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생망? 내가 원하는 건 다른 결말이야”…콘텐츠 시장 장악한 회빙환과 먼치킨
입력 2024-03-11 07:27:25
수정 2024-05-07 14:42:50
[커버스토리 : ‘회빙환과 먼치킨’ 콘텐츠 시장 대세]
우울한 얘기다. 1990년대만 해도 자살률이 세계에서 가장 높은 국가 중 하나였던 핀란드는 지난 30여 년에 걸쳐 자살 건수를 절반 넘게 줄였다. 그 배경에는 국가적 계획과 개입 등의 노력이 있었다고 한다. 반면 한국은 모든 연령대 자살률이 OECD 국가 중 1위다. 자살률 1위에 처음 오른 게 1998년이니 26년 차 1위의 오명을 쓴 국가다.
양극화는 또 어떤가. 한국 경제의 양극화 담론이 공론화된 지도 20년이 훌쩍 흘렀다. 지역 갈등은 말할 것도 없다. 자살률부터 양극화, 지역 갈등과 젠더 갈등까지 한국 사회의 산적한 문제들은 어느 순간부터 고착화되어 중요한 건 알지만 그 누구도 제대로 들여다보지 않는다.
갈등과 문제를 해결할 능력을 갖췄다는 스타 정치인은 찾기 힘들다. 극한의 갈등을 중재할 원로도 없다. 그래도 희망을 보려고 기업 쪽을 돌아본다. 창업이건 성장이건 파괴적 변화를 이끈 스타 기업인을 본 지는 너무 오래됐다.
그사이 한국은 놓쳐 버린 수많은 기회의 사다리에 아쉬움을 토로하는 이들의 목소리만 커지고 있다. ‘그때 그 땅을 샀더라면’, ‘그때 그 주식을 샀더라면’이라고 한탄하는 이들이다.
이들은 대신 염원을 담아 가상의 세계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회귀·빙의·환생’으로 통하는 문이다. 문화는 그 시대 사람들의 욕망을 반영한다고 한다. 지금과는 ‘다른 결말’을 원하는 사람들이 콘텐츠 안에 수많은 영웅을 만들어내고 있다. ‘먼치킨’이 장악한 콘텐츠 시장, 그 안에 숨은 진짜 의미를 들여다봤다.
“암호화폐 대장주 비트코인이 2년 4개월 만에 사상 최고치를 경신했습니다. 이날 미 가상화폐 거래소 코인베이스에 따르면….”
직장인 철수 씨는 오늘도 비트코인 뉴스에 가슴속 울화가 치밀어 오른다. 2018년 코인 열풍에 탑승해 본전도 못 찾은 그였다. “아 그때 팔지만 않았어도 ㅠㅠ” 그러던 어느 날. 거리에서 만난 한 도인이 의미심장한 말을 건넨다. “지금의 기억을 안고 2018년으로 다시 돌아가시겠습니까.” 다시 기회가 주어진다면?모두의 심장을 떨리게 할 이 제안은 최근 K-콘텐츠의 성공 문법을 담고 있다. 이른바 ‘회·빙·환(회귀·빙의·환생)’ 설정이다. 웹소설을 원작으로 한 드라마 ‘재벌집 막내아들’이 대히트를 기록한 것은 2년 전이다. 이후 웹소설·웹툰의 성공 공식인 ‘회·빙·환’은 더욱 확산되고 있다.
3월 6일 기준 네이버 웹툰의 조회 수 톱10 작품은 10개 중 9개가 ‘회·빙·환’ 물이다. ‘화상귀환’, ‘외모지상주의’, ‘김부장’, ‘참교육’, ‘전지적 독자시점’, ‘촉법소년’ 등. 최근 유명작 모두 ‘회·빙·환’의 장르 안에서 전지전능한 주인공들이 성장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주인공이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과거로 날아가는 이야기(회귀물), 주인공이 특정 인물에 빙의되며 풀어나가는 이야기(빙의물), 죽은 후 환생해 다른 사람으로 태어나거나 다른 사람의 몸에 빙의한 이야기(환생물) 등은 대개 주인공이 현재의 기억을 안고 돌아가는 설정을 전제로 한다.
이 기억을 통해 주인공은 함정과 갈등을 피하고 해결책을 찾는 데 능통하다. 미래 또는 다른 세계에서 이미 경험한 일을 다시 풀기에 실수란 있을 수 없다. 이들은 독자에게 오로지 통쾌한 사이다를 선사한다. 강력한 캐릭터, 바로 ‘먼치킨’의 성장물이다.
먼치킨은 주로 한국 판타지 소설에서 쓰이는 강력한 캐릭터를 지칭하는 단어다. 요즘 언어로는 ‘사기캐(릭터)’, 더 쉽게 말하면 ‘영웅’을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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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치킨(Munchkin)은 원래 테이블탑 롤플레잉게임(RPG)에서 유래되었으며, 게임의 규칙을 극대화해 자신의 캐릭터를 가능한 한 강력하게 만들려는 플레이어를 가리킨다.
