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 취업'보다 의대…초등 학부모는 지방 유학 준비[의대증원, 남은 숙제③]
입력 2024-02-19 07:30:01
수정 2024-02-19 07:30:01
[스페셜 리포트 : 의대증원, 남은 숙제]
의대 정원 2000명 확대 방침은 의료업계뿐 아니라 학원가와 대학가를 흔들고 있다. 의대로 가는 티켓을 확보하기 위해 공대생들은 대거 이탈할 조짐을 보이고 있고, 학원에서는 새로운 입시 전략 마련에 들어갔다.
우려도 나온다. 인재를 빨아들이는 블랙홀인 의대가 더 많은 인재를 흡수하면 다른 분야의 경쟁력이 약화되는 것 아니냐는 지적이다. 균형의 파괴가 가져올 여파는 현재로서는 짐작하기 어렵다. 정부 방침이 바꿔놓은 학원가와 대학가 얘기를 들어봤다.
“이공계 SKY(서울대·연세대·고려대)라면 대부분 반수나 군수(군대에서 재수), N수를 준비할 거예요. ‘의대 증원 2000명’ 문이 닫히기 전에 들어가야 하니까요.”
연세대 공과대학에 재학생 중인 A 씨는 군대에서 다시 수능에 도전한다. A 씨는 군대에 가기 전부터 의대 준비를 했다. 증원 소식이 들린 후 부대 내에서도 다시 의대를 준비하겠다는 부대원이 많아졌다고 전했다. 이들은 일과를 마치고 휴대전화나 태블릿을 사용해 인터넷 강의를 듣고, 문제를 풀며 공부에 집중하고 있다.
의대가 성공으로 가는 가장 안전한 보증수표란 인식이 확산되며 성적 최상위권 수험생뿐만 아니라 이미 대학에 합격하거나 졸업한 인재들까지 빨아들이고 있다. 학원가에서는 의대 증원이 시작되는 2025년부터 대입 제도 개편이 예고된 2028년 전까지 N수생 행렬이 이어질 것으로 보고 있다.
종로학원에 따르면 정부가 의대 정원을 2000명 늘리면 현재 SKY 합격생의 78.5%가 의대 진학 가능권에 속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현재 SKY 신입생 10명 중 8명은 의대에 지원해도 합격할 수 있다는 뜻이다.
대치동에서 11년째 영어를 가르치고 있는 주모 씨는 “의료 현장 상황이나 의사 추계에 따라 증원 인원을 재조정하겠다고 정부가 발표한 상황이라 다들 2027년까지는 승부를 보자는 마음인 것 같다”고 전했다. 삼성전자 ‘프리패스’ 포기하고 의대 간다
이미 새학기부터 신입·재학생의 중도 이탈이 급증하고 있다. 삼성전자 등 대기업 취업이 보장된 서울 상위권 대학 계약학과에 합격하고도 등록을 포기한 이들이 지난해보다 크게 늘어난 것으로 나타났다. 학원가에서는 이들이 다른 대학의 의대나 치대, 약대에 합격했거나 다시 수능에 도전해 의대에 가기 위해 진학을 포기한 것으로 분석했다.
종로학원에 따르면 올해 대입 정시 모집에서 연세대 시스템반도체공학과 최초합격자 25명 중 23명(92%)이 이 학과에 등록하지 않았다. 연세대 시스템반도체공학과는 졸업 뒤 삼성전자 취업이 보장되는 계약학과지만 외면받은 셈이다.
고려대 계약학과 상황도 비슷하다. 삼성전자 취업이 보장된 차세대통신학과의 경우 정시 최초합격자 10명 중 7명(70%)이 등록을 포기했다. 지난해 미등록 비율 16.7%보다 4배가량 늘었다. 현대자동차 계약학과인 스마트모빌리티학부도 정시 최초합격자 20명 중 13명(65%)이 등록하지 않았다. SK하이닉스 계약학과인 반도체공학과 정시 최초합격자 미등록 비율은 50%였다.
