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정글서 ‘모래주머니’ 달고 뛰는 기업들…40년 묵은 규제에 발목
입력 2024-04-03 06:05:01
수정 2024-04-03 06:05:01
[비즈니스 포커스]
한국은 각종 규제로 둘러싸인 ‘규제공화국’이다. 국회의원 발의를 통한 규제 입법이 우후죽순 쏟아지며 기업 투자를 가로막고 한국 경제성장을 저해하는 주된 요인으로 꼽힌다. 과도한 규제는 경제의 비효율성을 증가시키며 기업의 혁신 의욕과 창의성 저하로 이어져 경제 활력을 상실하게 만든다. 규제가 많을수록 경제 성장력은 약화될 수밖에 없다.
출범 때부터 규제를 ‘기업의 모래주머니’라 비유하며 과감한 규제 철폐를 강조해온 윤석열 정부는 출범 이후 ‘킬러규제’를 포함해 1700여 건의 규제 개선을 완료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기업이 피부로 느끼는 체감도는 아직 미흡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양적으로는 성과를 거뒀지만 관련 법규 개정과 이해관계자 조정이 이뤄지지 않아 질적으로는 여전히 부족하다는 것이다.
한경비즈니스는 4월 총선을 앞두고 대한상공회의소에 의뢰해 올해 가장 시급한 규제 개혁 과제 중 노동시장·기업제도·경제활력·투자활력 등 4가지 리빌딩 전략과 5개 규제 개선 과제를 선정했다.
대한상공회의소가 소통플랫폼을 통해 5242명의 국민·기업인·전문가의 의견을 모아 국회와 각 정당에 제출한 ‘제22대 총선에 바라는 국민과 기업의 제안’ 건의서 내용 중 낡은 기업환경 혁신을 위해 개선이 필요한 규제 중 핵심 의제를 5개 키워드로 정리한 것이다.
① 노사관계 선진화
대립·투쟁적 노조 문화에 힘의 균형 상실
반도체 적자 탈출을 눈앞에 두고 있는 삼성전자는 최근 임금 교섭을 매듭짓지 못해 ‘노조 리스크’라는 복병을 만났다. 성과급에 대한 불만으로 조합원 수가 급증하면서 창립 5년 만에 노조 조합원 수가 2만 명을 넘어섰다.
노사갈등이 커지면서 사상 첫 파업이 현실화할지에 대한 우려도 커지고 있다. 파업 이슈는 최근 주주총회에서도 화두였다. 한 주주의 파업 우려에 대해 한종희 삼성전자 부회장은 “언제나 대화의 창을 열어두고 소통에 임해 노조가 파업에 이르지 않도록 노력할 것”이라면서도 “다만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노동조합이 파업을 할 경우 관계 법령이 허용하는 범위 내에서 가용한 수단을 동원해 경영 및 생산 차질을 최소화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미국 헤리티지재단의 ‘2024 경제자유지수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은 184개국 중 종합 순위 14위로 ‘거의 자유’ 등급을 받았다. 다만 노동시장 항목에서는 ‘부자유’ 등급으로 87위에 머물렀다. 헤리티지재단은 “한국의 노동시장은 역동적이지만 규제 경직성이 아직 존재하며 강성노조가 기업 비용을 증가시키고 있다”고 평가했다.
한국의 노사관계 경쟁력은 세계 최하위 수준으로 코리아 디스카운트의 원인으로도 지목된다. 스위스 국제경영개발대학원(IMD)이 발표한 국가경쟁력 평가에서 한국의 노동시장 경쟁력은 조사 대상 64개국 중 39위 수준이다.
파업 시 대체근로 금지, 사업장 점거 허용, 사용자 부당노동행위 형사처벌 등 노조와 파업에 대해서는 강력한 보호가 이뤄지고 있는데 반해 노조 파업권에 대응해 기업의 생산활동을 보호하는 법제도는 미비하다.