이러한 플레이어는 종종 게임의 재미와 스토리텔링 측면보다는 캐릭터의 능력치와 승리에 더 큰 중점을 둔다. 그래서 ‘룰에 협력하지 않고 모든 것을 혼자 해결하며 게임 진행을 방해하는 게이머’를 뜻하는 단어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 용어는 다른 맥락에서도 사용되기 시작했는데, 특히 온라인 게임이나 다른 형태의 엔터테인먼트에서 과도하게 강력하거나 균형이 맞지 않는 캐릭터나 플레이어를 지칭하는 데 사용된다. 일반적으로 먼치킨은 게임이나 스토리 내에서 비현실적으로 높은 능력치나 능력을 가진 캐릭터를 의미하며, 때로는 게임 플레이나 이야기의 균형을 해칠 정도로 강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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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담의 역사는 아주 먼 과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우리나라 최초의 국문 소설인 ‘홍길동전’도, 중국 장편 소설인 ‘삼국지연의’의 관우도 모두 그 나라의 시대 속 영웅이었다.
영웅의 설정은 어딜 가나 엇비슷했다. 신화종교학자 조지프 캠벨은 전 세계의 신화를 탐구하며 각각의 이야기들에서 공통의 서사 구조를 추출했는데, 그는 이를 ‘영웅의 여정’이라는 이름으로 세상에 소개했다. ‘태어남→부름→모험→역경→귀환’이다.
이 중에서도 역경은 영웅을 만드는 필수 요소다. 일본의 소년만화 ‘원피스’를 쓴 작가 오다 에이치로는 2012년 한 인터뷰에서 “캐릭터 설정에 주의해야 하는 것은 주인공을 너무 강하게 만들면 안 된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주인공의 성장이 작품의 재미 요소이기 때문에 주인공은 연속적으로 나타나는 역경과 시련에 직면하고, 때로는 죽음의 공포와 맞서면서 성장해야 한다는 논리다.
이 고난과 역경의 서사 안에서 주인공은 진짜 영웅으로 재탄생할 수 있다. 없어서는 안 될 영웅물의 필수 서사다. ‘미생’에서 ‘상남자’로“고구마 길어져서 하차합니다.”
“주인공 답답해요. 사이다 언제 나와요?”
하지만 지금의 독자들에겐 어림도 없는 소리다. 만약 웹소설 연재 중 고난과 역경으로 ‘영웅의 여정’이 길어진다면 독자들의 혹독한 댓글을 받게 될 것이다. 먼치킨이 과거의 영웅과 다른 점은 이 과정이 대부분 생략된다는 것이다.
최근 웹툰과 웹소설의 독자들은 발단-전개-위기-절정-결말로 쌓아 올린 서사를 기대하지 않는다. 전개와 위기의 아슬아슬함보다 성공을 쟁취하는 과정의 절정을 기대한다. 일명 속이 뻥 뚫리는 ‘사이다’ 전개다. 서사의 생략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고, 또 다른 서사의 등장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다.
판타지 웹소설을 즐겨 본다는 독자 김경재(22) 씨는 “보통 웹소설은 짜투리 시간 중 가벼운 마음으로 읽는데 어두운 분위기이거나 무거운 내용이면 손이 가지 않는다”며 “하루 내내 기다려서 100원에서 300원을 내고 읽는데 서사를 쌓는 구간이거나 갈등이 끝나지 않으면 답답한 흐름을 견디기가 어렵다”고 말했다.
콘텐츠 시장에서는 이야기 흐름에 필요한 배경·인물 설명조차 견디지 못하는 조급한 독자를 일컬어 ‘사이다패스(사이다+사이코패스)’라는 조어도 생겼다.
이들은 작중 위기와 갈등이 조금만 길어져도 ‘하차 선언’을 한다. 실시간 달리는 댓글에는 ‘답답하다’, ‘사이다를 달라’는 내용이 독자 다수의 추천을 받아 상위에 기록된다. ‘고구마 구간을 보려고 돈을 내고 싶지는 않다’는 게 이들의 주장이다. 로맨스물을 즐겨 보는 독자 안서현(32) 씨는 “한꺼번에 다양한 웹소설을 읽다 보니 내용이 많거나 어려우면 헷갈린다”며 “그렇다고 전편을 다시 보기는 귀찮고 또 시간도 없다”고 말했다.
사이다패스를 요구하는 유료 독자들이 많아지면서 콘텐츠 시장도 점점 변화했다. 먼치킨이 등장해 위기 상황을 한 방에 해결해버리는 작품들이 호평을 받았고, 주인공이 고난에 빠지거나 작중 내용이 사실적이면 ‘고구마’란 혹평에 시달렸다. 네이버 웹툰의 조회수 톱10 중 9개가 먼치킨을 키워드로 한 작품이란 점은 먼치킨의 파워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다.
