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솟은 아파트 가격에 이젠 '가성비' 좋아진 옛 부촌 평창동과 서래마을 [비즈니스 포커스]
입력 2024-04-11 06:00:11
수정 2024-04-11 06:00:11
가나아트센터를 지나 언덕을 오르니 점점 도심과 다른 공기가 느껴졌다. 맑은 공기를 마시다 보니 숨이 차오르는데도 호흡기가 편안했다. 인적이 워낙 드물어 간혹 새소리와 길을 지나는 차 소리 외에 어떤 소음도 없이 조용했다.
봄 날씨가 본격화한 4월 1일 오후 서울 종로구 평창동 주택가는 ‘전통 부촌’다운 모습을 자랑했다. 낮은 높이의 건물들이 층층이 언덕을 타고 북한산에 둘러싸인 모습이 장관이었다. 담장이 높고 대지가 넓어 보이는 단독주택들 사이로 갤러리가 드문드문 자리했다.
1968년 ‘김신조 사건’이라고 불렸던 청와대 기습미수 사건을 계기로 평창동 일대에 고급주택가가 조성되기 시작했다. 높은 지대에서 아래를 내려다보자 당시 북한 공작원들의 침투를 겪었던 청와대가 북한산 자락을 개발하려 했던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개발독재 시절 이래 수십 년간 ‘재벌 동네’라는 명성을 이어온 평창동에 변화의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 올초 가수 이효리·이상순 부부를 비롯해 유명 연예인들이 이곳에 부동산을 매입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부터다. 흔히 강남권에 밀집돼 있던 연예인 주거지가 강북 한강변인 성수동과 한남동을 거쳐 더 서북쪽인 평창동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평창동 주민과 인근 부동산 관계자에 따르면 이 같은 변화의 흐름은 이미 2~3년 전부터 본격화하기 시작했다.
오랫동안 지속된 저금리 정책에 코로나19 확산에 따라 시장에 유동성이 대거 풀렸고, 이에 따라 환금성이 좋은 서울 주요 지역 아파트 가격이 천정부지로 올랐다. 올려다보기도 어려웠던 평창동 주택의 가격대는 점차 합리적인 수준으로 시장에 받아들여지게 됐다.
변화한 주거 트렌드도 다소 고루했던 평창동의 이미지를 바꾸는 데 한몫하고 있다. 부동산 시장이 서울 중심부와 근교 사이에서 양극화하는 가운데 특색 있고 쾌적한 주거지를 찾는 수요가 ‘도심 속 쉼터’에 주목하고 있는 것이다. 재벌 3세 떠난 자리, 연예인·예술인 입주
지난 명성과 달리 10여 년간 평창동은 급격한 침체를 겪어야 했다. 정부서울청사 내에 주요 부처들이 세종청사로 이전했고, 대기업 계열사들의 사옥도 어느새 강북 도심권역이 아닌 강남권에 자리 잡고 있었다. 서울 ‘사대문’의 권력과 자원은 급격히 분산됐다.
그런 가운데 나라를 이끌던 재벌 등 사회 지도층이 세대교체를 겪으며 평창동을 떠나기 시작했다. 1세대와 달리 2~3세대는 한강변이나 강남 고급주택을 선호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부동산 업계에선 “평창동에 빈집이 많다”는 이야기가 들리기 시작했다. 한 채에 수십억원씩 하는 단독주택은 아파트와 달리 신속하게 매수인을 찾기가 어려웠고 경제적 여유가 있는 일부 집주인들은 상속받은 주택을 굳이 매도할 생각 없이 비워둔 채 소유하기도 했다.
수요자들이 평창동, 성북동 대신 번화가와 가까운 일명 ‘핫플레이스’에 몰린 영향도 크다. 노후 주택이 많고 언덕이 많은 지형에 지하철 등 대중교통 접근성이 떨어지는 것 또한 단점으로 지적됐다. 북악터널로 이어지는 대로변 인근을 제외한 평창동 토지 대부분은 제1종전용주거지역(법정 용적률 50% 이상 100% 이하), 대공방어협조구역 등으로 묶여 있어 저층인 단독주택이나 19가구 이하 다세대주택 등만 개발이 가능하다. 개발수익을 노린 투자수요가 유입되기도 어려운 환경이다.