대한상의는 “대립적 노사관계는 국가경쟁력 제고와 일자리 창출에 가장 큰 걸림돌”이라며 “공정한 노사관계 제도가 정비돼야 하며 특히 이중처벌 우려가 있는 사용자 부당노동행위 형사처벌 규정을 삭제해 고소·고발 남용을 방지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② 비대면 진료 허용
해외서 활로 찾는 비대면 진료 스타트업들
비대면 진료 플랫폼을 운영하는 A사는 2023년 5월 감염병 위기경보 단계가 낮아지면서 비대면 진료의 법적 근거가 사라진 한국에서 사업을 영위하기 어려워졌다. 이에 A사는 비대면 진료 규제가 풀린 일본으로 진출할 수밖에 없었다.
현재 비대면 진료는 의료법 개정 없이 보건복지부 시범사업으로 진행 중이다. 대한상의는 비대면 진료 법제화로 국민 의료 접근성과 편의성을 높여야 한다고 제시했다. 정부는 지난 2월 23일부터 비대면 진료를 전면 확대해 의료취약 지역이 아닌 곳에서도 ‘평일’에, 의원뿐 아니라 ‘병원급 이상’ 의료기관에서도 가능하게 했다.
의료 파업으로 인한 ‘비상진료체계’ 시행으로 다시 한시적으로 비대면 진료가 가능해졌지만 법이 개정되지 않는 한 관련 사업을 영위하는 업체들은 한국에서의 안정적 사업 전개가 불확실한 상황이다.
전공의 이탈이 본격화한 후 정부가 이로 인한 의료 대란을 해소하기 위해 비대면 진료를 한시 허용하면서 비대면 진료 플랫폼들이 의료 공백을 막는 구원투수 역할을 하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비대면 진료 플랫폼 닥터나우에 따르면 최근 비대면 진료 수는 일평균 2000건을 기록하고 있다. 한 달 전 1200건 수준에서 1.7배로 급증했다.
하지만 약 배송이 안전상 이유로 여전히 금지돼 있어 비대면 진료를 받고도 약은 대면 수령하는 상황이 발생하고 있다. 의약품 오남용과 배송 과정에서의 변질 우려, 대면 복약지도 원칙 등의 이유 때문이다. 약 배송 문제는 총선에서도 화두다. 여당은 비대면 진료 약 배송 허용을 공약으로 내걸었다. 반면 야당은 비대면 진료 허용범위 최소화와 공적 전자처방전 도입을 추진 중이다.
한국에서 비대면 진료 제도화 논의가 지지부진한 사이 해외에서는 ICT 기술혁신과 제도정비와 맞물려 관련 사업이 활성화되고 있다. 미국에선 원격의료서비스 플랫폼 ‘아마존 클리닉’이 미국 전역으로 확대됐다.
아마존 웹 사이트나 모바일 앱에서 의사와 환자를 연중무휴로 연결해주는 서비스다. 결막염, 탈모, 축농증 등 수십 가지 경증 질환에 대해 화상 채팅과 메시지 기반 상담으로 원격 의료를 받을 수 있다. 디지털 약국 ‘아마존 파머시’를 통해 처방약을 드론으로도 배송받을 수 있다.
대한상의는 “코로나19 팬데믹 기간 동안 비대면 진료의 효과성과 안전성이 입증된 만큼 안전장치 마련 등을 통해 법제정비가 필요하다”며 “약 배송은 규제샌드박스 실증을 거쳐 안전성을 검토한 후 단계적 법제정비를 해야 한다”고 말했다.
③ 대형마트 규제
12년 족쇄에 발목 잡힌 대형마트들, 쿠팡에 밀리고 알리에 치여
12년째 대형마트에 적용 중인 공휴일 의무휴업 제도도 개선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꾸준히 제기되고 있다.
대형마트 영업 규제는 골목상권 침해를 막는다는 취지로 2012년 도입됐으나 소비자는 휴일에 장보기 어려운 불편을 겪고 있고, 원래 취지인 전통시장 매출이 늘어나기보단 온라인 장보기 매출이 커지며 실효성 논란을 겪어왔다. 대형마트가 의무휴업할 경우 유동인구가 줄어 주변 상권의 매출에도 부정적이라는 분석도 많다.