10년 전인 2014년의 흥행작이 ‘미생’이었다면 2024년의 화제작(네이버 웹툰 급상승 랭킹 톱20위권)은 ‘상남자’라는 것도 최근의 트렌드를 보여준다.
두 작품 모두 신입사원의 성장을 그린 오피스물로 공통점이 있지만 이를 풀어내는 방식은 다르다. ‘미생’은 고구마 100개 먹은 듯 답답한 회사생활을 사실적으로 표현해 호평받았지만 ‘상남자’는 전지전능한 영웅물에 가깝다. 대기업의 CEO까지 오른 샐러리맨 ‘한유현’이 어느 날 모든 기억을 안은 채 30년 전으로 돌아가 신입사원의 위치에서 인생을 다시 설계하는 회귀물이기 때문이다.
200회 가까운 연재분에서 주인공이 위기의 순간에 놓이는 일은 손에 꼽는다. 갈등에 놓여도 다음 회에선 사이다를 준다. 독자들은 모두 한마음, 한목소리를 낸다. “이게 먼치킨이지!”, “사원이 저런 일을 해내다니. 정말 짜릿합니다!”
3년 차 판타지 작가 A 씨는 “독자들은 상황이 꼬이길 원하지 않고 극적으로 치닫는다 하더라도 최소 3화 안에는 해결이 되길 바란다”며 “유료 독자들의 요구를 무시하기란 쉽지 않은 게 업계의 현실”이라고 말했다.
먼치킨을 주인공으로 한 ‘회·빙·환’ 물의 성공이 보장되자 이를 지식재산권(IP)으로 한 영상물도 넘쳐나고 있다. 인생 2회 차 주인공 ‘강지원’(박민영 분)이 과거로 돌아가 자신을 버리고 바람난 남편과 그 상대인 자기 친구를 응징한 사이다 복수극 ‘내 남편과 결혼해줘’는 역대 tvN 월화드라마 중 평균시청률 1위를 차지하며 뜨거운 관심 속에 지난 2월 종영했다.
넷플릭스의 화제작인 ‘살인자O난감’, 디즈니플러스 드라마 ‘비질란테’ 등은 전통적인 영웅상에서는 빗겨나 있지만 본질은 영웅인 ‘안티히어로’의 성격을 담았다.
각각의 주인공 이탕(최우식 분)과 김지용(남주혁 분)이 죄질이 나쁜 범죄자들을 폭력으로 직접 응징하는 이야기로 어딘가 결핍된 영웅의 심판이 주요 줄기다. 대중은 그저 자신의 욕망과 이득에 따라 움직이는데 최종적으로는 사회에 이바지하는 정의로운 안티히어로들에게 열광한다. 착하기만 한 영웅보다 인간 심리의 입체적인 모습을 담은 안티히어로에 더 큰 매력을 느낀다는 반응이다.
먼치킨 영상작들의 성공 속에 기대작들도 줄을 잇는다. 먼치킨 웹소설을 원작으로 한 ‘전지적 독자시점’은 배우 이민호, 안효섭, 채수빈, 지수 등 화려한 캐스팅을 확정 짓고 지난해 12월 크랭크인 했다. 이 영화는 멸망해 버린 현실에서 유일하게 결말을 알고 있는 현실의 주인공이 소설 속 주인공과 함께 결말을 바꾸고 세상을 구하기 위한 대장정을 그렸다. CEO에서 신입사원이 된 ‘상남자’도 영상화 계약을 마친 것으로 알려졌다.
업계 관계자는 “이미 검증된 웹소설과 웹툰이 많아 회·빙·환 작품의 영상화는 앞으로도 더 늘어날 것”이라고 말했다. 웹소설에서 웹툰으로, 웹툰에서 영상업계까지 집어삼킨 먼치킨의 전성시대다. 쇼펜하우어와 먼치킨의 시대‘슈퍼맨은 왜 미국으로 갔을까’의 저자 한민은 “사람들에게 화제가 되는 콘텐츠에는 동시대 사람들의 욕망이 담겨 있다”고 말한다. 문화 현상을 잘 읽어내면 문화 구성원들의 심층적인 심리를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의 관점에서 본다면 최근 ‘회·빙·환’과 먼치킨이 키워드로 자리 잡은 K-콘텐츠에는 한국인, 특히 젊은 세대들이 느끼는 현실의 답답함과 이를 해소해 줄 영웅에 대한 갈망이 담겨 있다.
극심한 취업난, 부의 격차, 애초 정해진 것 같은 성공의 수준 등은 과거 ‘헬조선’과 ‘이생망’(이번 생은 망했다)이란 조어를 만들어 냈다. 특히 자신의 힘만으로는 성공의 길을 걷기 어렵다는 생각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회·빙·환’을 소재로 한 작품들은 지나치게 매혹적이다.
‘이생망’을 외치는 이들의 답답함을 한번에 풀어주기 때문이다. 내면 깊이 자리 잡은 다시 태어나고 싶은 욕망, 환상을 자극했다고 할 수도 있다.
