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바마도 감동한 ‘삼체’…SF물이 보여주는 미래는? [김희경의 컬처 인사이트]
입력 2024-04-11 09:30:17
수정 2024-04-11 09:30:17
“작품 스케일이 워낙 커서 백악관의 일상사가 사소하게 느껴졌다.”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은 2016년 재임 시절 휴가지에서 한 소설을 읽었다. 그리고 극찬을 쏟아냈다고 한다. 백악관 일들이 사소하게 느껴졌다니, 과연 어느 정도의 작품인 걸까. 그가 읽은 책은 2008년 발간된 중국 작가 류츠신의 SF소설 ‘삼체’이다. 이 작품의 누적 판매량은 900만 부에 달한다. 2015년엔 ‘SF계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휴고상을 아시아 최초로 차지했다.
‘삼체’가 최근 다시 큰 화제가 되고 있다. 지난 3월 이 소설을 원작으로 한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삼체’가 공개되며 전 세계인의 사랑을 받고 있다. ‘삼체’엔 넷플릭스 콘텐츠 사상 가장 많은 제작비가 투입됐다. 8회에 해당하는 시즌1에 1억6000만 달러(약 2160억원)가 들어간 것으로 알려졌다. 시리즈물 ‘왕좌의 게임’을 각색한 데이비드 베니오프와 D. B. 와이스가 기획 및 제작에 참여하기도 했다. 제작 전부터 큰 기대를 모았던 만큼 공개 직후 넷플릭스 시리즈 가운데 글로벌 1위를 차지했다. 작품을 본 이용자들은 ‘삼체’가 담아낸 압도적이고 경이로운 세계관, 놀라운 시각특수효과(VFX) 등에 감탄하고 있다.
올 들어 ‘삼체’, ‘듄: 파트 2’ 등 글로벌 SF 대작이 잇달아 나오며 콘텐츠 시장을 뜨겁게 달구고 있다. SF물은 이전에도 꾸준히 제작되어 왔다. 이 작품들은 한발 더 나아가 기존의 SF물 계보를 잇는 것은 물론 새로운 이정표를 제시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SF물은 콘텐츠 산업과 기술의 발전을 보여주는 지표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의 무한한 상상력, 이를 생생하게 구현하는 첨단기술이 결합해 만들었으니까. 그래서인지 글로벌 SF 대작의 성공과 발전이 더욱 반갑다. “너희는 벌레다”…섬뜩한 경고와 예언을 담은 SF
SF는 ‘Science Fiction’의 약자로 ‘공상과학’을 의미한다. 과학적 이론을 바탕으로 하면서도 상상력을 더해 스토리를 만들어낸 작품을 이른다. 주요 소재로는 우주, 포스트 휴먼 등이 활용되고 있다. ‘삼체’처럼 소설부터 영화, 드라마 등 영상 콘텐츠까지 다양하게 만들어지고 있다.
그중 SF 영상 콘텐츠의 역사는 생각보다 훨씬 오래전부터 시작됐다. 최초의 SF영화는 1902년 조르주 멜리아스 감독의 ‘달세계 여행’이다. 우주를 향한 인간의 상상력은 기술력보다 한참을 앞서 나가 있었던 것이다. 1968년 개봉한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영화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는 이를 여실히 증명한 작품이다. 이 작품은 아날로그 기술로 우주와 우주선 등을 실감나게 표현, 큰 충격을 선사했다. 우주에서 움직이는 우주선을 표현하기 위해 기어박스에 모델을 매달고 조금씩 전진시키며 한 프레임씩 찍은 일화도 유명하다. 부족한 기술력에도 머릿속 무한한 세계를 눈앞에 생생하게 펼쳐 보이고자 한 거장 감독의 장인정신이 깃든 것이다. 덕분에 이 영화는 오늘날까지 영화사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SF 작품으로 꼽히고 있다. 그리고 1977년에 이르러 마침내 조지 루카스 감독의 ‘스타워즈’ 시리즈가 탄생했다. ‘스타워즈’ 시리즈는 영화사 전체를 뒤바꾼 강력하고 성공한 명작으로 평가받고 있다. ‘스타워즈’를 비롯해 SF 콘텐츠에 막강한 팬덤이 형성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이처럼 SF 콘텐츠의 폭발적 성장을 이뤄낸 명작들엔 공통점이 있다. 앞을 내다보는 ‘예언적 효과’이다. 우주 개발을 둘러싼 각국의 치열한 경쟁, 인공지능(AI)의 발전, 인간 존엄성의 위협 등이다. 이 모든 것이 이뤄지기 한참 전부터 이런 예언들을 해냈다는 점이 놀랍기만 하다. 현실과 과학적 이론을 철저히 조사한 후 이를 바탕으로 꽃을 피워낸 인간의 상상력은 미래까지 정확히 예측할 수 있는 것이다.