현행 유통산업발전법에 따르면 대형마트는 자정부터 오전 10시까지 영업할 수 없고, 월 2회 공휴일에 의무 휴업을 해야 한다. 온라인 쇼핑업체는 365일 24시간 영업이 가능하지만 대형마트는 의무휴업일은 물론 자정~10시까지 배달도 불가능해 역차별을 받고 있다는 지적이다.
대형마트가 주말 영업과 새벽배송에 제한을 받는 사이 쿠팡과 마켓컬리 등 온라인 유통 플랫폼들은 새벽배송으로 고속성장했다. 알리, 테무 등 중국 플랫폼들까지 가세해 국내 온라인 유통 시장을 빠르게 잠식하고 있는 가운데 휴일이나 새벽에 대형마트의 온라인 배송을 허용하는 유통산업발전법 개정안은 자동 폐기 수순을 밟고 있다. 총선을 앞두고 국회에서 관련 법 논의에 소극적인 탓이다.
대형마트 의무휴업일 폐지는 윤석열 정부의 ‘규제 개혁 1호’ 과제였던 만큼 지역 실정과 이용 편의를 고려해 의무휴업일을 일요일에서 평일로 바꾸는 등 규제를 완화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정부는 22대 국회가 문을 열면 대형마트의 온라인 새벽배송에 길을 터주는 유통법 개정안을 발의한다는 계획이다.
④ 동일인 지정제도 개선
“전 세계 유일 ‘동일인 제도’…빈살만도 자료 내야”
1986년 기업집단 규제와 함께 도입된 ‘동일인 지정제도’도 글로벌 스탠더드에 역행하는 규제로 지목된다. 당시 일부 기업의 경제력 집중을 막기 위해 단지 기업의 규모를 이유로 제재하기 위해 도입된 한국에만 있는 갈라파고스 규제다.
동일인 지정제도는 자산 5조원이 넘으면 대기업집단을 지배하는 총수로 정해 각종 신고와 자료 제출을 의무화하고, 사익편취 규제를 적용하는 것이다. 허위 자료를 제출하거나 누락하면 형사처벌 대상이 되기 때문에 동일인에게 과도한 책임을 지운다는 지적이 제기돼 왔다.
공정거래법상 기업집단은 매년 계열사를 신고해야 하는데 단순 자료 누락, 오기만으로도 동일인(자연인 한정)이 형사처벌을 받을 수 있다. 공정거래위원회는 2022년 삼성전자가 대기업집단 지정을 위한 자료를 제출하는 과정에서 계열사 사외이사가 보유한 회사 3곳에 대한 자료를 누락했다는 이유로 이재용 회장에게 경고 처분을 내린 바 있다.
외국기업이나 외국인이 자산 5조원 이상의 법인을 세우는 경우 해당 기업 총수도 동일인으로 지정하기 때문에 외국 자본의 국내 투자 유치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우려도 나온다.
현행 제도하에서는 울산에 세계 최대 규모 석유화학플랜트를 세우는 ‘샤힌 프로젝트’를 추진 중인 에쓰오일의 경우 실질적인 대주주인 사우디아라비아 왕실의 빈 살만 왕세자가 동일인으로 지정돼 매년 친족의 주식과 사업 현황을 파악해 서류를 제출해야 한다.
외국인 동일인 지정은 국내 투자를 위축하거나 철회할 가능성을 높이고 투자자-국가 간 소송(ISD) 가능성을 높일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이수원 대한상의 기업정책팀장은 “제도를 도입한 1970~80년대는 창업 1세대가 급속성장하는 과정에서 국내시장의 경제력 집중을 경계했던 시기라면 한 세대 이상이 지난 지금은 세계시장에서 글로벌 경쟁력을 다투는 시대”라며 “동일인 지정제도가 우리 기업의 발목을 잡는 규제가 되지 않도록 예측가능성과 기업 수용성을 고려한 전면 재검토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⑤ 킬러규제 신속 제거
기업 투자·청년일꾼 몰리는 산업현장의 조건
산업입지법과 외국인고용법 등 기업 투자를 저해하는 킬러규제 제거도 시급하다. 그간 경제계는 유해 화학물질 관리 체계를 개편하는 화평법·화관법 개정안과 환경영향평가법 개정안, 외국인고용법 개정안, 산업집적법 개정안, 산업입지법 개정안 등 6건을 대표적인 킬러규제로 지목하고 국회 통과를 촉구해왔다.