다만 대학 전체 정시 최초합격자 미등록 비율은 지난해와 큰 차이가 없는 것으로 보아 이공계 상위권 학생들이 의과대학에 동시에 합격한 것으로 추정된다.
물론 다른 쪽에서는 의대 정원이 확대돼 의사의 희소성이 떨어지면 의대 과열 양상이 줄어들 것이라는 예측도 나온다. 하지만 교육현장에서는 오히려 과열 양상이 가중되고 있다. 정부가 비수도권 대학 중심의 의대 증원을 예고한 데 따라 비수도권 지역 학원가도 크게 반응하는 분위기다.
임성호 종로학원 대표는 “의대 선호 현상은 일단은 심화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며 “초·중등 자녀를 가진 학부모들이 의대 지역인재전형을 노리기 위해 지방으로 이사까지 결심하고 있다”고 말했다. 학원가 “중하위권 학생 ‘퀀텀점프’ 준비할 기회”
의대 준비반만 떠들썩해진 건 아니다. 최상위권 학생들이 모두 전국 의대로 빠져나가면 중하위권 학생들도 인서울 빈자리를 노릴 수 있게 됐다.
영어강사 주모 씨는 “의대 정원이 늘면 모두에게 기회”라며 “최상위권 학생들이 모두 의대로 빠지면 반에서 20등 하던 학생들도 정시로 인서울에 도전할 수 있는 희망이 생기면서 최상위권뿐만 아니라 전반적인 상담 문의가 늘었다”고 전했다.
수험생뿐 아니라 대학가에서도 공대생들이 술렁이고 있다. 중앙대 에너지시스템 공학부에 재학 중인 윤영섭 씨는 “좋은 대학의 공대생들이 모두 의대로 빠지면서 이공계 학생들도 더 좋은 학교, 좋은 과로 갈 수 있는 진입장벽이 낮아졌다”며 “중위권 대학이나 지방 공대에서 서울권 학교로의 재입학이 증가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인재 대이동’은 수험생이나 대학생만의 일이 아니다. 의사 커뮤니티에서는 매년 2000명의 경쟁자가 생기기 전 ‘피안성 정재영’(피부과·안과·성형외과·정형외과·정신건강의학과·재활의학과·영상의학과)’ 개원을 서둘러야 하는 것 아니냐는 의견이 나오고 있다.
경기도 사립대학병원 소속 소아청소년과 전문의는 “봉직의(페이닥터)로 일하던 기피학과 전문의들마저 개원의 경쟁이 심화되기 전에 병원을 차려야 하는 것 아니냐는 얘기가 나오고 있다”며 “내년부터 증원되는 인원이 졸업하기까지 7년의 공백이 생기는데 그 전에 일반의로 미용 중심 의원이나 수액 요법 등 실비 중심 의원을 개원해 파이를 챙겨야 하는 것 아니냐는 분위기다”고 전했다.
전문가들은 의대 정원을 늘리면 다른 산업의 경쟁력이 흔들릴 수 있다고 우려한다. 특히 정부가 올해 연구개발(R&D) 예산을 약 15%(4조6000억원) 삭감하고 정부 출연 고유사업비를 5~25%가량 줄이면서 연구자와 비정규직 학생연구원들이 직격탄을 맞은 상황에서 의대 증원 카드를 꺼내든 만큼 이공계 인재들의 허탈감은 커질 수밖에 없다.
부처별로 진행하던 R&D 과제마저 개별 연구자에게 구체적인 설명 없이 25~85% 삭감을 통보하기 시작하면서 현장에서 우려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성원용 서울대 전기·정보공학부 명예교수는 “인구가 줄면서 1000명당 의사 숫자는 2040년이면 저절로 달성되는데 다른 산업은 그동안 누적된 의대 쏠림 현상으로 인재 부족에 시달리고 있다”며 “반도체와 2차전지 등 미래 유망산업 경쟁의 핵심은 결국 인재인데 의대 증원으로 산업 경쟁력의 근간이 흔들릴 수 있다”고 설명했다.
