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기자회견은 민희진 전후로 나뉜다”...충격 받은 홍보맨들
입력 2024-05-06 09:10:41
수정 2024-05-06 18:12:54
기존 형식과 문법 완전히 파괴
처음 보는 기자회견 방식에 주요 기업 홍보 담당자들도 충격
이 글의 목적은 누구의 잘잘못을 따지는 것이 아니다. 민희진 어도어 대표가 기자회견의 형식을 빌려 자신의 억울함을 토로한 후폭풍은 컸다. 대기업 홍보맨들도 큰 충격을 받았다. 짜여진 것 같지 않은 각본, 거친 단어에도 여론이 순식간에 돌아서는 것을 목격했기 때문이다.
위기관리의 매뉴얼을 다시 써야 한다는 말까지 나온다. 유튜브 시대에 벌어지는 일은 예측하기 힘들 뿐 아니라 어떤 대기업도 이를 통제할 수 없다는 것을 확인시켜준 사건이었다. 무엇을 배워야 할지 짚어봤다. <편집자 주>
“기업 리스크 관리에 대해 다시 생각하는 계기가 됐다.”
국내 한 대기업에서 홍보 업무를 담당하는 A 부장은 민희진 어도어 대표의 기자회견에 대해 “큰 충격을 받았다”며 이같이 말했다.
A 부장 역시 약 10년 넘게 홍보 업무를 하면서 자신이 몸담은 기업의 ‘오너 리스크’ 때문에 시시때때로 골치를 앓았다. 이로 인해 기업의 이미지가 나빠질까 봐, 또 때로는 소비자들 사이에서 ‘불매 운동’이 번질까 봐 전전긍긍하며 매번 온갖 방법을 동원해봤지만 여론은 그의 뜻대로 쉽게 돌아서지 않았다.
A 부장은 “민 대표가 한 번의 기자회견을 통해 단숨에 여론을 뒤바꿔 놓는 것을 보고 꼭 잘 짜여진 각본대로 진행하는 딱딱한 기자회견이 반드시 정답이 아니구나라는 사실을 깨닫게 했다”고 말했다.
일각에서는 “대한민국의 기자회견은 민희진 전과 후로 나뉜다”는 말이 나온다. 그 정도로 민 대표 기자회견은 파격적이면서 성공적이었다. 물론 여론을 장악했다고 법과 계약을 무력화시킬 수는 없다. 여전히 법적 분쟁에서는 민 대표 측이 불리하다는 의견이 많다.
그럼에도 파격에 대한 평가는 이어지고 있다. 민 대표의 기자회견 방식은 기존의 문법과 형식을 파괴하는 것이었다. 낯 뜨거운 욕설, 두서 없는 언행, 그리고 감정 섞인 눈물까지. 기자회견에서 금기시되는 행동들을 모두 했음에도 불구하고 민 대표는 기자회견 직후 여론을 자신의 편으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
물론 일각에서는 민 대표의 행동이 경솔했다는 주장도 제기된다. 하지만 포털사이트의 기사 댓글이나 온라인커뮤니티 등의 분위기를 보면 민 대표를 향한 ‘비난’보다는 ‘응원’의 글들이 많음을 볼 수 있다. 실제로 기자회견 이후 여론은 빠르게 변하고 있다. 민 대표를 응원하는 이들이 많아진 반면 하이브에 대한 각종 의혹은 더욱 커지고 있다.
도대체 민 대표의 어떤 부분들이 대중들의 마음을 움직이게 했을까. 대다수 전문가들은 민 대표의 기자회견에 대해 이렇게 분석했다.
“얼핏 보면 아무 생각 없이 내뱉은 것 같지만 사실은 대중의 심리를 꿰뚫는 전략을 치밀하게 짜고 임했다는 느낌을 받는다.” 곽금주 서울대 심리학과 교수의 진단이다.
“수많은 대중, 카타르시스 느꼈을 것”실제로 민 대표는 인터뷰 내내 하이브라는 거대 조직에 주눅들지 않고 당당하게 맞서는 ‘을’이자 ‘힘없는 여성’의 이미지로 자신을 잘 포장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 개저씨들이 나 하나 죽이겠다고 온갖 카톡을 야비하게 캡처했다”는 발언뿐 아니라 “들어올 거면 맞다이로 들어와라”와 같은 거침 없는 발언과 욕설을 기자회견 내내 뱉었다.