현실만으로도 충분히 답답한 먼치킨 콘텐츠의 애독자들은 “스트레스 해소, 대리만족으로 웹소설을 본다. 그 소설에서까지 스트레스를 받고 싶지는 않다”고 말한다. 이들에게 고난과 역경은 이미 현실에서 많이 본 지긋지긋한 요소다.
이를 보여주는 건강보험심사평가원 통계가 있다. 최근 정신의학과를 찾는 이들 역시 주로 20~30대다. 2017년에는 60대 우울증 환자가 가장 많았다면 2021년에는 20대 환자가 가장 많았다. 2030 우울증 환자의 증가율도 높았다. 2021년 우울증 진단을 받은 20대 환자는 2017년보다 127.1%, 30대 환자는 67.3% 늘었다.
‘병든 사회’는 10대까지 전염되고 있다. 서울시 자살예방센터에 따르면 1020세대의 정신병동 입원은 최근 2~3년 새 두세 배 늘었다. 다른 연령군에 비해 압도적인 증가세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자살률 1위, 삶의 만족도는 38개국 중 35위로 최하위권이다.
이들이 더욱 현실세계에서 탄생하기 힘든 영웅에 빠져드는 이유는 한국 사회에서 영웅 또는 스타가 부재하기 때문이다. ‘영웅은 갑자기 만들어지지 않는다. 시대가 영웅을 만든다’는 말이 있다. 사회가 혼란스러울 때 이를 해결하거나 중재할 영웅이 탄생한다는 뜻이다.
하지만 최근 한국 사회는 짠하고 나타날 해결사 영웅도, 갈등을 중재할 만한 원로도 찾아보기 어렵다.
오죽하면 1800년대의 염세주의 철학자 아르투어 쇼펜하우어가 현대인의 해결사로 등장해 맹활약 중이다.
온라인 서점 예스24에 따르면 쇼펜하우어 관련 도서 전체 판매량은 2023년에만 전년 대비 14.5배, 올해 1월에는 전년 동기 대비 26.5배 폭증했다.
예스24 관계자는 “서점가에서는 지난해 말부터 쇼펜하우어 열풍”이라며 “염세주의 철학자가 전하는 삶의 고통에 대한 통찰이 현시대 사람들의 녹록지 않은 현실에 울림을 주고 있다”고 설명했다.
녹록지 않은 2024년이 1980년대의 쇼펜하우어를 초대했다면 이미 콘텐츠 시장에는 ‘삶은 사이다’라며 통쾌한 한 방을 선사하는 ‘상남자’의 한유현, ‘내 남편과 결혼해줘’의 강지원, ‘살인자O난감’의 이탕과 ‘비질란테’의 김지용 등 2D와 3D를 종횡하는 강력한 캐릭터 ‘먼치킨’들이 있다.
이들은 해결사를 바라는 한국인의 욕망이 그려낸 캐릭터일지도 모른다. 1년 전으로 돌아가 엔디비아와 비트코인을 사모아 흙수저를 벗어나는 상상, 법망을 교묘하게 피한 악질 범죄자를 처단하는 상상,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순간에 영웅처럼 나타나 구해주는 상상…. 수많은 욕망이 빚어낸 영웅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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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빙·환과 틱톡 세계관?
‘사이다’ 콘텐츠의 공통점은 호흡이 짧다는 점이다. 독자들은 긴 호흡으로 연재되는 서사를 기다려주지 않는다. 이는 짧은 호흡의 대표주자 격인 ‘틱톡’의 성공과도 맥락이 닿아 있다.
1분 이내의 짧은 영상(숏폼)으로 성장한 틱톡은 MZ들의 놀이터로 꼽힌다. 서사구조를 가진 기존의 플랫폼들과 달리 틱톡은 ‘모바일 환경에 최적화된 짧은 영상’이 성공 전략이었다.
출퇴근 시간이나 점심 시간 등 자투리 시간을 활용해 즐기는 모바일 콘텐츠가 대세로 자리 잡은 만큼 영상당 소비시간을 대폭 줄여 높은 몰입도로 MZ들의 호평을 산 것이다. 초기에는 1분이었지만 최근에는 이마저도 길다며 10초에서 15초 분량의 숏폼 영상을 시청하는 문화가 자리 잡았다.
하지만 틱톡 세계관은 “짧고 자극적인 영상에 중독돼 참을성이 없어지고 인간을 좀 더 원시적인 상태로 몰아간다”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짧고 자극적인 영상으로 뇌의 기능을 저하시킨다는 것이다.
먼치킨이 장악한 콘텐츠 시장 역시 비슷한 비판을 받는다. 짧은 문장, 서사 없는 결과만을 선호하는 분위기가 섬세한 감정의 선을 집어삼켜 스토리 경쟁력이 사라지는 게 아니냐는 비판이다. 그럼에도 이는 엄연히 존재하는 현실적 트렌드이며 이를 통해 새로운 부가가치가 창출되고 있다는 점은 누구도 외면할 수 없게 만드는 요소다.
