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진 27년 영욕의 세월…다시 터널 들어간 대치동 은마아파트 재건축[비즈니스 포커스]
입력 2024-04-15 08:10:00
수정 2024-04-15 08:10:00
1996년 첫 출발 이래 강남 재건축 상징으로
김앤장VS화우…조합설립 뒤 조합·비대위 간 소송전 돌입
“이제는 몸에서 사리가 나올 지경이다.”
전 국민이 이름만 들어도 안다는 ‘강남 재건축의 상징’, 서울 강남구 대치동 소재 은마아파트를 장기 보유한 소유주의 말이다.
은마아파트는 지금은 해체된 한보그룹이 1976년 주택사업에 진출하며 지은 당시 국내 최대 아파트 단지이자 대표 상품이었다. 1979년 4424가구로 준공된 이래 ‘압구정 현대’와 함께 여전히 강남권에서 가장 상징적인 재건축 단지로 남아 있다.
은마아파트의 유명세는 대한민국 1등 학군지인 대치동 핵심 입지를 차지하고 있다는 강점은 물론 30년 가까이 재건축을 추진했으나 이제 조합설립이 될 정도로 사업 추진에 문제 요소가 많았다는 조롱이 어우러져 형성됐다. 강남 일대가 마천루로 변하는 동안 은마아파트만 여전히 노후화한 지금 상태로 남아 있는 ‘100년 후 강남구 모습’이라는 합성 이미지가 온라인에 퍼지며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이처럼 재건축 사업이 지연된 데는 ‘모난 돌이 정 맞는다’는 속담처럼 은마아파트가 견제 대상이 된 영향이 크다. 때마침 재건축 집행부 역시 시기별 정부·서울시 규제와 엇박자를 타기도 했다. 부동산 시장에 ‘재건축, 재개발은 하세월’이라는 투자 격언이 있다 하더라도 은마아파트는 최근에서야 조합설립에 성공하는 등 눈에 띄게 재건축 추진 과정이 더뎠다.
그 배경에는 이름값과 달리 낮은 재건축 사업성과 재건축 사업의 지휘봉을 잡으려는 세력들 간의 암투가 서려 있다. 세력들 간 다툼은 지금도 소송전으로 이어져 최근 순풍을 탔던 사업이 다시 암초에 걸린 상황이다. 은마라는 명성과 사업 규모만큼 조합과 비대위(비상대책위원회)는 각각 김앤장과 화우를 선임해 치열하게 맞서고 있다. 소송비용만 수억원에 달할 것으로 추정된다.
역설적으로 이 같은 상황은 은마에 대한 시장의 관심을 더 키워왔다. 일각에선 은마를 두고 ‘재건축 투기장’이라고 비난도 하지만 강남 재건축 대어이자 유망주로서 은마는 몸값을 불리고 있다. 20년간 조합설립도 못 해
은마아파트 재건축 사업이 지금에 이른 결정적인 이유는 안전진단 통과와 정비구역 지정(정비계획 수립) 절차가 길어진 데 있다. 이에 따라 은마아파트는 2003년 말 조합설립추진위원회 승인을 받은 이후 약 20년 만인 지난해 조합설립을 할 수 있었다.
현행 도시정비법(도시 및 주거환경정비법)상 재건축 초기 절차는 안전진단을 통과한 뒤 정비구역 지정을 받고 추진위에 이어 조합을 설립하는 순서로 이어진다. 그런데 은마아파트 재건축 사업은 도시정비법이 시행된 2003년 7월 전부터 추진돼 안전진단을 통과하지 않은 상태에서 각각 시공사 선정(삼성물산·GS건설)과 추진위 승인까지 마쳤다.
그러나 은마는 정식 추진위 설립 전인 2002년부터 안전진단에 세 차례 도전해 연거푸 고배를 마셔야 했다. 주택 매매뿐 아니라 전세가격까지 급등하던 상승기였기 때문이다. 은마아파트 재건축을 허가해주면 주택가격이 급등할 것이라는 정치적 판단이 작용했다.
은마아파트는 2003년 1차 관문인 재건축 예비안전진단을 실시한 이후 2차 관문 정밀안전진단을 진행해야 했지만 전세가 상승 등을 우려한 강남구 심의위원회에 의해 정밀안전진단 실시 자체가 부결됐다. 은마 추진위는 강남구청을 상대로 부당하다며 행정소송까지 진행했지만 2005년 12월 패소했다.