그런데 최근 평창동에 예술인들이 모여들고 있다. 전시와 작업공간 등 한적하고 넓은 장소가 필요한 예술인들에게 평창동 주택가가 제격이라는 것이다. 지역에 이미 미술시장이 형성된 영향도 있다.
평창동에는 1980년대 후반부터 미술관들이 속속 문을 열었다. 1998년 평창동으로 이전한 가나아트센터를 랜드마크 삼아 토탈미술관, 서울옥션 등이 평창로를 따라 일대에 ‘갤러리 거리’를 형성했다. 몇 년 전부터는 이 일대를 중심으로 노후하거나 비어 있는 주택들이 새로운 부지를 공급하는 역할을 하면서 다시 갤러리로 개발되고 있다. 삼세영갤러리, 피카고스 갤러리 등이 대표적이다.
특히 가나아트센터 전면 도로는 평창동 주택가의 ‘메인 거리’를 이룬다. 지난해와 올해 평창동으로 이사했다고 알려진 유명 연예인들 자택 대부분이 이 거리 북쪽 일대에 모여 있다. 평창동 소재 A공인중개사무소 대표는 “평창동 주택가가 워낙 넓고 다양한 주택이 많지만 470에서 480번지 일대가 가장 잘나가는 곳”이라며 “연예인 등 유명인들이 주택이나 토지를 매수한 곳도 가나아트센터 거리 근방”이라고 설명했다.아파트값 상승에 ‘가성비’ 높아져
사생활 보호가 필요한 연예인에게 평창동은 더욱 주목받고 있다. 평창동에 밀집된 단독주택이나 고급빌라는 아파트와 달리 이웃과 잦은 접촉이 필요없다. 게다가 수도권 근교 전원주택처럼 거주 환경도 쾌적하다.
이 같은 강점으로 인해 가수 이효리뿐 아니라 배우 이동욱, 사업가 겸 모델 홍진경을 비롯해 이미 부동산을 사들인 것으로 알려진 유명인들 말고도 많은 연예인들이 임차하거나 매수할 만한 평창동 주택을 알아보고 있다. 강남지역 부동산들이 거래 건수를 올리기 위해 평창동 매물을 취급하게 된 영향도 있다. 일부 부동산은 지역 부동산에 나온 주택 소유주에게 접근해 ‘매물 빼가기’를 시도하기도 한다.
평창동 주택가 인근 S공인중개사무소 관계자는 “경기도 전원주택이 좋긴 하지만 서울에서 양평 같은 곳까지 가기에는 너무 멀다”며 “강남 같은 번화가가 지겨워 도심 속 타운하우스 느낌을 찾는 고객들이 평창동 주택에 관심을 갖는 것 같다”고 말했다.
서울 중심권 아파트에 비해 상대적으로 가격이 저렴한 것도 장점으로 꼽힌다. 서초구 반포동 아파트 호가와 실거래가 여전히 주택 공급면적 기준 3.3㎡(평)당 1억원 선인 데 비해 평창동 주택은 높아도 부지면적 기준 3.3㎡당 4000만~5000만원 수준이다.
국토교통부 실거래가에 따르면 올해 2월 실거래된 한 단독주택은 대지면적 572㎡, 연면적 331㎡ 규모로 32억원에 손바뀜됐다. 강남 핵심지역에선 ‘국민평형’인 전용면적 84㎡(약 33평형) 새 아파트 한 채 가격이다. 넓은 공간과 사생활 보호를 선호하는 실수요자에게 평창동 주택은 ‘가성비(가격 대비 성능)’가 좋은 상품인 셈이다.
S공인중개사무소 관계자는 “돈이 필요한 집주인들은 급매로 집을 매도한 반면, 여유가 있는 집주인들은 높은 호가에 집을 내놓은 상태에서 가격을 낮추지 않아 부동산에서 ‘저게 나갈까?’라고 생각하기도 했다”며 “그런데 서울 아파트값이 너무 오르자 그 호가가 더 이상 비싼 수준이 아니게 되면서 실제 거래가 일어났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평창동 단독주택은 올해 1월과 2월 각각 4채와 2채가 팔려 총 6채가 거래됐다. 워낙 거래가 활발하지 않은 지역이라 거래량이 많지는 않지만 기준금리 인상이 본격화되기 전인 2022년 같은 기간 4채보다 오히려 늘었다. 비수기인 지난해 1월에는 단 한 건도 거래되지 않았었다.
