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판과 탄핵 사이, 국민들이 그어놓은 절묘한 선 [EDITOR's LET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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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의회 도서관은 ‘후회하지 말라(No Regeret)’라는 제목의 책을 50권 넘게 소장하고 있다고 합니다. 교보문고 사이트에도 후회와 관련된 책이 수백 권 팔리고 있습니다. 대부분은 후회를 부정적으로 다룬 책입니다.

“후회하지 말라”는 말은 맞는 말처럼 들립니다. 후회는 과거에 발목 잡히는 듯한 느낌이 들기 때문이겠지요. 하지만 심리학과 뇌과학은 다른 말을 합니다. 대부분의 아이들은 6살 때까지는 후회를 이해 못한다는 연구 결과가 있습니다. 8살에 후회를 예측하는 능력이 발달한다고 합니다. 또 과거 다른 선택지가 있었다는 것을 알고도 기분 나빠지지 않는, 즉 후회의 기능을 잃은 사람들은 뇌손상을 입은 사람들이라는 연구 결과가 사이언스에 실리기도 했습니다.

제22대 국회의원 선거가 끝났습니다. 주변의 반응은 다양합니다. “이민 가야 겠다”, “야당이 200석이 안 돼서 이긴 것 같지 않다”, “개헌저지선을 지킨 것은 선방한 것이다”, “투표율이 조금만 높았으면…” 등등

하지만 개인적으로 이번 선거의 결과는 놀랍지 않았습니다. 예상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습니다. ‘마케팅 불변의 법칙’을 쓴 알 리스는 “시장에 일찍 들어가는 것보다 기억 속에 맨 먼저 들어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습니다. 이번 선거에 적용해볼까요. 이번 선거의 핵심 단어 ‘심판’이었습니다. 이를 선점한 것은 야당이었습니다. 여당이 뒤늦게 들고 나온 운동권 심판도, 이조 심판도 정권 심판의 점유율을 빼앗아 오기는 역부족이었습니다.

선거를 흔드는 중요한 3가지 요소로 인물, 바람, 구도가 꼽힙니다.

이 중 임기 중반에 치러지는 회고적 투표인 총선의 경우 현직 대통령의 지지율이 가장 중요한 변수입니다. 30% 중반대에 머물렀던 윤석열 대통령의 지지율도 여당의 패배를 가리키고 있었습니다.

이 구도를 깨려면 인물과 바람이 필요했습니다. 하지만 여당은 특검법에 발목이 잡혀 파격적 공천을 할 처지가 아니었습니다. 인물은 일단 포기. 그사이 바람은 반대편에서 조국 대표가 일으키며 여당에는 역풍이 됐습니다. 물론 여당이 맞바람을 일으킬 한 번의 기회가 있었다면 ‘의대정원 확대’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일시적으로 치솟은 지지율에 취해 정책의 본래 취지를 지키지 못했습니다. 국민 생명을 담보로 피로감만 쌓아주는 이슈로 만들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전략도 전술도 없었습니다. 야당 공천에 파열음이 났지만 자기 집에서 난 불을 끄는 것도 벅찬 상황이었습니다.

여당 참패, 야당 압승이라고 합니다. 범야권 192대 국민의힘 108.

이 수치를 보며 대중의 선택이 참 무섭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심판이라는 분명한 메시지가 담겨 있지만, 탄핵이라는 현대 정치사의 비극이 수년 만에 다시 일어나면 안 된다고 말하는 듯한 절묘한 숫자였기 때문입니다.

또 이번 선거로 여야 미래의 대선주자 대부분이 생존했다는 것도 묘한 일입니다. 야당의 이재명 대표는 더 큰 힘을 얻었고, 조국 대표는 게임체인저가 될 가능성을 확보했습니다.

여당에서는 나경원 의원, 안철수 의원이 살아남았고, 스스로의 힘으로 양당체제를 뚫고 나온 이준석도 잠재 후보의 자리를 잃지 않았습니다. 한동훈 위원장에 대해서는 말이 많습니다.

하지만 그가 선거패배의 모든 책임을 져야 한다고 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선거의 온전한 주체가 당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무대에서 사라져야 하는 수준은 벗어난 듯합니다.

격랑에서 벗어나 있던 오세훈 서울시장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야당 승리의 공을 이재명 대표와 조국 대표가 누린다면 여당 실패의 책임은 전적으로 윤석열 대통령이 져야 한다는 게 선거 다음 날 나온 모든 언론의 공통된 주장이었고,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물론 아쉬운 점도 있었습니다. 실질적으로는 사상 처음 무소속 당선자가 없었다는 점입니다. 조국신당이 바람을 일으켰지만 그 바람은 ‘심판’이라는 흐름 속에 있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양당체제에서 벗어날 대체재로서의 신선함은 없었습니다. 다양성의 실종이라고 할 수 있을 듯합니다.

앞서 후회에 대해 얘기했습니다. 후회하지 않는 자는 뇌가 손상된 자라고. 후회를 통해 과거의 오류를 반복하지 않을 수 있는 동물은 인간밖에 없습니다.

이제 후회의 시간이 왔습니다. 대통령실, 여당, 야당 그리고 공직사회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그중 윤 대통령에게 가장 많은 후회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현재 한국 사회에는 의대정원 확대, 치솟는 물가, 가계부채와 프로젝트파이낸싱(PF) 부실, 미·중 패권전쟁에 따른 제조업 피해 등 골든타임이 얼마 남지 않은 문제들이 산적해 있습니다.

정치가 경제를 흔드는 것을 더 이상 인내할 시간은 없어 보입니다.

김용준 한경비즈니스편집장 junyk@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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