결국 첫 시도 후 8년이 지난 2010년이 돼서야 은마아파트는 안전진단 단계를 지나 다음 스텝으로 넘어갈 수 있었다. 2008년 금융위기 후 부동산 경기가 침체하면서 관련 규제가 완화됐기 때문이다. 집행부 경쟁, 정치판 방불케 해
그러나 이후에도 재건축 추진 과정은 순탄치 못했다. 사업 규모가 크고 이권이 많은 만큼 은마 재건축을 주도하고 자리를 차지하려는 각 집단의 경쟁은 정치판을 방불케 했다. 사업 진행에 불만을 표출하는 비대위(비상대책위원회)가 등장하고 그들에 의해 집행부가 바뀔 때마다 은마 재건축은 소송전으로 얼룩졌다. 기나긴 기다림 속에 추진위 집행부를 향한 소유주들의 불신도 각 세력 간 여론전과 갈등을 부채질했다.
낮은 사업성 역시 문제였다. 은마아파트는 전용면적 76㎡, 84㎡ 타입 중소형으로만 구성된 데다 기존 용적률이 200%를 넘는 일명 ‘중층 재건축(10층 이상 아파트)’으로 재건축 사업성의 기준과도 같은 조합원당 대지지분이 낮은 곳이다. 은마아파트는 제3종일반주거지역으로 법정 허용 용적률이 300%에 불과하다. 서울시 조례상 용적률을 적용하면 실제 건축이 가능한 총 연면적(건물 각 층 면적의 총 합계)은 이보다 작아진다.
현행 용적률이 적용된 은마아파트 정비계획(2023년 2월 고시)에 따르면 전용면적 76㎡ 타입 소유주가 가장 큰 109㎡ 타입 분양신청을 하면 분담금 7억7000만원을 내야 한다. 최근 급격히 오른 공사비를 고려하면 해당 계획대로 재건축했을 때 분담금은 더 높아질 전망이다.
집값이 한창 오르던 2004년에는 ‘소형 및 임대주택 의무비율’과 ‘재건축 초과이익환수제’가 도입되며 사업성에 타격을 줬다. 이에 은마아파트가 안전진단 통과 문제로 애를 먹었던 2005년에는 재건축 대신 리모델링을 추진하자는 주민들까지 등장하기도 했다.
더 본격적인 갈등은 안전진단 통과 직후 불거졌다. 2010년 서울시가 입찰을 통해 선정한 은마아파트 재건축 정비계획 업체가 단지 안에 15m 도로를 내는 안을 내놨기 때문이다. 여기에 부족한 사업성을 개선하기 위해 준주거 또는 상업지역으로 용도지역 종상향이 필요하다는 주장까지 제기됐다. 당시 타워팰리스 등 주상복합 인기가 높아지면서 잠실주공5단지 등 유명 재건축 아파트 단지들이 서울시에 용도지역변경을 요구할 때였다. 이 과정에서 나온게 ‘49층 주상복합 계획’이었다. 이 아이디어는 10년 이상 은마아파트의 정비구역 지정을 막는 원인이 됐다.
‘은마재산찾기위원회’를 비롯한 일부 소유주들은 조병호 위원장 체제에서 안전진단 통과 후 사업이 지지부진했던 점, 용도지역 변경 등 적극적인 사업성 개선 방안이 필요하다는 점을 들어 기존 집행부를 공격했다. 결국 2011년 7년간 은마 추진위를 이끌었던 조 위원장은 재임에 실패했다. 조 위원장 대신 ‘은마재산찾기위원회’의 대표 격이었던 이정돈 위원장이 당선됐지만 그에 대한 직무집행정지 가처분신청이 법원에서 받아들여지면서 재건축 추진위 업무는 1년 넘게 일시 정지됐다.
이정돈 위원장이 복귀한 뒤에도 은마 재건축 사업은 걸림돌을 만났다. 오세훈 서울시장이 무상급식 문제로 시장직을 사퇴하면서 은마아파트는 종상향은커녕 후임인 박원순 시장 체제의 ‘35층 룰’을 받아들여야 할지 갈림길에 섰다. 추진위는 49층을 고집했지만 이 정비계획이 2017년 서울시 도시계획위원회를 통과하는 데 실패하면서 힘을 잃었다. 이 시기 서울시가 요구한 공공기여(기부채납)를 충족한 인근 대치동 청실아파트는 이미 2015년 ‘래미안 대치 팰리스’로 재탄생할 수 있었다.