고급빌라가 속한 다세대 거래 건수도 지난해 11월 7건을 기록하는 등 선방하고 있다. 이때 거래된 매물은 갤러리카운티 전용면적 204㎡ 타입, 가나힐하우스 전용면적 207㎡ 타입 등이다. 인근 주민은 “평창동이나 구기동, 부암동에 고급주택만 있는 것은 아니고 소형 연립, 빌라 등도 저렴한 매물이 많아 매매나 임대차로 나름 잘 거래가 된다고 들었다”고 말했다. 아파트와 연동된 고급주택 시장, 거래 뜸해
강남권에 이 같은 숲세권 주택가가 없는 것은 아니다. 서초구 반포4동부터 방배4동, 방배본동에 걸쳐 형성된 서래마을도 고급빌라와 단독주택이 많은 동네로 유명하다. 반포 상권이 가깝지만 쾌적한 환경을 갖춰 기업인을 비롯한 사회지도층과 외국인 유명 연예인들도 다수 거주하고 있다. 연기자 최수종·하희라 부부는 서래마을에 오래 거주하다 최근 평창동으로 이사한 것으로 알려졌다.
서래마을은 서울프랑스학교가 위치한 카페거리를 기점으로 서쪽과 남쪽에 위치한 동광단지, 신동광단지 일대에 고급주택이 밀집해 있다. 인근 부동산에 따르면 특히 서리풀공원 주변 단지에 대한 선호도가 높다.
반포동 소재 한 부동산 관계자는 “서래마을 빌라는 시세에 비해 평수가 넓고 쾌적한 주거환경 때문에 실거주 수요가 많아 특히 이사철에는 매매와 임차 문의가 많다”며 “그러나 신규 공급이 적어 전월세 매물이 늘 부족한 곳”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나 올해 들어 거래는 잠잠하다. 지난해 하반기 방배동 연립 및 빌라 매매는 매달 20~30건을 넘겼지만 올해 1월과 2월은 각각 16건, 17건에 그쳤다. 금리가 워낙 오른 데다 잠재 매수인들이 기존에 보유하던 주택을 처분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부동산 관계자는 “인근 아파트 주민 등 다른 강남권 고객들로부터 매수 문의는 오지만 기존에 보유한 물건이 팔리지 않아 실거래까지 연결되지는 않는 편”이라고 밝혔다.
대표적인 곳은 재건축을 추진 중인 ‘강남원효성빌라’다. 1984년 준공된 해당 단지는 103가구에 불과하지만 서래마을 내 고급주택 단지 중에선 가장 규모가 큰 ‘대장주’다. 전용면적 146~216㎡ 대형 타입으로만 구성된 저층 단지라 가구별 대지지분도 높다.
강남원효성빌라 재건축조합은 지난해 민성진 건축가가 이끄는 SKM아키텍트를 설계사로 선정한 데 이어 올 하반기 시공사 선정에 나선다. 단지 인근에는 삼성물산, 현대건설, 대우건설, DL이앤씨 등 대형 건설사 현수막이 일제히 걸려 있었다. 현재 사업계획상 이 단지는 1대1 재건축과 전 가구 테라스 설계 등을 추진하고 있다.
강남원효성빌라는 지난해 9월 전용면적 190㎡ 타입이 39억원에 거래됐다. 이후 실거래 건수는 없다. 2020년과 2021년 집중적으로 손바뀜이 된 데다 최근 부동산 불경기에 따라 신규 투자수요의 진입 또한 정체된 상태다. 재건축 추가분담금 부담 문제로 기존 1대1 재건축 계획도 일반분양을 하는 방향으로 변경될 가능성이 있다.
방배동 소재 공인중개사무소 대표는 “대지권을 생각하면 투자하기 좋은 곳이지만 시중금리가 너무 오른 데다 공사비도 급등하면서 재건축 매수세가 꺾인 편”이라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요즘은 실거주하기 좋은 신축이 그나마 선호도가 높다”고 말했다.
민보름 기자 brmi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