 통계청에 따르면 2023년 6월 식품 가격은 17.3% 상승했고, 주택 및 에너지 가격의 상승은 12%에 달했다. 현재 런던의 평균 임대료는 월평균 2000파운드(약 338만원)가 넘는다. 2020년 3월과 비교하면 20% 상승한 수치다.

식품 등의 물가 또한 2021년 초와 비교하면 여전히 25%가량 높다. 1993년부터 2021년까지 영국의 인플레이션율이 5.4%를 넘지 않았던 것을 감안하면 국민들이 체감하는 물가상승은 심각하다.

생활비 위기를 더욱 심화시키는 것은 높은 금리다. 인플레이션을 잡기 위해 영국 중앙은행은 2021년 이후 14번 연속 금리를 인상했다.

국민들의 ‘생활비 위기’가 심화된 상황에서 경기침체에 대한 우려가 높아지자 2023년 9월 금리 동결을 결정하며 현재 5.25%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2008년 이후 최고 수준의 금리다.

높은 금리는 대출을 받은 사람들의 생활을 압박한다. 은행권에서는 약 150만 건의 고정금리 모기지가 2024년 만료될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후 상환액이 증가함에 따라 더 많은 가계의 실질 소득이 줄어들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인플레이션율 2%를 목표로 하고 있는 영국 중앙은행이 향후 금리인하를 결정할 가능성은 매우 낮다. 시장에서는 2025년 마지막 분기에서야 인플레이션율이 2%에 도달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싱크탱크 레졸루션 파운데이션(Resolution Foundation)의 영국 국민 9000여 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2023년 12월)에 따르면 2023년 7월부터 10월 사이에 ‘재정적인 안정성이 더욱 나빠졌다’(38%)고 응답한 비율은 ‘재정상황이 나아졌다’(15%)고 응답한 비율보다 두 배나 높았다.

응답자의 22%가 기본적인 먹거리를 구입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답했다. 이는 팬데믹 이전(8%)과 비교해 세 배나 높아진 수치다. 응답자의 4분의 1에 해당하는 약 25%는 ‘한 달에 10파운드(약 1만7000원)’를 정기적으로 저축할 여유가 없다고 답했다.

빈곤층이 급증하면서 최근 영국의 거리에는 노숙자들에게 무료로 음식을 제공하는 푸드뱅크 등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빈곤 문제가 심화되면서 영국은 현재 유럽 내에서 유일하게 기대수명이 줄어들고 있다는 보고서도 나오고 있다.

‘생활비 위기’가 심화되면서 2023년 2월에는 10년 만의 ‘최대 파업’이 일어나기도 했다. 영국의 교사, 철도 기관사, 공무원 등이 ‘실질임금 인상’을 요구하며 길거리로 나온 것이다. 파업에 참여한 인원만 50만 명이 넘는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파업은 여전히 지속되면서 영국 경제 곳곳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것이다. 교사들의 파업으로 인해 학교가 휴교를 하고, 철도 기관사들의 파업은 물류 등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2024년 1월 현재에도 철도 기관사, NHS 등 병원 의사, 대중교통 버스운전사 등의 파업이 진행 중이지만 여전히 정부는 이들과 협상의 돌파구를 찾지 못하고 있다.
장면 3.
크리스마스에도 ‘지갑 닫은’ 소비자들, 10년 넘게 정체된 ‘실질임금’




영국의 지난해 크리스마스는 어느 때보다 조용했다. 12월 영국의 소비판매는 3.2% 감소했다. 2021년 이후 가장 큰 월매출 하락폭이다.

블랙프라이데이에서 이어진 크리스마스와 박싱데이(크리스마스 이후 재고처리를 위한 할인기간), 새해전야 등을 앞둔 12월은 통상 소매업 매출이 상승하는 경우가 많다.

날씨도 영국 경제를 돕지 않았다. 지난해 7월에는 습한 날씨가 지속되면서 영국의 소매업체들이 큰 타격을 입으며 소매판매가 1.1% 하락했다.