‘삼체’는 그런 의미에서도 더욱 눈여겨볼 작품이다. ‘삼체’는 과학 기술의 오용과 윤리 문제 등 과거부터 시작해 현재, 미래까지 이어질 다양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 작품은 1966년 중국 문화대혁명 시기로부터 시작된다. 물리학 교수 아버지의 가르침을 받았던 여성 과학도 예원제(자인 쳉)는 아버지가 상대성 이론을 가르쳤다는 이유로 인민재판을 받고 죽음을 맞이한 이후 큰 고초를 치른다. 그러다 자신의 천재성 덕분에 중국의 비밀 천문 실험에 참여하게 되고, 외계인이 보낸 전파를 발견하게 된다. 이 외계인들은 3개의 태양이 뜨는 자신들의 행성에선 더 이상 살아가기 힘들어진 존재들로, 새로운 행성을 찾아야만 하는 상황에 처해 있다. 그리고 예원제는 서로를 배신하고, 남의 성과를 빼앗으며, 무분별하게 나무를 베는 등 인간의 이기적인 행위에 환멸을 느꼈던 인물이다. 그리하여 예원제는 이 외계인들의 전파에 몰래 응답하고 지구 정복을 돕기로 한다.
그렇다고 다른 SF물처럼 곧장 외계인 침공이 일어나지 않는다. 400년 후에야 지구에 당도하게 될 외계인이 그동안 인간이 이룩할 기술 발전을 우려해 과학자들의 연구를 방해한다는 설정이다. 즉 스펙터클한 전투를 보여주는 게 작품의 목적이 아닌 것이다.
‘삼체’는 각종 과학적 이론을 바탕으로 하는 것은 물론이고, 가상현실(VR) 게임을 통해 인간에게 외계 문명을 소개하고 체험하게 하는 기발하고도 감각적인 설정을 내세운다. 무엇보다 인상적인 점은 작품을 관통하는 강렬한 메시지이다. 이 작품은 “너희는 벌레다”라는 표현 하나로 인간 자체에 대한 근원적 회의와 허무를 단숨에 드러낸다. 외계인에 맞서 여러 시도를 하던 과학자들조차 무력함을 느끼고 좌절하게 된다. 과연 인류는 이 불안과 허무를 극복하고 나아갈 수 있을까. 그러기 위해선 어떤 노력과 선택을 해야만 할까. ‘삼체’는 예원제와 옥스퍼드 5인방 과학자의 이야기를 통해 이 같은 다양한 질문을 던진다. 한계 보였던 한국 SF는 성장 가능할까
놀라움과 경이로움을 선사하는 글로벌 SF 대작들이 한창 화제가 되고 있는 가운데, 아쉽게도 아직 한국 SF 콘텐츠의 큰 성공 사례는 찾아보기 힘들다. 1960년대에 ‘투명인의 최후’(1960), ‘우주괴인 왕마귀’(1967) 등이 나왔지만 외국 작품에 비해 기술력이나 스케일 등이 부족하다 보니 대중적 확산은 쉽게 이뤄지지 않았다. 2000년대에 들어서야 ‘예스터데이’(2002), ‘원더풀 데이즈’(2003) 등이 나왔지만 이 작품들 또한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지 못했다.
그러다 2021년 ‘승리호’가 넷플릭스에서 공개되며 화제가 됐다. ‘승리호’는 한국 최초의 우주 SF물로, 1000여 명에 달하는 국내 VFX 전문가들이 참여해 광활한 우주를 펼쳐 보였다. 이외에도 ‘서복’(2021), ‘정이’(2023) 등이 잇달아 나오며 새로운 확장 가능성을 보여줬다. 하지만 한국 SF물은 기술적 진보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많은 한계를 보이고 있다. 새로운 이야기가 나올 줄 알았지만 결국 가족애, 사랑 이야기 등으로 흘러가면서 신파 논란이 불거지기도 했다. 한국 SF 콘텐츠 역시 이전과는 확연히 달라진 외형에 맞춰 더 커다란 상상력과 세계관을 펼쳐 보여야 하지 않을까.
‘점묘법(점을 찍어 그림을 그리는 방식)’으로 유명한 프랑스 화가 조르주 쇠라의 대표작 ‘그랑자트 섬의 일요일 오후’엔 화창한 날씨에 산책과 피크닉을 즐기는 사람들의 모습이 담겨 있다. 파리지앵의 한가하고 즐거운 순간을 그린 것만 같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뭔가 이상한 점들을 발견할 수 있다. 작품 속 대부분의 사람들은 움직임이 없는 정지 상태이다. 서로 마주 보지도 않고 얼굴이 비어 있어 표정을 알 수도 없다. 산업화 시대의 풍요를 담은 동시에 소외되고 무기력한 인간의 모습을 포착한 것이다.
엄청난 속도의 기술 발전을 경험하고 있는 현대인들이 느끼는 감정도 비슷하다. 갈수록 편리해지는 세상이 반갑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AI 등에 의해 소외되고 잠식당할지 모른다는 불안을 갖고 있다. 앞으로도 SF물이 지속해서 나오고 발전할 수밖에 없는 이유도 여기에 있지 않을까. 그리고 한국 SF 콘텐츠 역시 이 같은 양가적 감정을 파고든다면 얼마든지 성공할 수 있지 않을까. 희망의 곁엔 늘 불안이 싹트기 마련이고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는 어쩌면 함께 찾아오는 것일지 모르니.
김희경 한국예술종합학교 겸임교수, 영화평론가 pressia@daum.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