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모리에 치중된 사업구조, 높은 이익률 기대 어려워
HBM 경쟁력은 하이닉스에 밀려
3위 마이크론, 마저 반격
인텔의 파운드리 도발, "올 1분기부터 2위 하겠다"
기업 하나가 전 세계 증시를 뒤집어놨다. AI 시대의 반도체 룰을 정하는 엔비디아가 그 주인공이다. 그래픽 저장장치(GPU)를 사실상 독점하는 엔비디아는 절대권력이 됐다.
전성기 인텔 정도를 제외하면 컴퓨터 중앙처리장치(CPU)나 스마트폰의 두뇌인 애플리케이션프로세서(AP) 설계 기업은 이 정도의 지위를 가졌던 적이 없다.
엔비디아의 실적 발표 한 방에 미국, 일본, 유럽 증시가 모두 고점을 찍었다. 한국은 왜 글로벌 반도체 랠리에서 소외됐을까. 31년간 이어진 삼성전자의 메모리 장기집권이 그 힌트를 제공해준다.
메모리의 법칙이 바뀌었다한국은 반도체의 두뇌(프로세서)를 가져본 적은 없다. CPU는 인텔이, AP는 퀄컴이, GPU는 엔비디아가 주도했다. 한국은 30년간 D램과 낸드플래시가 양분하는 메모리 반도체 시장을 점령했고 삼성전자는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까지 영역을 넓히며 시스템 반도체 ‘생산 주권’을 겨우 지켰다.
한국을 지탱해온 이 산업구조가 이번 랠리에서는 악재로 작용했다. 막대한 설비투자를 통해 생산규모를 확보하고 원가 경쟁력을 앞세워야 하는 메모리 반도체는 가격 급등락이 심하다. 반도체 설계만 하는 미국 기업이나 파운드리 기술력을 앞세워 수요를 빨아들이는 TSMC만큼의 높은 영업이익률을 기대할 수 없다.
지난해 엔비디아의 영업이익률은 58%였다. 한창 때 애플보다 높았다. 4분기만 놓고 보면 영업이익률이 66.7%에 달한다. 시스템 반도체 제조를 담당하는 TSMC 역시 지난해 42.6%의 영업이익률을 기록했다.
이종환 상명대 시스템반도체학과 교수는 “한국 기업은 메모리 반도체 실적이 너무 안 좋았고 비메모리 사업에서도 TSMC만큼의 경쟁력이 없는 상황에서 미래 기술에 대한 압도적 우위도 갖지 못했기 때문에 투자 매력이 계속 줄고 있는 것은 사실”이라고 말했다.
예전처럼 메모리 슈퍼사이클만 기다릴 수도 없는 상황이다. AI 시대가 도래하자 이 판에 지각변동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AI에 특화한 대용량 D램인 고대역폭메모리(HBM)가 전면에 등장했고 일찌감치 개발에 나선 SK하이닉스가 삼성전자를 제치고 이 시장 1위에 올랐다. 삼성전자는 갑자기 추격자 처지가 됐다.
뒤바뀐 상황은 점유율에서도 그대로 나타난다. 시장조사업체 트렌드포스는 지난해 글로벌 HBM 시장점유율을 SK하이닉스 53%로 추정했다. 삼성전자가 38%, 마이크론이 9%로 뒤를 이었다. 실적에서도 희비가 갈렸다. 지난해 4분기 SK하이닉스는 영업이익 3460억원을 내며 삼성전자보다 먼저 흑자전환했다. ‘3위’의 반란…‘HBM 절대강자’ 아직 없다HBM은 여러 개의 D램을 수직으로 쌓아 데이터 처리 속도와 용량을 극대화한 제품이다. 일반 D램보다 한꺼번에 더 많은 데이터를 더 빠르게 처리할 수 있다.
범용으로 쓰이는 일반 D램과 달리 고객의 요구사항을 적극 반영해야 한다. 기판 위에 연산을 수행하는 AI GPU와 메모리인 HBM이 한 몸처럼 묶여 있기 때문이다.
GPU가 수행하는 연산의 양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면서 빠르게 이를 보조해주는 전담 메모리 역할을 한다. 그만큼 복잡한 설계 기술과 패키징, 적층 기술을 필요로 한다.