이 시점에 은마 내부에선 비대위가 여럿 등장한다. 현재까지 대결구도를 형성하고 있는 은마반상회와 은소협(은마아파트 소유주협회) 등이 그들이다. 2021년 9월 주민총회에서 이정돈 추진위원장 등 임원들이 해임된 뒤 그중 은마반상회를 이끌던 최정희 현 조합장이 추진위원장을 맡게 됐다. 추진위원장에 오른 그는 당시 아파트 1만분의 1 지분을 보유해 일명 ‘쪽 지분 논란’을 낳았지만 수도권광역급행철도(GTX-C) 은마아파트 통과 반대 시위를 주도하는 등 이슈를 선점했다. 그 후 35층 룰에 따른 정비구역 지정, 상가 소유주 과반 이상 동의 확보에 성공하며 업적을 인정받았고 조합설립과 함께 초대 조합장이 됐다. 입지는 보장…여전한 실수요
그러나 지난 조합장 선거 경쟁자였던 이재성 은소협 대표가 최 조합장에 대한 직무집행정지 가처분신청을 제기했다. 조합설립 동의를 하지 않아 조합원 자격이 없는 일부 소유주가 조합장 투표에 참여했고 일부 투표함 봉인이 훼손됐다는 점을 문제 삼았다. 올해 1월 법원이 가처분신청을 인용하면서 현재 최 조합장 직무는 정지된 상태다.
최 조합장은 이에 대해 이의신청을 제기하는 동시에 투표함이 보관됐던 조합 사무실 폐쇄회로TV를 법원에 제출한 상태다. 현재 조합의 법률대리는 김앤장, 은소협 측은 화우가 맡고 있다. 조합 관계자는 “상대방이 대형 로펌인 화우를 선임해 가처분신청을 이겼다고 보고 이의신청을 하면서 김앤장을 선임하게 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처럼 지속된 갈등과 규제 여파에도 지난 20년간 은마아파트 매매 시세는 가파르게 올랐다. 2004년 7억원대였던 전용면적 84㎡ 타입 시세는 부동산 하락기 직전인 2022년 상반기 27억원을 돌파하기도 했다.
지금까지 시세는 규제나 조합 갈등보다 부동산 경기가 큰 변수로 작용했다. 2010년 안전진단 통과 이후에도 아파트 가격은 떨어졌다. 결국 주택 시장이 살아난 2014년이 돼서야 집값은 회복하기 시작했다.
2022년 하반기 금리인상 시점부터 하락했던 은마아파트 시세는 2023년 반등했다. 2022년 말 20억원 밑으로 떨어졌던 전용면적 76㎡ 실거래가는 지난해 하반기 24억원 선까지 회복했다.
이유는 여러 가지로 분석된다. 많은 전문가들은 학군 수요와 ‘강남 불패’ 현상이 낳은 부동산 양극화를 원인으로 꼽고 있다. 특히 대치동 실거주 수요는 여전히 탄탄하다는 것이다. 2020년 대치동이 토지거래허가구역으로 지정된 뒤에도 은마아파트는 계속 올랐다. 토지거래허가구역에선 실거주 목적의 매수만 허용된다. 지난해 2월 정비구역 지정 고시, 8월 조합장 선출에 따라 앞으로 사업 추진이 빠를 것이란 기대감 역시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조합장 직무정지 소송을 기점으로 매물이 다수 나온 상황에서도 거래는 주춤했다. 그러나 지역 부동산에 따르면 최근 호가가 다소 떨어지며 매수 수요는 다시 유입되고 있다. 대치동 소재 A 공인중개사무소 관계자는 “4월 들어 은마아파트 매매 3건이 거래됐다”며 “재건축 소송전은 곧 해결될 문제이고 매수인들은 외곽지역에 보유하던 주택이 팔리면서 교육 및 실거주 목적으로 은마아파트를 산 것”이라고 설명했다.
아직 재건축 사업 초기 상태에 불과한 은마아파트 조합은 이제 건축심의를 준비하는 단계다. 건축심의를 통과하면 이후 사업시행계획 승인, 관리처분 인가, 이주 및 철거, 입주까지 긴 과정이 남아 있다. 앞으로 시공사와 공사비를 재협상하는 과정도 필요하다. 시공사를 선정했던 20년 전 당시 약정한 공사비는 3.3㎡(평)당 360만원에 불과하다. 일부 고급화 단지 공사비가 3.3㎡당 1000만원에 달한 지금 상황은 분명 사업성이 부족한 은마에 악재다. 최근 사업 속도가 빨라졌다 하더라도 앞날을 예단할 수 없는 상태다.
그럼에도 긴 기다림에 지친 조합원들 여론이 ‘신속한 사업추진’으로 모였다는 점은 긍정적이다. 예전처럼 관(官)과의 대립으로 사업이 지연되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조합 관계자는 “이정돈 전 추진위원장 당시 은마와 청실아파트(래미안 대치 팰리스) 사례를 볼 때 시와 어떤 방식으로 소통해야 하는지는 명확하다”며 “서울시에서 은마에 원하는 공공기여에 대해 적절히 수용하는 대신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은 얻는 방향으로 갈 것”이라고 말했다.
민보름 기자 brmi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