김영은 기자 kye0218@hankyung.com
의대 정원 2000명 확대 방침은 의료업계뿐 아니라 학원가와 대학가를 흔들고 있다. 의대로 가는 티켓을 확보하기 위해 공대생들은 대거 이탈할 조짐을 보이고 있고, 학원에서는 새로운 입시 전략 마련에 들어갔다.
우려도 나온다. 인재를 빨아들이는 블랙홀인 의대가 더 많은 인재를 흡수하면 다른 분야의 경쟁력이 약화되는 것 아니냐는 지적이다. 균형의 파괴가 가져올 여파는 현재로서는 짐작하기 어렵다. 정부 방침이 바꿔놓은 학원가와 대학가 얘기를 들어봤다.
“이공계 SKY(서울대·연세대·고려대)라면 대부분 반수나 군수(군대에서 재수), N수를 준비할 거예요. ‘의대 증원 2000명’ 문이 닫히기 전에 들어가야 하니까요.”
연세대 공과대학에 재학생 중인 A 씨는 군대에서 다시 수능에 도전한다. A 씨는 군대에 가기 전부터 의대 준비를 했다. 증원 소식이 들린 후 부대 내에서도 다시 의대를 준비하겠다는 부대원이 많아졌다고 전했다. 이들은 일과를 마치고 휴대전화나 태블릿을 사용해 인터넷 강의를 듣고, 문제를 풀며 공부에 집중하고 있다.
의대가 성공으로 가는 가장 안전한 보증수표란 인식이 확산되며 성적 최상위권 수험생뿐만 아니라 이미 대학에 합격하거나 졸업한 인재들까지 빨아들이고 있다. 학원가에서는 의대 증원이 시작되는 2025년부터 대입 제도 개편이 예고된 2028년 전까지 N수생 행렬이 이어질 것으로 보고 있다.
종로학원에 따르면 정부가 의대 정원을 2000명 늘리면 현재 SKY 합격생의 78.5%가 의대 진학 가능권에 속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현재 SKY 신입생 10명 중 8명은 의대에 지원해도 합격할 수 있다는 뜻이다.
대치동에서 11년째 영어를 가르치고 있는 주모 씨는 “의료 현장 상황이나 의사 추계에 따라 증원 인원을 재조정하겠다고 정부가 발표한 상황이라 다들 2027년까지는 승부를 보자는 마음인 것 같다”고 전했다. 삼성전자 ‘프리패스’ 포기하고 의대 간다
이미 새학기부터 신입·재학생의 중도 이탈이 급증하고 있다. 삼성전자 등 대기업 취업이 보장된 서울 상위권 대학 계약학과에 합격하고도 등록을 포기한 이들이 지난해보다 크게 늘어난 것으로 나타났다. 학원가에서는 이들이 다른 대학의 의대나 치대, 약대에 합격했거나 다시 수능에 도전해 의대에 가기 위해 진학을 포기한 것으로 분석했다.
종로학원에 따르면 올해 대입 정시 모집에서 연세대 시스템반도체공학과 최초합격자 25명 중 23명(92%)이 이 학과에 등록하지 않았다. 연세대 시스템반도체공학과는 졸업 뒤 삼성전자 취업이 보장되는 계약학과지만 외면받은 셈이다.
고려대 계약학과 상황도 비슷하다. 삼성전자 취업이 보장된 차세대통신학과의 경우 정시 최초합격자 10명 중 7명(70%)이 등록을 포기했다. 지난해 미등록 비율 16.7%보다 4배가량 늘었다. 현대자동차 계약학과인 스마트모빌리티학부도 정시 최초합격자 20명 중 13명(65%)이 등록하지 않았다. SK하이닉스 계약학과인 반도체공학과 정시 최초합격자 미등록 비율은 50%였다.