SK하이닉스는 2013년 세계 최초로 HBM 개발에 성공하며 지금까지 성능을 끌어올렸다. 2021년 HBM3(4세대)를 개발한 데 이어 작년에는 12단 HBM3 개발에 성공했다. 모두 세계 최초였다.
반도체 생산은 달리기와 같다. 먼저 출발하면 그만큼 유리하다. 생산 과정에서 계속 문제점을 보완하기 때문에 생산을 늘릴수록 수율도 올라간다.
SK하이닉스는 엔비디아에 HBM3를 공급하고 있다. 지난달에는 현존 최고 사양인 HBM3E(5세대) 개발을 공식 종료했다. 3월에는 8단 HBM3E 생산에 착수해 엔비디아에 납품할 예정이다.
이런 상황에서 만년 3위였던 미국 마이크론테크놀로지가 승부수를 던졌다. 점유율이 미미하던 마이크론이 현재 시장의 주류인 4세대 HBM을 아예 건너뛰고 5세대로 직행한 것은 충격이었다.
‘HBM3E’ 개발은 SK하이닉스가 빨랐는데, 양산은 마이크론이 앞섰다. 마이크론은 지난 2월 26일 D램을 여덟 층으로 쌓은 ‘8단 적층 HBM3E’ 대량 생산을 시작했다고 발표했다.
삼성과 SK의 HBM3보다 전력 소비가 30% 적다고 마이크론은 밝혔다. 양산 소식보다 충격적인 건 고객사 이름이었다. 엔비디아가 이 제품을 납품받기로 했다.
올 2분기 나오는 엔비디아의 차세대 AI 가속기(대규모 데이터 학습·추론에 특화한 반도체 패키지) ‘H200’에 차세대 HBM이 들어간다고 마이크론이 직접 밝혔다. 까다로운 엔비디아의 성능 테스트를 통과했다는 건 기술력 측면에서도 인정받았다는 얘기다.
HBM은 고객의 요구사항을 철저히 반영해야 한다. 아직 시장 우위가 확실하게 정해지지 않은 상황에서 마이크론이 엔비디아와 계속 합을 맞추며 기술력을 끌어올리면 판세는 또 뒤집힐 수 있다.
마이크론의 발표 이후인 2월 27일 SK하이닉스 주가가 4.94%나 빠진 이유가 여기에 있다. 마이크론은 “현재 10% 수준인 HBM 점유율을 내년까지 25%로 끌어올리겠다”고 밝혔다.
시장 변화 대응이 늦었던 삼성전자는 8단 HBM 그 이후를 노리고 있다. 삼성전자가 꺼내든 카드는 12단 HBM이다. 삼성전자는 지난 2월 27일 최초로 8단보다 4개 층을 더 쌓아 올려 처리 속도와 용량을 끌어올린 12단 HBM 제품을 개발하는 데 성공했다고 발표했다.
12단 제품은 초당 최대 1280GB(기가바이트)의 대역폭과 현존 최대 용량인 36GB를 제공한다. 하지만 삼성전자가 아직 8단 제품의 양산 일정도 잡지 못한 상황에서 12단 승기를 잡을 수 있을지에 대해 업계에서는 의문을 던진다.
현재 HBM 시장 1위인 SK하이닉스도 12단 HBM3E 개발을 진행하고 있다. 마이크론은 3월 중 개발이 목표다. 업계에서는 올 하반기(7∼12월) 12단 제품 시장이 본격화할 것으로 보고 있다.
권석준 성균관대 화학공학부 교수는 “마이크론은 미국 기업임에도 대부분의 팹은 일본과 대만에 있다”며 “특히 대만에 있는 팹은 전공정과 후공정이 모두 가능하며 특히 후공정은 TSMC와 협업해 이종접합에 특화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삼성전자가 현재의 위기를 극복하는 방법에 대해서는 ‘갑의 마인드’를 버리는 게 필요하다고 했다. 고객사의 요구사항과 각각의 AI 반도체에 최적화된 반도체를 공급할 수 있도록 을의 위치에서 고민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권 교수는 “AI 시대의 메모리 반도체는 고객사 프로세서에 특화된 맞춤형 모듈 설계가 필요하다”며 “엔비디아의 지배력이 당분간 지속되겠지만 AMD 등 후발주자 기업들이 새로운 방식의 설계를 시도할 수 있는 만큼 삼성전자 역시 HBM의 설계 문법도 다양화하고 이들을 파트너로 맞을 준비를 해야 한다”고 말했다. TSMC에 밀린 파운드리, 인텔까지 추격한다
파운드리 수요는 늘어가는데 삼성전자의 점유율은 꾸준히 줄고 있는 것도 악재다. 엔비디아가 ‘독주’ 체제를 갖춘 데에는 반도체 수요에 비해 생산력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수요는 넘치는데 공급이 제한돼 가격이 천정부지로 치솟은 것이다.