정채희 기자 poof34@hankyung.com
우울한 얘기다. 1990년대만 해도 자살률이 세계에서 가장 높은 국가 중 하나였던 핀란드는 지난 30여 년에 걸쳐 자살 건수를 절반 넘게 줄였다. 그 배경에는 국가적 계획과 개입 등의 노력이 있었다고 한다. 반면 한국은 모든 연령대 자살률이 OECD 국가 중 1위다. 자살률 1위에 처음 오른 게 1998년이니 26년 차 1위의 오명을 쓴 국가다.
양극화는 또 어떤가. 한국 경제의 양극화 담론이 공론화된 지도 20년이 훌쩍 흘렀다. 지역 갈등은 말할 것도 없다. 자살률부터 양극화, 지역 갈등과 젠더 갈등까지 한국 사회의 산적한 문제들은 어느 순간부터 고착화되어 중요한 건 알지만 그 누구도 제대로 들여다보지 않는다.
갈등과 문제를 해결할 능력을 갖췄다는 스타 정치인은 찾기 힘들다. 극한의 갈등을 중재할 원로도 없다. 그래도 희망을 보려고 기업 쪽을 돌아본다. 창업이건 성장이건 파괴적 변화를 이끈 스타 기업인을 본 지는 너무 오래됐다.
그사이 한국은 놓쳐 버린 수많은 기회의 사다리에 아쉬움을 토로하는 이들의 목소리만 커지고 있다. ‘그때 그 땅을 샀더라면’, ‘그때 그 주식을 샀더라면’이라고 한탄하는 이들이다.
이들은 대신 염원을 담아 가상의 세계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회귀·빙의·환생’으로 통하는 문이다. 문화는 그 시대 사람들의 욕망을 반영한다고 한다. 지금과는 ‘다른 결말’을 원하는 사람들이 콘텐츠 안에 수많은 영웅을 만들어내고 있다. ‘먼치킨’이 장악한 콘텐츠 시장, 그 안에 숨은 진짜 의미를 들여다봤다.
“암호화폐 대장주 비트코인이 2년 4개월 만에 사상 최고치를 경신했습니다. 이날 미 가상화폐 거래소 코인베이스에 따르면….”
직장인 철수 씨는 오늘도 비트코인 뉴스에 가슴속 울화가 치밀어 오른다. 2018년 코인 열풍에 탑승해 본전도 못 찾은 그였다. “아 그때 팔지만 않았어도 ㅠㅠ” 그러던 어느 날. 거리에서 만난 한 도인이 의미심장한 말을 건넨다. “지금의 기억을 안고 2018년으로 다시 돌아가시겠습니까.” 다시 기회가 주어진다면?모두의 심장을 떨리게 할 이 제안은 최근 K-콘텐츠의 성공 문법을 담고 있다. 이른바 ‘회·빙·환(회귀·빙의·환생)’ 설정이다. 웹소설을 원작으로 한 드라마 ‘재벌집 막내아들’이 대히트를 기록한 것은 2년 전이다. 이후 웹소설·웹툰의 성공 공식인 ‘회·빙·환’은 더욱 확산되고 있다.
3월 6일 기준 네이버 웹툰의 조회 수 톱10 작품은 10개 중 9개가 ‘회·빙·환’ 물이다. ‘화상귀환’, ‘외모지상주의’, ‘김부장’, ‘참교육’, ‘전지적 독자시점’, ‘촉법소년’ 등. 최근 유명작 모두 ‘회·빙·환’의 장르 안에서 전지전능한 주인공들이 성장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주인공이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과거로 날아가는 이야기(회귀물), 주인공이 특정 인물에 빙의되며 풀어나가는 이야기(빙의물), 죽은 후 환생해 다른 사람으로 태어나거나 다른 사람의 몸에 빙의한 이야기(환생물) 등은 대개 주인공이 현재의 기억을 안고 돌아가는 설정을 전제로 한다.
이 기억을 통해 주인공은 함정과 갈등을 피하고 해결책을 찾는 데 능통하다. 미래 또는 다른 세계에서 이미 경험한 일을 다시 풀기에 실수란 있을 수 없다. 이들은 독자에게 오로지 통쾌한 사이다를 선사한다. 강력한 캐릭터, 바로 ‘먼치킨’의 성장물이다.
먼치킨은 주로 한국 판타지 소설에서 쓰이는 강력한 캐릭터를 지칭하는 단어다. 요즘 언어로는 ‘사기캐(릭터)’, 더 쉽게 말하면 ‘영웅’을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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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치킨(Munchkin)은 원래 테이블탑 롤플레잉게임(RPG)에서 유래되었으며, 게임의 규칙을 극대화해 자신의 캐릭터를 가능한 한 강력하게 만들려는 플레이어를 가리킨다.