많은 직장인들이 여성으로서 당당하게 할 말을 다하는 이런 민 대표의 모습을 보며 자신도 모르게 카타르시스를 느끼며 그를 응원하게 됐다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온갖 억울한 일을 당해도 어쩔 수 없이 회사를 다니는 직장인들이 대다수일 것이다. 이런 사람들이 민 대표를 보며 마치 본인이 직장에 맞서 대응한 것 같은 희열을 가졌을 것이다.” 한 홍보대행사 관계자의 설명이다.
특히 대중이 그의 말을 들으며 힘없는 여성으로 민 대표를 각인하다 보니 비속어나 욕설 또한 “얼마나 억울했으면 저럴까”라는 동정으로 바라보게 됐다는 분석이다.
곽 교수 역시 “스스로가 처한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갑과 을’, ‘남녀 차별’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대중들의 심리를 잘 이용한 발언들을 쏟아내며 자신에 대해 안 좋았던 이미지를 순식간에 ‘호감’으로 뒤집을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하이브의 전략 미스도 한몫
기자회견 타이밍과 시간도 절묘했다는 평가다. 민 대표는 하루가 멀게 하이브 측이 제기한 각종 의혹에도 굳게 입을 닫고 있었다.
그리고 누구도 예상치 못한 타이밍에 갑작스럽게 기자회견을 열어 장장 두 시간에 걸쳐 하고 싶은 모든 말들을 했다.
B 회사 홍보 담당자는 “기업의 경우 하나의 의혹이 제기될 때마다 해당 사안에 대해 일일이 대응하는 것이 일반적인데 민 대표는 달랐다”며 “의혹이 쌓일 때까지 기다렸다가 본인이 직접 나타나 이를 한 방에 정리했다. 일일이 서면으로 대응했다면 민 대표에 대한 의혹은 더욱 커질 수 있었으며 대중들도 피로감을 느꼈을 것”이라고 했다.
연출된 것인지 아닌지 모르지만 표면적으로 보이는 민 대표의 ‘진심’ 또한 대중을 움직였다는 해석도 나온다. 기자회견에서 민 대표는 자신의 얘기를 할 땐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랬던 그가 기자회견에서 몇 차례 무너지며 눈물을 흘린 적이 있다. 자신이 키운 걸그룹 ‘뉴진스’ 얘기를 할 때였다.
한 엔터업계 관계자는 “이런 모습을 본 대중은 ‘민 대표가 뉴진스에게만큼은 진심이다’라고 평가했으며 그를 안 좋게 보던 일부 뉴진스 팬들도 민 대표를 지지하게 됐다”고 했다.
일각에서는 하이브의 잘못된 홍보 전략이 민심을 민 대표에게 기울게 한 요인으로 꼽기도 한다.
특히 하이브가 민 대표를 겨냥해 제기한 의혹들이 하나같이 치졸했다는 비판이 나온다. 대표적인 게 ‘주술경영’이다. 하이브는 민 대표가 무속인에게 코치를 받아 어도어의 인사, 채용 등 주요 경영사항을 이행해 왔다고 밝으나 오히려 역풍을 맞았다. 오히려 대중들은 ‘얼마나 흠잡을 게 없으면 무속인을 찾은 것까지 의혹으로 제기할까’라는 부정적인 시선으로 하이브를 바라보게 했다.
이 과정에서 카톡을 캡처해 공개한 것도 논란이 됐다. 한 기업 리스크 전문가는 “회사 PC에서 카톡 화면을 캡쳐한 것은 회사의 공공자산으로 분류되기 때문에 법적으로 문제가 되지 않으나 개인의 대화를 아무 동의 없이 모든 사람한테 공개한 것는 폭력적인 행위”라며 “대중들의 반감을 더욱 증폭시키는 결과를 낳았다”고 했다.
한 재계 관계자도 “하이브 홍보팀의 경우 기자 출신들이 많다 보니 전략에 미스가 있었던 것 같다”며 “차라리 방시혁 의장이 직접 나와 기자회견을 열었으면 이 정도까지 하이브에 대한 비난 여론이 들끓지 않았을 것”이라고 했다.
물론 여기에 대한 반대 의견도 있다. “(진실 공방 여부를 떠나서) 만약 갑이자 남성인 방시혁 하이브 의장이 기자회견에서 욕을 하고 여성을 비하하는 발언을 했다면 큰 비난을 받고 회사 경영에서 물러났을 것”이라며 “여성인 민 대표가 했기 때문에 이 같은 형식의 기자회견도 용인이 된 것”이라고 봤다.
김정우 기자 enyou@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