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대 정원 확대, 총선용이라는 지적을 피하는 방법[EDITOR's LETTER]

[EDITOR's LETTER]

10여 년 전 장인어른 장례를 치렀습니다. 비가 억수로 퍼붓던 7월. 빈소를 차리기 시작한 순간부터 슬퍼할 시간조차 없었습니다. 병원에 도착하자 쉴 틈도 주지 않고 차례로 종이 한 장씩을 들고 왔습니다. 돈 내는 데 동의하라는 사인이었습니다.

많은 분들의 도움으로 무사히 장례를 치렀습니다. 마지막 날 비용을 치르고 영수증 비슷한 걸 이면지로 받았습니다. 뒷면을 보니 장례비용을 치르지 못해 시신을 가져가지 못한 상주에게 보내는 독촉장 비슷한 게 담겨 있었습니다.

서글픈 느낌이 들었습니다. ‘세상과 이별하는 것도 돈이 없으면 쉽지 않구나.’ 건강보험이 그렇게 잘돼 있다는 나라지만 죽는 것은 쉽지 않구나 싶기도 했습니다.

한국 의료의 아이러니 또는 모순을 들여다보면 이는 극히 일부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코로나19 때 한국의 의료진과 건강보험을 비롯한 의료체계는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힘을 발휘했습니다. 사망률은 세계에서 가장 낮았습니다. 코로나19를 가장 잘 극복한 나라라는 찬사도 받았습니다.

하지만 이것도 잠시 한국의 의료제도는 당장 수술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애물단지가 되고 말았습니다. 의대 정원을 한번에 60% 이상 늘리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으로 돌변한 거지요. 말 그대로 반전입니다.

한국 의료와 관련된 숫자를 들여다보면 더 신기합니다. 세계 주요 선진국 가운데 국민 1000명당 의사 수는 가장 적습니다. 하지만 국민 한 명이 진료를 받는 횟수는 가장 많습니다. 또 의사 수가 적지만 기대수명은 세계 최고 수준이며 백내장, 관절 등 수술은 세계에서 가장 빨리 받을 수 있습니다.

의사는 극한의 노동과 적절하지 못한 처우에 시달린다고 하지만 가장 똑똑한 인재들은 수십 년간 의대로 몰리고 있습니다. 그 노동에서 벗어나게 해주겠다며 의대 정원을 늘리려고 하면 머리띠를 두르고 거리로 나오는 것도 아이러니입니다.

이뿐만 아닙니다. 공공의료가 차지하는 비중은 의료를 시장에 맡기다시피 한 미국보다 낮습니다. 하지만 가장 낮은 의료비로 병원을 갈 수 있습니다. 건강보험 재정을 걱정하지만 정작 정부가 내야할 건강보험에 대한 법정지원금을 내지 않아도 크게 반발이 없는 것도 참 이상한 일입니다.

이런 모순 투성이 시스템이 여기까지 온 것은 기적에 가까운 일이라는 말에 일정 부분 동의합니다. 하지만 최근 문제가 되고 있는 사건들은 이 시스템을 손보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처했음을 보여줍니다. 산부인과·소아과·흉부외과 의사 부족, 의사가 없는 지역이 많아지는 문제 등이 그것입니다.

정부가 돈이 없던 1977년 건강보험을 시작했습니다. 민간으로부터 의사도 빌리고 병원도 빌려서 시작한 것입니다. 1989년 전 국민 건강보험 체계가 완성됐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민간 병원과 의사들에게 전적으로 의지하다시피 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용케 버텨왔지만 고령화와 인구감소란 두 개의 파도를 동시에 감당해내기에는 역부족이라는 의견이 곳곳에서 나옵니다.

정부는 대안으로 의대생 연 2000명 증원을 들고 나왔습니다. 물꼬를 튼다는 면에서 박수받을 일입니다. 하지만 급작스러웠습니다. 규모도 현재의 인프라가 감당할 수 있을지 의문이 나올 정도로 파격적이었습니다. 의사단체와 협의도 충분치 않았고, 총선용이라는 비판도 있습니다. 더 중요한 것도 빠져 있습니다. 공공의 역할은 별로 없고, 민간으로부터 병원과 의사를 빌려쓰는 1977년 체제를 어떻게 바꿀지에 대한 마스터 플랜은 보이지 않습니다. “의사들을 쥐어짜 의료 시스템을 유지하고 있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갖는 대목입니다. 전략의 부재를 암시합니다.

의대 증원에 반대하는 목소리도 만만치 않습니다. 그 논리를 들여다보면 나름 설득력이 있습니다. 의사 수를 늘려도 필수의료와 지방의료는 확대되기 힘들고, 정부가 말하는 흘러넘쳐 지방으로 간다는 논리는 낮은 수준의 의료를 지방 사람들이 받으라는 말과 비슷하게 들립니다.

이 갈등과 논란을 파괴적으로 끝내는 것이 아니라 의대 정원을 늘리는 과정에서 이를 수용해 제도를 개선하는 데 활용하는 것이 전략의 부재라는 비판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아닐까 합니다. 한경비즈니스가 이번 주 의대 정원 확대 문제를 다룬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그럼에도 아쉬움이 남습니다. 의료인, 수험생과 그 부모들, 나아가 전 국민에게 큰 영향을 미칠 결정을 치밀한 준비 없이 했다는 점에서 말입니다. 국가 전략의 부재가 가져올 부작용은 현 정부뿐 아니라 두고두고 한국 사회가 감당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김용준 한경비즈니스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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