킬러규제 6건 중 4건은 국회를 통과했지만 산업입지법, 외국인고용법은 미처리됐다. 산업입지법 개정안은 산단 내 카페, 체육관 등의 생활편의시설을 설치할 수 있도록 하는 법안이다.
그간 산업화와 경제성장의 중추적 역할을 해온 산업단지는 노후화하고 편의시설 부족으로 경쟁력을 잃고 있었다. 기업이 투자하고 청년이 찾는 경쟁력 있는 산업단지로 탈바꿈하기 위해 산업단지 내 토지용도변경 절차와 복합용지 신설 절차 간소화가 골자다.
외국인고용법 개정안은 비전문 외국인력(E-9)이 10년간 출국 없이 지속 근무를 할 수 있도록 해 산업 현장 인력의 활용과 관련해 연속성을 높이면서 생산가능인구 감소에 대응하는 것을 골자로 한다.
현재 숙련된 외국인 근로자가 E-9 비자로 한국에 머물 수 있는 기간은 최장 9년 8개월이나, 4년 10개월 일한 뒤 본국에 잠시 머물렀다가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4년 10개월을 더 일할 수 있는 구조다.
인력수급에 어려움을 겪는 조선업 등 제조업 현장에서 효율적 인력 운용이 가능해져 인력난 완화가 기대된다. 대한상의는 “기업 활력과 투자촉진을 위해 파급력이 큰 규제개선을 하려면 국회의 입법지원이 절실하다”고 강조했다.
안옥희 기자 ahnoh05@hankyung.com
한국은 각종 규제로 둘러싸인 ‘규제공화국’이다. 국회의원 발의를 통한 규제 입법이 우후죽순 쏟아지며 기업 투자를 가로막고 한국 경제성장을 저해하는 주된 요인으로 꼽힌다. 과도한 규제는 경제의 비효율성을 증가시키며 기업의 혁신 의욕과 창의성 저하로 이어져 경제 활력을 상실하게 만든다. 규제가 많을수록 경제 성장력은 약화될 수밖에 없다.
출범 때부터 규제를 ‘기업의 모래주머니’라 비유하며 과감한 규제 철폐를 강조해온 윤석열 정부는 출범 이후 ‘킬러규제’를 포함해 1700여 건의 규제 개선을 완료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기업이 피부로 느끼는 체감도는 아직 미흡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양적으로는 성과를 거뒀지만 관련 법규 개정과 이해관계자 조정이 이뤄지지 않아 질적으로는 여전히 부족하다는 것이다.
한경비즈니스는 4월 총선을 앞두고 대한상공회의소에 의뢰해 올해 가장 시급한 규제 개혁 과제 중 노동시장·기업제도·경제활력·투자활력 등 4가지 리빌딩 전략과 5개 규제 개선 과제를 선정했다.
대한상공회의소가 소통플랫폼을 통해 5242명의 국민·기업인·전문가의 의견을 모아 국회와 각 정당에 제출한 ‘제22대 총선에 바라는 국민과 기업의 제안’ 건의서 내용 중 낡은 기업환경 혁신을 위해 개선이 필요한 규제 중 핵심 의제를 5개 키워드로 정리한 것이다.
① 노사관계 선진화
대립·투쟁적 노조 문화에 힘의 균형 상실
반도체 적자 탈출을 눈앞에 두고 있는 삼성전자는 최근 임금 교섭을 매듭짓지 못해 ‘노조 리스크’라는 복병을 만났다. 성과급에 대한 불만으로 조합원 수가 급증하면서 창립 5년 만에 노조 조합원 수가 2만 명을 넘어섰다.