3나노 이하 초미세공정 반도체는 TSMC와 삼성전자만 생산 가능하다. 이조차도 ASML의 최첨단 장비가 필요하다. 빅테크의 수요가 엔비디아로 밀려오고 있는데 이를 만들어내는 제조기업의 생산라인은 한정됐다는 얘기다.
하지만 고객사의 1순위는 늘 TSMC였다. 지난해 매출 기준 파운드리 점유율은 TSMC가 59%, 삼성전자가 11%였다. 올해는 이 격차가 더 벌어질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엔비디아뿐만 아니라 AMD, 브로드컴 등 미국 반도체 기업 대부분이 TSMC에 생산을 맡기고 있다.
TSMC 제조 공정에서 병목현상이 발생하면 이를 삼성전자가 받아낼 수 있지만 문제가 생겼다. 인텔이 파운드리 복귀를 선언했다. 인텔의 목표는 ‘2030년까지 파운드리 2위’를 차지하는 것이다. 삼성전자를 밀어내겠다는 선전포고다.
인텔은 첫 대형 고객사로 무려 마이크로소프트(MS)를 영입했다. 과거의 ‘윈텔(윈도+인텔)’ 연합이 AI 칩셋·파운드리 공조로 부활하는 구도다. 인텔은 MS를 비롯해 총 150억 달러(약 20조원)에 이르는 수주를 확보했다고 밝히며 삼성전자·TSMC와 치열한 경쟁을 예고했다.
삼성전자와 TSMC를 앞서는 기술 로드맵도 공개했다. 올해 안에 2나노미터(1㎚=10억분의 1m)와 1.8나노 파운드리 공정을 도입하고 2027년 1.4나노 초미세 공정에서 칩을 생산하겠다는 계획이다.
인텔이 파운드리 복귀를 선언한 행사에 사티아 나델라 MS CEO가 직접 등장해 “가장 발전된 고성능·고품질 반도체를 안정적으로 공급해야 하는 필요성이 인텔과 협력하게 된 이유”라고 밝히며 힘을 실어줬다. 샘 올트먼 오픈AI CEO도 행사장을 찾았다. 이는 MS의 초거대 AI 전략에 인텔이 주요 파트너로 올라섰음을 뜻한다. CPU 시장에서 인텔과 경쟁 관계인 ARM 역시 파트너로 이름을 올렸다.
펫 겔싱어 인텔 CEO는 “3년 전 파운드리 복귀를 선언했을 때 놀랍다는 반응과 함께 냉소도 있었던 게 사실”이라며 “MS를 포함해 150억 달러의 수주를 확보하며 인텔이 AI 시대 가장 최적화한 파운드리임을 증명했다”고 강조했다.
미국 정부 역시 반도체 주권을 강화하기 위해 인텔에 100억 달러의 보조금을 지원하기로 했다. 지나 러몬도 미국 상무장관은 이 포럼에 화상으로 등장해 “실리콘(반도체)을 실리콘밸리에 돌려주자”고 말했다. 끈끈해지는 일-대만 협력
옆 나라도 바쁘다. 미국 정부와 기업 간 동맹이 강력해지는 와중에 일본과 대만의 밀월도 깊어졌다. 한국 때문에 반도체 경쟁우위에서 밀렸던 일본은 정부의 강력한 지지 아래 미국·대만과의 협력을 강화하고 있다.
TSMC는 올해 2월 일본에 첫 공장을 열었다. 위치는 규슈 구마모토현. 양배추밭이었던 부지가 단숨에 도쿄돔 4.5개분에 해당하는 반도체 벨트로 거듭났다. 이 공장에는 반도체 산업 부활을 노리는 일본 정부의 강력한 의지가 반영됐다. 제1공장 총 투자액 약 1조 엔(약 8조8000억원)으로 이 중 일본 정부가 최대 4760억 엔(약 4조2000억원)을 지원했다.