10월에는 폭풍 바벳이 영국을 강타했다. 이로 인해 특히 소매판매가 0.3% 하락했다. 더 중요한 이유는 역시 ‘생활비 위기’로 인해 영국의 소비자들이 지갑을 꽁꽁 걸어 잠그고 있기 때문이다.

영국 소비자들이 지갑을 열기 위해서는 ‘실질임금’이 높아져야 한다. 싱크탱크 레졸루션 파운데이션은 평균 실질소득이 1년 전보다 7% 감소했으며, 소득이 2022년 1월 수준으로 회복되려면 4~5년이 걸릴 것으로 예측했다.

영국 경제는 한 세대에 걸친 침체의 늪에 빠져 있으며 1인당 실질 가계 가처분 소득은 15년 동안 거의 증가하지 않았다. 1948년 이후 영국의 실질 가처분 소득은 30년마다 두 배씩 안정적으로 증가했다.

1978년에는 1948년에 비해 두배 정도 높았고, 금융위기가 닥치기 전인 2008년에는 다시 두 배에 근접했다. 현재는 금융위기 이전으로 돌아갔다. 현재 영국의 평균 실질임금은 18년 전인 2006년과 비교해도 낮다. “역사상 전례가 없는 일”이라는 분석이다.

런던정경대의 조사 결과도 이와 비슷하다. 지난 15년간 영국의 노동생산성 증가율은 다른 선진국들의 절반 이하에 그쳤다. 1972년부터 2007까지 연평균 2% 초반의 추세로 증가했으나 글로벌 금융위기 직후 2010년부터는 이와 같은 추세를 벗어나 0% 중반대로 크게 저하됐다.

그 결과 임금은 정체됐다. 약 900만 명에 달하는 MZ 세대의 근로자들은 평균 임금이 지속적으로 상승하는 시장을 경험해 본 적이 없다.

지난 10년여간 임금은 그대로인데, 세금은 꾸준히 늘었다. 현재 영국 국민들은 소득의 37%가량을 세금으로 내고 있다. 그럼에도 이 세금이 NHS를 비롯해 공공 서비스를 강화하는 데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고 있다고 느끼는 이들은 거의 없는 것으로 나타난다.

영국의 노동생산성이 이처럼 크게 저하된 데는 여러 이유가 지목된다. 우선 지난 10년여간 고용이 증가한 분야는 대부분 ‘저생산성 업종’이었다.

생산성 수준이 상대적으로 높은 제조업이 전체 고용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크게 감소한 반면, 저생산성 서비스 업종들의 고용 비중이 증가했다. 고령화 등으로 인한 ‘노동 공급의 감소’ 또한 주요한 요인으로 분석된다.

현재 영국의 실업률은 4% 수준이다. 수치상으로만 보자면 팬데믹 이전 수준보다 낮다. 하지만 문제는 ‘아파서 경제활동을 하지 않는 인구’가 적지 않다는 점이다.

런던정경대가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영국 내에서 ‘아파서 경제활동을 하지 않는 인구’는 260만 명 정도다. 웨일스 전체 성인 인구보다도 많은 숫자다. 2020년 1분기 이후 47만6000명이 증가한 기록적인 수치다. 다른 선진국에서는 이런 현상이 나타나지 않고 있다.

2021년 기준 유럽 내 프랑스, 독일 등 선진국들의 경우 비경제활동 인구 비율이 하락했다. 영국만 이 비율이 계속 상승 중이다. 수낵 총리가 2023년 초 내걸었던 다섯 가지 공약 중에 NHS가 등장하는 배경이다.

NHS 병원 진료를 예약한 대기자들의 명단이 길어지면서 ‘치료 지연’이 장기 질병의 증가를 일으키는 요인으로 지목된 것이다. 하지만 NHS 장기 대기자 명단 중 절반 이상은 노동 연령이 아닌 것으로 나타난다.
장면 4.
브렉시트와 전쟁, 줄어든 민간 투자 그리고 높아진 무역장벽

영국 정부는 경기부양을 위해 지난해 11월 연간 150억 파운드(약 25조원) 규모의 법인세를 감면해주겠다고 발표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영국 역사상 최대 규모의 기업 대상 감세 조치다. 이와 함께 유망한 스타트업들이 유니콘 기업으로 성장하는 데 필요한 자금유치를 지원하는 조치도 발표했다.