이러한 플레이어는 종종 게임의 재미와 스토리텔링 측면보다는 캐릭터의 능력치와 승리에 더 큰 중점을 둔다. 그래서 ‘룰에 협력하지 않고 모든 것을 혼자 해결하며 게임 진행을 방해하는 게이머’를 뜻하는 단어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 용어는 다른 맥락에서도 사용되기 시작했는데, 특히 온라인 게임이나 다른 형태의 엔터테인먼트에서 과도하게 강력하거나 균형이 맞지 않는 캐릭터나 플레이어를 지칭하는 데 사용된다. 일반적으로 먼치킨은 게임이나 스토리 내에서 비현실적으로 높은 능력치나 능력을 가진 캐릭터를 의미하며, 때로는 게임 플레이나 이야기의 균형을 해칠 정도로 강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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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담의 역사는 아주 먼 과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우리나라 최초의 국문 소설인 ‘홍길동전’도, 중국 장편 소설인 ‘삼국지연의’의 관우도 모두 그 나라의 시대 속 영웅이었다.
영웅의 설정은 어딜 가나 엇비슷했다. 신화종교학자 조지프 캠벨은 전 세계의 신화를 탐구하며 각각의 이야기들에서 공통의 서사 구조를 추출했는데, 그는 이를 ‘영웅의 여정’이라는 이름으로 세상에 소개했다. ‘태어남→부름→모험→역경→귀환’이다.
이 중에서도 역경은 영웅을 만드는 필수 요소다. 일본의 소년만화 ‘원피스’를 쓴 작가 오다 에이치로는 2012년 한 인터뷰에서 “캐릭터 설정에 주의해야 하는 것은 주인공을 너무 강하게 만들면 안 된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주인공의 성장이 작품의 재미 요소이기 때문에 주인공은 연속적으로 나타나는 역경과 시련에 직면하고, 때로는 죽음의 공포와 맞서면서 성장해야 한다는 논리다.
이 고난과 역경의 서사 안에서 주인공은 진짜 영웅으로 재탄생할 수 있다. 없어서는 안 될 영웅물의 필수 서사다. ‘미생’에서 ‘상남자’로“고구마 길어져서 하차합니다.”
“주인공 답답해요. 사이다 언제 나와요?”
하지만 지금의 독자들에겐 어림도 없는 소리다. 만약 웹소설 연재 중 고난과 역경으로 ‘영웅의 여정’이 길어진다면 독자들의 혹독한 댓글을 받게 될 것이다. 먼치킨이 과거의 영웅과 다른 점은 이 과정이 대부분 생략된다는 것이다.
최근 웹툰과 웹소설의 독자들은 발단-전개-위기-절정-결말로 쌓아 올린 서사를 기대하지 않는다. 전개와 위기의 아슬아슬함보다 성공을 쟁취하는 과정의 절정을 기대한다. 일명 속이 뻥 뚫리는 ‘사이다’ 전개다. 서사의 생략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고, 또 다른 서사의 등장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다.
판타지 웹소설을 즐겨 본다는 독자 김경재(22) 씨는 “보통 웹소설은 짜투리 시간 중 가벼운 마음으로 읽는데 어두운 분위기이거나 무거운 내용이면 손이 가지 않는다”며 “하루 내내 기다려서 100원에서 300원을 내고 읽는데 서사를 쌓는 구간이거나 갈등이 끝나지 않으면 답답한 흐름을 견디기가 어렵다”고 말했다.
콘텐츠 시장에서는 이야기 흐름에 필요한 배경·인물 설명조차 견디지 못하는 조급한 독자를 일컬어 ‘사이다패스(사이다+사이코패스)’라는 조어도 생겼다.
이들은 작중 위기와 갈등이 조금만 길어져도 ‘하차 선언’을 한다. 실시간 달리는 댓글에는 ‘답답하다’, ‘사이다를 달라’는 내용이 독자 다수의 추천을 받아 상위에 기록된다. ‘고구마 구간을 보려고 돈을 내고 싶지는 않다’는 게 이들의 주장이다. 로맨스물을 즐겨 보는 독자 안서현(32) 씨는 “한꺼번에 다양한 웹소설을 읽다 보니 내용이 많거나 어려우면 헷갈린다”며 “그렇다고 전편을 다시 보기는 귀찮고 또 시간도 없다”고 말했다.
사이다패스를 요구하는 유료 독자들이 많아지면서 콘텐츠 시장도 점점 변화했다. 먼치킨이 등장해 위기 상황을 한 방에 해결해버리는 작품들이 호평을 받았고, 주인공이 고난에 빠지거나 작중 내용이 사실적이면 ‘고구마’란 혹평에 시달렸다. 네이버 웹툰의 조회수 톱10 중 9개가 먼치킨을 키워드로 한 작품이란 점은 먼치킨의 파워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다.
10년 전인 2014년의 흥행작이 ‘미생’이었다면 2024년의 화제작(네이버 웹툰 급상승 랭킹 톱20위권)은 ‘상남자’라는 것도 최근의 트렌드를 보여준다.