다만 대학 전체 정시 최초합격자 미등록 비율은 지난해와 큰 차이가 없는 것으로 보아 이공계 상위권 학생들이 의과대학에 동시에 합격한 것으로 추정된다.
물론 다른 쪽에서는 의대 정원이 확대돼 의사의 희소성이 떨어지면 의대 과열 양상이 줄어들 것이라는 예측도 나온다. 하지만 교육현장에서는 오히려 과열 양상이 가중되고 있다. 정부가 비수도권 대학 중심의 의대 증원을 예고한 데 따라 비수도권 지역 학원가도 크게 반응하는 분위기다.
임성호 종로학원 대표는 “의대 선호 현상은 일단은 심화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며 “초·중등 자녀를 가진 학부모들이 의대 지역인재전형을 노리기 위해 지방으로 이사까지 결심하고 있다”고 말했다. 학원가 “중하위권 학생 ‘퀀텀점프’ 준비할 기회”
의대 준비반만 떠들썩해진 건 아니다. 최상위권 학생들이 모두 전국 의대로 빠져나가면 중하위권 학생들도 인서울 빈자리를 노릴 수 있게 됐다.
영어강사 주모 씨는 “의대 정원이 늘면 모두에게 기회”라며 “최상위권 학생들이 모두 의대로 빠지면 반에서 20등 하던 학생들도 정시로 인서울에 도전할 수 있는 희망이 생기면서 최상위권뿐만 아니라 전반적인 상담 문의가 늘었다”고 전했다.
수험생뿐 아니라 대학가에서도 공대생들이 술렁이고 있다. 중앙대 에너지시스템 공학부에 재학 중인 윤영섭 씨는 “좋은 대학의 공대생들이 모두 의대로 빠지면서 이공계 학생들도 더 좋은 학교, 좋은 과로 갈 수 있는 진입장벽이 낮아졌다”며 “중위권 대학이나 지방 공대에서 서울권 학교로의 재입학이 증가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인재 대이동’은 수험생이나 대학생만의 일이 아니다. 의사 커뮤니티에서는 매년 2000명의 경쟁자가 생기기 전 ‘피안성 정재영’(피부과·안과·성형외과·정형외과·정신건강의학과·재활의학과·영상의학과)’ 개원을 서둘러야 하는 것 아니냐는 의견이 나오고 있다.
경기도 사립대학병원 소속 소아청소년과 전문의는 “봉직의(페이닥터)로 일하던 기피학과 전문의들마저 개원의 경쟁이 심화되기 전에 병원을 차려야 하는 것 아니냐는 얘기가 나오고 있다”며 “내년부터 증원되는 인원이 졸업하기까지 7년의 공백이 생기는데 그 전에 일반의로 미용 중심 의원이나 수액 요법 등 실비 중심 의원을 개원해 파이를 챙겨야 하는 것 아니냐는 분위기다”고 전했다.
전문가들은 의대 정원을 늘리면 다른 산업의 경쟁력이 흔들릴 수 있다고 우려한다. 특히 정부가 올해 연구개발(R&D) 예산을 약 15%(4조6000억원) 삭감하고 정부 출연 고유사업비를 5~25%가량 줄이면서 연구자와 비정규직 학생연구원들이 직격탄을 맞은 상황에서 의대 증원 카드를 꺼내든 만큼 이공계 인재들의 허탈감은 커질 수밖에 없다.
부처별로 진행하던 R&D 과제마저 개별 연구자에게 구체적인 설명 없이 25~85% 삭감을 통보하기 시작하면서 현장에서 우려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성원용 서울대 전기·정보공학부 명예교수는 “인구가 줄면서 1000명당 의사 숫자는 2040년이면 저절로 달성되는데 다른 산업은 그동안 누적된 의대 쏠림 현상으로 인재 부족에 시달리고 있다”며 “반도체와 2차전지 등 미래 유망산업 경쟁의 핵심은 결국 인재인데 의대 증원으로 산업 경쟁력의 근간이 흔들릴 수 있다”고 설명했다.
김영은 기자 kye0218@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