영국 경제 위기의 시작은 ‘브렉시트’였다. 케임브리지 이코노메트릭스가 지난 1월 11일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브렉시트 이후 런던에서만 총 29만 개의 일자리가 감소한 것으로 나타난다.

영국 전역에서는 총 200만 개의 일자리가 감소했는데 그중 절반이 금융 서비스 및 건설 부문이었다. 무엇보다 브렉시트로 인해 영국 경제가 손해를 본 금액만 2035년까지 600억 파운드에 달할 것이라는 분석이다.

샤몰리 파텔 케임브리지 이코노메트릭스 수석이코노미스트는 “브렉시트가 아니었다면 런던과 영국의 경제는 지금보다 빠르게 성장했을 것”이라며 “무엇보다 민간 부문의 투자가 줄어드는 등 부정적인 영향이 컸다”고 분석했다.

실제 영국의 기업 투자는 2011년부터 2016년까지 연간 약 6%씩(분기당 1.5%) 증가했지만, 브렉시트 국민투표가 실시된 2016년 중반 이후부터 기업 투자 증가율이 급격히 하락한 것으로 관찰된다.

특히 눈에 띄는 것은 2016년 이후 영국은 모든 산업군에서 기업 투자 증가율이 G7의 다른 국가들보다 낮다는 점이다. 특히 운송, ICT 서비스, 금융, 전문 및 행정 서비스 등의 분야에서 투자 증가율이 크게 낮아진 것으로 나타난다.

브렉시트 이후 무역장벽이 더욱 높아져 수입 비용이 증가하고 노동시장의 경직성이 높아진 상황에서, 대규모 민간 투자가 일어나기 쉽지 않은 환경이 됐다는 지적이다.

브렉시트의 영향이 지속되는 상황에서 전쟁으로 인해 글로벌 수요 약세까지 더해지며 지난해 수입과 수출이 모두 크게 감소하는 등 무역 부문에서도 타격을 받고 있다.

지난해 영국의 수입은 4.7% 감소했으며 수출도 4.3% 감소한 것으로 나타난다. 특히 유럽연합(EU) 국경에서의 추가적인 규제 변화도 무역 흐름에 부담을 줄 수 있는 요소다.

최근에는 하마스 전쟁의 여파로 홍해에서 무력 충돌이 잦아지며 유럽과 아시아의 물류 수급에 차질을 빚고 있는데, 특히 영국이 큰 타격을 받고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영국의 대표적인 석유 기업 셸은 지난 1월 홍해의 잦은 무력 충돌로 인해 홍해로의 선박 운항 중단을 결정한 상태이며, 또 다른 영국의 석유 기업인 BP 또한 같은 이유로 지난해 12월 홍해 운항을 일시 중단한 바 있다.

지난해 11월 영국 정부가 발표한 ‘역사상 최대 규모의 법인세 감면 정책’은 이와 같은 상황에서 영국 내 기업들의 투자를 늘리고, 시장을 활성화하기 위한 과감한 ‘승부수’인 셈이다.

영국 경제의 회복을 위해서는 기업의 투자가 늘어나야 한다는 판단이다. 영국 정부는 특히 “영국을 세계에서 가장 기업하기 좋은 나라”로 만들겠다는 목표를 앞세우며, 주요 선진국들로 구성된 OECD 그룹에서 ‘가장 낮은 법인세율’을 강조했다.

그럼에도 이미 병이 깊어질 대로 깊어진 영국 경제가 대규모 감세 정책만으로 다시 활력을 찾을 수 있을 것인지 회의적인 시선들이 적지 않다.



런던=이정흔 객원기자 luna.jhlee@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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