노사갈등이 커지면서 사상 첫 파업이 현실화할지에 대한 우려도 커지고 있다. 파업 이슈는 최근 주주총회에서도 화두였다. 한 주주의 파업 우려에 대해 한종희 삼성전자 부회장은 “언제나 대화의 창을 열어두고 소통에 임해 노조가 파업에 이르지 않도록 노력할 것”이라면서도 “다만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노동조합이 파업을 할 경우 관계 법령이 허용하는 범위 내에서 가용한 수단을 동원해 경영 및 생산 차질을 최소화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미국 헤리티지재단의 ‘2024 경제자유지수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은 184개국 중 종합 순위 14위로 ‘거의 자유’ 등급을 받았다. 다만 노동시장 항목에서는 ‘부자유’ 등급으로 87위에 머물렀다. 헤리티지재단은 “한국의 노동시장은 역동적이지만 규제 경직성이 아직 존재하며 강성노조가 기업 비용을 증가시키고 있다”고 평가했다.
한국의 노사관계 경쟁력은 세계 최하위 수준으로 코리아 디스카운트의 원인으로도 지목된다. 스위스 국제경영개발대학원(IMD)이 발표한 국가경쟁력 평가에서 한국의 노동시장 경쟁력은 조사 대상 64개국 중 39위 수준이다.
파업 시 대체근로 금지, 사업장 점거 허용, 사용자 부당노동행위 형사처벌 등 노조와 파업에 대해서는 강력한 보호가 이뤄지고 있는데 반해 노조 파업권에 대응해 기업의 생산활동을 보호하는 법제도는 미비하다.
대한상의는 “대립적 노사관계는 국가경쟁력 제고와 일자리 창출에 가장 큰 걸림돌”이라며 “공정한 노사관계 제도가 정비돼야 하며 특히 이중처벌 우려가 있는 사용자 부당노동행위 형사처벌 규정을 삭제해 고소·고발 남용을 방지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② 비대면 진료 허용
해외서 활로 찾는 비대면 진료 스타트업들
비대면 진료 플랫폼을 운영하는 A사는 2023년 5월 감염병 위기경보 단계가 낮아지면서 비대면 진료의 법적 근거가 사라진 한국에서 사업을 영위하기 어려워졌다. 이에 A사는 비대면 진료 규제가 풀린 일본으로 진출할 수밖에 없었다.
현재 비대면 진료는 의료법 개정 없이 보건복지부 시범사업으로 진행 중이다. 대한상의는 비대면 진료 법제화로 국민 의료 접근성과 편의성을 높여야 한다고 제시했다. 정부는 지난 2월 23일부터 비대면 진료를 전면 확대해 의료취약 지역이 아닌 곳에서도 ‘평일’에, 의원뿐 아니라 ‘병원급 이상’ 의료기관에서도 가능하게 했다.
의료 파업으로 인한 ‘비상진료체계’ 시행으로 다시 한시적으로 비대면 진료가 가능해졌지만 법이 개정되지 않는 한 관련 사업을 영위하는 업체들은 한국에서의 안정적 사업 전개가 불확실한 상황이다.
전공의 이탈이 본격화한 후 정부가 이로 인한 의료 대란을 해소하기 위해 비대면 진료를 한시 허용하면서 비대면 진료 플랫폼들이 의료 공백을 막는 구원투수 역할을 하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비대면 진료 플랫폼 닥터나우에 따르면 최근 비대면 진료 수는 일평균 2000건을 기록하고 있다. 한 달 전 1200건 수준에서 1.7배로 급증했다.
