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한 루비 컬러와 부드럽고 둥근 느낌의 메를로 와인[김동식의 와인 랩소디]

김동식의 와인 랩소디 <13회>

프랑스 보르도 생떼밀리옹 '샤또 투어 그랑 포리2015'.

얼마 전 국방분야 고위 관료를 지낸 지인 한 분과 점심 식사를 함께했다. 평소 과묵하고 신중한 성격의 그가 호들갑을 떨며 핸드폰 속 사진 두 장을 보여줬다. 모 그룹 회장이 초청한 만찬 자리에서 마신 와인이라는 것.

느낌이 너무 좋아 ‘한 병 더 마시자’고 요청했는데 주인장은 잠시 망설이다가 다른 와인을 가져왔다고. 내로라하는 대기업 회장도 선뜻 내놓지 못한 그 와인의 이름은 과연 뭘까. 그는 무척 궁금해했다.

흐릿한 사진을 보고도 단박에 알 수 있었다. 빈티지별로 차이는 좀 있지만 한 병당 평균 가격이 800만원 정도인 ‘샤토 페트뤼스2005’. 메를로 100%로 만들어진 와인이다.

예수의 첫 번째 제자 성 베드로(그리스어 페트로스에서 유래)의 얼굴이 병 전면에 박혀 있다. 두 번째 사진은 보르도 5대 와인 중 하나인 ‘샤토 마고’였다.

이 메를로는 과연 어떤 품종일까. 프랑스 보르도 우안이 고향으로, 카베르네 프랑과 마그들렌 데 샤랑트의 접합종이며 수확 시기는 카베르네 소비뇽보다 2주쯤 빠르다.

수분이 잘 유지되는 점토질 토양이면 세상 어느 곳에서나 재배 가능하다. 실제 미국이나 칠레, 뉴질랜드, 남아공의 메를로 와인은 품질 좋기로 유명하다. 이들 지역의 온화하고 따뜻한 날씨 덕분이다.

껍질이 얇고 과즙이 풍부한 메를로 와인의 가장 큰 특징은 부드럽고 섬세한 과일 향. 타닌감이 적어 초보자도 마시기 편한 와인이다. 숙성 기간도 짧은 편으로, 소주파가 아닌 한 메를로 와인을 선택하면 실패가 없다.

프렌치 파인다이닝 '르꼬숑' 김보아 본부장이 율곡로를 배경으로 포즈를 취하고 있다.-


한편 서울 종로에 위치한 정통 프렌치 레스토랑 ‘르꼬숑’의 김보아 본부장은 “메를로는 진한 루비 컬러가 매력”이라며 “전체적으로 부드럽고 둥근 느낌을 주는 와인”이라고 말했다.

김 본부장이 추천한 메를로 와인은 ‘샤토 투르 그랑 포리(Chateau Tour Grand Faurie)’, 프랑스 보르도 생테밀리옹에서 생산된 와인이다. 대부분 메를로 100%를 사용해 양조하지만 시음주로 나온 2015 빈티지는 메를로 90%, 카베르네 프랑 10%를 블렌딩했다.

테이스팅을 시작하자마자 부드러운 미네랄 향이 밀려왔다. 보관 온도가 좀 낮았으나 검은 자두와 블루베리 향이 즉시 잡혔다. 이어 시간이 지나고 온도가 조금 올라가니 가죽, 삼나무 등 기분 좋은 숙성향이 나타났다. 메를로가 주는 또 다른 매력이다.

대학에서 심리학을 전공했다는 김 본부장이 가장 좋아하는 와인 스타일은 사실 피노 누아다. 몇 해 전 미국 나파밸리 와이너리 투어에 참가했다가 와인의 매력에 빠졌다는 것.

그런데 굳이 메를로 와인을 추천한 이유를 묻자 “맛이 까칠하고 가격이 비싼 피노 누아와 달리 메를로는 가격 대비 품질이 매우 우수한 편”이라며 “늘 바쁜 도심 일상 속 지치고 힘들 때면 언제나 메를로 향 가득한 르꼬숑으로 오시라”고 본업에 충실한 멘트를 덧붙였다.

사실이다. 창덕궁 멋진 경관을 내 집처럼 내려다 볼 수 있는 르꼬숑은 편안하면서도 고급스러운 분위기를 연출한다. 특히 양쪽 벽면이 통유리 창으로, 조선왕조 정취가 가득 담긴 구중궁궐 곡선 풍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겨울철 나목 사이로 펼쳐진 멋진 한옥 외에는 빌딩 등 다른 흔적이 전혀 보이지 않아 ‘서울 도심 속’이라는 현실을 망각할 정도. 해 질 녘이면 귀가를 서두르는 직장인들의 종종걸음에 율곡로 야경이 애잔하다.

주요 메뉴는 점심과 저녁 각각 3종류 코스로 구성됐다. 디너 B코스의 경우 모두 13가지 요리가 나온다. 하나하나 셰프의 정성과 숨은 뜻이 담긴 독특한 작품들이다. 메인은 양고기 또는 소고기. 메를로와 잘 어울리는 마리아주다. 3~5잔 와인 페어링 선택도 가능하단다.

지하철 3호선 안국역에서 도보로 5분 거리. 현대빌딩 옆, 아라리오 뮤지엄 인 스페이스 건물 3층에 위치, 주차장도 넓어 편하다.

김동식 와인 칼럼니스트
juju4333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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