두 작품 모두 신입사원의 성장을 그린 오피스물로 공통점이 있지만 이를 풀어내는 방식은 다르다. ‘미생’은 고구마 100개 먹은 듯 답답한 회사생활을 사실적으로 표현해 호평받았지만 ‘상남자’는 전지전능한 영웅물에 가깝다. 대기업의 CEO까지 오른 샐러리맨 ‘한유현’이 어느 날 모든 기억을 안은 채 30년 전으로 돌아가 신입사원의 위치에서 인생을 다시 설계하는 회귀물이기 때문이다.
200회 가까운 연재분에서 주인공이 위기의 순간에 놓이는 일은 손에 꼽는다. 갈등에 놓여도 다음 회에선 사이다를 준다. 독자들은 모두 한마음, 한목소리를 낸다. “이게 먼치킨이지!”, “사원이 저런 일을 해내다니. 정말 짜릿합니다!”
3년 차 판타지 작가 A 씨는 “독자들은 상황이 꼬이길 원하지 않고 극적으로 치닫는다 하더라도 최소 3화 안에는 해결이 되길 바란다”며 “유료 독자들의 요구를 무시하기란 쉽지 않은 게 업계의 현실”이라고 말했다.
먼치킨을 주인공으로 한 ‘회·빙·환’ 물의 성공이 보장되자 이를 지식재산권(IP)으로 한 영상물도 넘쳐나고 있다. 인생 2회 차 주인공 ‘강지원’(박민영 분)이 과거로 돌아가 자신을 버리고 바람난 남편과 그 상대인 자기 친구를 응징한 사이다 복수극 ‘내 남편과 결혼해줘’는 역대 tvN 월화드라마 중 평균시청률 1위를 차지하며 뜨거운 관심 속에 지난 2월 종영했다.
넷플릭스의 화제작인 ‘살인자O난감’, 디즈니플러스 드라마 ‘비질란테’ 등은 전통적인 영웅상에서는 빗겨나 있지만 본질은 영웅인 ‘안티히어로’의 성격을 담았다.
각각의 주인공 이탕(최우식 분)과 김지용(남주혁 분)이 죄질이 나쁜 범죄자들을 폭력으로 직접 응징하는 이야기로 어딘가 결핍된 영웅의 심판이 주요 줄기다. 대중은 그저 자신의 욕망과 이득에 따라 움직이는데 최종적으로는 사회에 이바지하는 정의로운 안티히어로들에게 열광한다. 착하기만 한 영웅보다 인간 심리의 입체적인 모습을 담은 안티히어로에 더 큰 매력을 느낀다는 반응이다.
먼치킨 영상작들의 성공 속에 기대작들도 줄을 잇는다. 먼치킨 웹소설을 원작으로 한 ‘전지적 독자시점’은 배우 이민호, 안효섭, 채수빈, 지수 등 화려한 캐스팅을 확정 짓고 지난해 12월 크랭크인 했다. 이 영화는 멸망해 버린 현실에서 유일하게 결말을 알고 있는 현실의 주인공이 소설 속 주인공과 함께 결말을 바꾸고 세상을 구하기 위한 대장정을 그렸다. CEO에서 신입사원이 된 ‘상남자’도 영상화 계약을 마친 것으로 알려졌다.
업계 관계자는 “이미 검증된 웹소설과 웹툰이 많아 회·빙·환 작품의 영상화는 앞으로도 더 늘어날 것”이라고 말했다. 웹소설에서 웹툰으로, 웹툰에서 영상업계까지 집어삼킨 먼치킨의 전성시대다. 쇼펜하우어와 먼치킨의 시대‘슈퍼맨은 왜 미국으로 갔을까’의 저자 한민은 “사람들에게 화제가 되는 콘텐츠에는 동시대 사람들의 욕망이 담겨 있다”고 말한다. 문화 현상을 잘 읽어내면 문화 구성원들의 심층적인 심리를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의 관점에서 본다면 최근 ‘회·빙·환’과 먼치킨이 키워드로 자리 잡은 K-콘텐츠에는 한국인, 특히 젊은 세대들이 느끼는 현실의 답답함과 이를 해소해 줄 영웅에 대한 갈망이 담겨 있다.
극심한 취업난, 부의 격차, 애초 정해진 것 같은 성공의 수준 등은 과거 ‘헬조선’과 ‘이생망’(이번 생은 망했다)이란 조어를 만들어 냈다. 특히 자신의 힘만으로는 성공의 길을 걷기 어렵다는 생각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회·빙·환’을 소재로 한 작품들은 지나치게 매혹적이다.
‘이생망’을 외치는 이들의 답답함을 한번에 풀어주기 때문이다. 내면 깊이 자리 잡은 다시 태어나고 싶은 욕망, 환상을 자극했다고 할 수도 있다.