하지만 약 배송이 안전상 이유로 여전히 금지돼 있어 비대면 진료를 받고도 약은 대면 수령하는 상황이 발생하고 있다. 의약품 오남용과 배송 과정에서의 변질 우려, 대면 복약지도 원칙 등의 이유 때문이다. 약 배송 문제는 총선에서도 화두다. 여당은 비대면 진료 약 배송 허용을 공약으로 내걸었다. 반면 야당은 비대면 진료 허용범위 최소화와 공적 전자처방전 도입을 추진 중이다.
한국에서 비대면 진료 제도화 논의가 지지부진한 사이 해외에서는 ICT 기술혁신과 제도정비와 맞물려 관련 사업이 활성화되고 있다. 미국에선 원격의료서비스 플랫폼 ‘아마존 클리닉’이 미국 전역으로 확대됐다.
아마존 웹 사이트나 모바일 앱에서 의사와 환자를 연중무휴로 연결해주는 서비스다. 결막염, 탈모, 축농증 등 수십 가지 경증 질환에 대해 화상 채팅과 메시지 기반 상담으로 원격 의료를 받을 수 있다. 디지털 약국 ‘아마존 파머시’를 통해 처방약을 드론으로도 배송받을 수 있다.
대한상의는 “코로나19 팬데믹 기간 동안 비대면 진료의 효과성과 안전성이 입증된 만큼 안전장치 마련 등을 통해 법제정비가 필요하다”며 “약 배송은 규제샌드박스 실증을 거쳐 안전성을 검토한 후 단계적 법제정비를 해야 한다”고 말했다.
③ 대형마트 규제
12년 족쇄에 발목 잡힌 대형마트들, 쿠팡에 밀리고 알리에 치여
12년째 대형마트에 적용 중인 공휴일 의무휴업 제도도 개선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꾸준히 제기되고 있다.
대형마트 영업 규제는 골목상권 침해를 막는다는 취지로 2012년 도입됐으나 소비자는 휴일에 장보기 어려운 불편을 겪고 있고, 원래 취지인 전통시장 매출이 늘어나기보단 온라인 장보기 매출이 커지며 실효성 논란을 겪어왔다. 대형마트가 의무휴업할 경우 유동인구가 줄어 주변 상권의 매출에도 부정적이라는 분석도 많다.
현행 유통산업발전법에 따르면 대형마트는 자정부터 오전 10시까지 영업할 수 없고, 월 2회 공휴일에 의무 휴업을 해야 한다. 온라인 쇼핑업체는 365일 24시간 영업이 가능하지만 대형마트는 의무휴업일은 물론 자정~10시까지 배달도 불가능해 역차별을 받고 있다는 지적이다.
대형마트가 주말 영업과 새벽배송에 제한을 받는 사이 쿠팡과 마켓컬리 등 온라인 유통 플랫폼들은 새벽배송으로 고속성장했다. 알리, 테무 등 중국 플랫폼들까지 가세해 국내 온라인 유통 시장을 빠르게 잠식하고 있는 가운데 휴일이나 새벽에 대형마트의 온라인 배송을 허용하는 유통산업발전법 개정안은 자동 폐기 수순을 밟고 있다. 총선을 앞두고 국회에서 관련 법 논의에 소극적인 탓이다.
대형마트 의무휴업일 폐지는 윤석열 정부의 ‘규제 개혁 1호’ 과제였던 만큼 지역 실정과 이용 편의를 고려해 의무휴업일을 일요일에서 평일로 바꾸는 등 규제를 완화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정부는 22대 국회가 문을 열면 대형마트의 온라인 새벽배송에 길을 터주는 유통법 개정안을 발의한다는 계획이다.
④ 동일인 지정제도 개선
“전 세계 유일 ‘동일인 제도’…빈살만도 자료 내야”
1986년 기업집단 규제와 함께 도입된 ‘동일인 지정제도’도 글로벌 스탠더드에 역행하는 규제로 지목된다. 당시 일부 기업의 경제력 집중을 막기 위해 단지 기업의 규모를 이유로 제재하기 위해 도입된 한국에만 있는 갈라파고스 규제다.