TSMC는 구마모토 제2공장도 짓는다. 이르면 연말까지 공사에 착수하고 2027년 말까지 가동 개시를 목표로 한다고 지난 2월 6일 밝혔다. 구마모토 제2공장에서는 6~7나노 반도체를 생산할 예정이다. 일본 정부는 제2공장에는 제1공장보다 더 많은 약 7300억 엔을 지원한다는 방침을 굳혔다.
구마모토 공장은 일본 현지 기업의 반도체 수요에 우선 대응할 것으로 보인다. 이날 개소식에 요시다 겐이치로 소니그룹 회장과 도요다 아키오 도요타 회장이 참석하면서 협력 관계임을 암시했다.
이를 통해 일본의 ‘소부장(소재·부품·장비)’ 기업들이 몸집을 키울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고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미국 안보신기술센터(CSET)에 따르면 현재 일본 기업의 글로벌 반도체 소재 점유율은 56%다. 특히 웨이퍼 위에 회로를 그리는 감광액인 ‘포토레지스트’는 90%를 차지하고 있다.
반도체 식각과 세정에 사용하는 ‘고순도 불화수소’와 반도체 칩을 만드는 원판인 ‘실리콘 웨이퍼’도 일본 기업의 비중이 각각 70%와 55%에 달한다.
글로벌 장비 시장에서의 존재감도 높다. 일본 기업의 비중은 전공정 29%, 후공정 44%를 차지한다.
문제는 한국이다. 많은 전문가들이 개별 공정에 특화한 소부장 기술 우위를 따라잡기 위해서는 삼성전자, SK하이닉스만으로는 역부족이라고 말한다. 소부장 생태계가 약해 전문 인력 확보나 기업 간 기술 시너지를 기대하기 힘들다는 지적이다.
권석준 교수는 “패키징 기술이나 소재가 굉장히 난점이 많은 분야가 되고 있기 때문에 투자보다도 전문 인력 확보가 가장 중요하다”며 “한국은 패키징이나 후공정을 잘하는 기업이 적고 생태계가 약하다는 것이 문제”라고 말했다.
반도체 업계에서는 정부 지원에 대한 아쉬운 목소리도 나온다. 반도체 산업이 국가대항전으로 번졌지만, 한국 정부의 존재감은 미미하기 때문이다. 각국은 막대한 보조금 지원을 약속하고 있지만, 한국은 세제혜택이 중심이 된 지원만 하고 있다.
미국은 2022년 527억 달러(약 70조원) 규모로 미국 내 반도체 생산과 개발을 지원하는 내용의 법안을 통과시켰다. 이 중 280억 달러를 첨단 반도체 제조에 투자하기로 했는데, 미국 정부에 반도체 보조금을 신청한 기업만 600곳이 넘는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 텍사스주 테일러시에 170억 달러(약 22조원)을 들여 파운드리 공장을 건설한 삼성전자도 수십억 달러를 지원 받을 것으로 기대했지만, 현재로서는 지급액이 예상보다 줄어들 수 있다. 미국 정부가 예산이 부족해 "기업들의 상당수가 자금을 받지 못할 것"이라고 못박았기 때문이다.
중국도 미국이 첨단 반도체 제조장치 등 수출 규제를 강화하는 데 맞서 자국에서 생산하는 반도체 비율을 높이기 위해 886조원의 기금을 마련했다.
유럽연합(EU)도 2030년까지 정부와 민간기업이 430억 유로(약 62조원)를 투자하기로 했다. EU는 기업에 대한 정부 지원금을 원칙적으로 금지하고 있지만 반도체는 예외로 뒀다.
한국 정부의 발표는 아리송하다. 2026년까지 반도체 설비투자에 340조원에 이르는 '민간 투자'를 이끌어낼 것이라고 말했다. 기업이 돈을 서서 투자 하면, 세제혜택을 지원한다고 했다. 반도체 업계에서는 보다 한국 정부의 적극적인 자금 투입이 필요하다고 내다봤다.
이종환 교수는 "한국이 메모리에서 지속적인 우위를 가져가면서 그 이익을 비메모리에 재투자하기 위해서는 정부의 강력한 지원이 필요하다"며 "정부와 기업, 학계가 긴밀하게 협업하지 않으면 경쟁력을 잃는 속도는 더 빨라질 것"이라고 말했다.
김영은 기자 kye0218@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