현실만으로도 충분히 답답한 먼치킨 콘텐츠의 애독자들은 “스트레스 해소, 대리만족으로 웹소설을 본다. 그 소설에서까지 스트레스를 받고 싶지는 않다”고 말한다. 이들에게 고난과 역경은 이미 현실에서 많이 본 지긋지긋한 요소다.
이를 보여주는 건강보험심사평가원 통계가 있다. 최근 정신의학과를 찾는 이들 역시 주로 20~30대다. 2017년에는 60대 우울증 환자가 가장 많았다면 2021년에는 20대 환자가 가장 많았다. 2030 우울증 환자의 증가율도 높았다. 2021년 우울증 진단을 받은 20대 환자는 2017년보다 127.1%, 30대 환자는 67.3% 늘었다.
‘병든 사회’는 10대까지 전염되고 있다. 서울시 자살예방센터에 따르면 1020세대의 정신병동 입원은 최근 2~3년 새 두세 배 늘었다. 다른 연령군에 비해 압도적인 증가세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자살률 1위, 삶의 만족도는 38개국 중 35위로 최하위권이다.
이들이 더욱 현실세계에서 탄생하기 힘든 영웅에 빠져드는 이유는 한국 사회에서 영웅 또는 스타가 부재하기 때문이다. ‘영웅은 갑자기 만들어지지 않는다. 시대가 영웅을 만든다’는 말이 있다. 사회가 혼란스러울 때 이를 해결하거나 중재할 영웅이 탄생한다는 뜻이다.
하지만 최근 한국 사회는 짠하고 나타날 해결사 영웅도, 갈등을 중재할 만한 원로도 찾아보기 어렵다.
오죽하면 1800년대의 염세주의 철학자 아르투어 쇼펜하우어가 현대인의 해결사로 등장해 맹활약 중이다.
온라인 서점 예스24에 따르면 쇼펜하우어 관련 도서 전체 판매량은 2023년에만 전년 대비 14.5배, 올해 1월에는 전년 동기 대비 26.5배 폭증했다.
예스24 관계자는 “서점가에서는 지난해 말부터 쇼펜하우어 열풍”이라며 “염세주의 철학자가 전하는 삶의 고통에 대한 통찰이 현시대 사람들의 녹록지 않은 현실에 울림을 주고 있다”고 설명했다.
녹록지 않은 2024년이 1980년대의 쇼펜하우어를 초대했다면 이미 콘텐츠 시장에는 ‘삶은 사이다’라며 통쾌한 한 방을 선사하는 ‘상남자’의 한유현, ‘내 남편과 결혼해줘’의 강지원, ‘살인자O난감’의 이탕과 ‘비질란테’의 김지용 등 2D와 3D를 종횡하는 강력한 캐릭터 ‘먼치킨’들이 있다.
이들은 해결사를 바라는 한국인의 욕망이 그려낸 캐릭터일지도 모른다. 1년 전으로 돌아가 엔디비아와 비트코인을 사모아 흙수저를 벗어나는 상상, 법망을 교묘하게 피한 악질 범죄자를 처단하는 상상,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순간에 영웅처럼 나타나 구해주는 상상…. 수많은 욕망이 빚어낸 영웅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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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빙·환과 틱톡 세계관?
‘사이다’ 콘텐츠의 공통점은 호흡이 짧다는 점이다. 독자들은 긴 호흡으로 연재되는 서사를 기다려주지 않는다. 이는 짧은 호흡의 대표주자 격인 ‘틱톡’의 성공과도 맥락이 닿아 있다.
1분 이내의 짧은 영상(숏폼)으로 성장한 틱톡은 MZ들의 놀이터로 꼽힌다. 서사구조를 가진 기존의 플랫폼들과 달리 틱톡은 ‘모바일 환경에 최적화된 짧은 영상’이 성공 전략이었다.
출퇴근 시간이나 점심 시간 등 자투리 시간을 활용해 즐기는 모바일 콘텐츠가 대세로 자리 잡은 만큼 영상당 소비시간을 대폭 줄여 높은 몰입도로 MZ들의 호평을 산 것이다. 초기에는 1분이었지만 최근에는 이마저도 길다며 10초에서 15초 분량의 숏폼 영상을 시청하는 문화가 자리 잡았다.
하지만 틱톡 세계관은 “짧고 자극적인 영상에 중독돼 참을성이 없어지고 인간을 좀 더 원시적인 상태로 몰아간다”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짧고 자극적인 영상으로 뇌의 기능을 저하시킨다는 것이다.
먼치킨이 장악한 콘텐츠 시장 역시 비슷한 비판을 받는다. 짧은 문장, 서사 없는 결과만을 선호하는 분위기가 섬세한 감정의 선을 집어삼켜 스토리 경쟁력이 사라지는 게 아니냐는 비판이다. 그럼에도 이는 엄연히 존재하는 현실적 트렌드이며 이를 통해 새로운 부가가치가 창출되고 있다는 점은 누구도 외면할 수 없게 만드는 요소다.
정채희 기자 poof34@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