동일인 지정제도는 자산 5조원이 넘으면 대기업집단을 지배하는 총수로 정해 각종 신고와 자료 제출을 의무화하고, 사익편취 규제를 적용하는 것이다. 허위 자료를 제출하거나 누락하면 형사처벌 대상이 되기 때문에 동일인에게 과도한 책임을 지운다는 지적이 제기돼 왔다.
공정거래법상 기업집단은 매년 계열사를 신고해야 하는데 단순 자료 누락, 오기만으로도 동일인(자연인 한정)이 형사처벌을 받을 수 있다. 공정거래위원회는 2022년 삼성전자가 대기업집단 지정을 위한 자료를 제출하는 과정에서 계열사 사외이사가 보유한 회사 3곳에 대한 자료를 누락했다는 이유로 이재용 회장에게 경고 처분을 내린 바 있다.
외국기업이나 외국인이 자산 5조원 이상의 법인을 세우는 경우 해당 기업 총수도 동일인으로 지정하기 때문에 외국 자본의 국내 투자 유치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우려도 나온다.
현행 제도하에서는 울산에 세계 최대 규모 석유화학플랜트를 세우는 ‘샤힌 프로젝트’를 추진 중인 에쓰오일의 경우 실질적인 대주주인 사우디아라비아 왕실의 빈 살만 왕세자가 동일인으로 지정돼 매년 친족의 주식과 사업 현황을 파악해 서류를 제출해야 한다.
외국인 동일인 지정은 국내 투자를 위축하거나 철회할 가능성을 높이고 투자자-국가 간 소송(ISD) 가능성을 높일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이수원 대한상의 기업정책팀장은 “제도를 도입한 1970~80년대는 창업 1세대가 급속성장하는 과정에서 국내시장의 경제력 집중을 경계했던 시기라면 한 세대 이상이 지난 지금은 세계시장에서 글로벌 경쟁력을 다투는 시대”라며 “동일인 지정제도가 우리 기업의 발목을 잡는 규제가 되지 않도록 예측가능성과 기업 수용성을 고려한 전면 재검토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⑤ 킬러규제 신속 제거
기업 투자·청년일꾼 몰리는 산업현장의 조건
산업입지법과 외국인고용법 등 기업 투자를 저해하는 킬러규제 제거도 시급하다. 그간 경제계는 유해 화학물질 관리 체계를 개편하는 화평법·화관법 개정안과 환경영향평가법 개정안, 외국인고용법 개정안, 산업집적법 개정안, 산업입지법 개정안 등 6건을 대표적인 킬러규제로 지목하고 국회 통과를 촉구해왔다.
킬러규제 6건 중 4건은 국회를 통과했지만 산업입지법, 외국인고용법은 미처리됐다. 산업입지법 개정안은 산단 내 카페, 체육관 등의 생활편의시설을 설치할 수 있도록 하는 법안이다.
그간 산업화와 경제성장의 중추적 역할을 해온 산업단지는 노후화하고 편의시설 부족으로 경쟁력을 잃고 있었다. 기업이 투자하고 청년이 찾는 경쟁력 있는 산업단지로 탈바꿈하기 위해 산업단지 내 토지용도변경 절차와 복합용지 신설 절차 간소화가 골자다.
외국인고용법 개정안은 비전문 외국인력(E-9)이 10년간 출국 없이 지속 근무를 할 수 있도록 해 산업 현장 인력의 활용과 관련해 연속성을 높이면서 생산가능인구 감소에 대응하는 것을 골자로 한다.
현재 숙련된 외국인 근로자가 E-9 비자로 한국에 머물 수 있는 기간은 최장 9년 8개월이나, 4년 10개월 일한 뒤 본국에 잠시 머물렀다가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4년 10개월을 더 일할 수 있는 구조다.
인력수급에 어려움을 겪는 조선업 등 제조업 현장에서 효율적 인력 운용이 가능해져 인력난 완화가 기대된다. 대한상의는 “기업 활력과 투자촉진을 위해 파급력이 큰 규제개선을 하려면 국회의 입법지원이 절실하다”고 강조했다.
안옥희 기자 ahnoh05@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