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득 줄고 가난한 관광객만 온다"…'엔저' 불만 터져나오는 일본
입력 2024-05-15 09:04:54
수정 2024-05-15 09:04:54
올해 일본 통화 역사에 길이 남을 만한 일이 몇 가지 있었다. 우선 지난 3월 일본이 ‘마이너스 금리’ 시대를 끝냈다. 금리인상은 17년 만이었고, 마이너스 금리를 끝낸 건 2016년 이후 8년 만이었다.
지난 3주간은 엔화 가치가 롤러코스터를 탔다. 일본이 금리를 인상했지만 엔화 가치는 속절없이 추락했다. 지난 4월 29일에는 달러당 환율이 160엔까지 급등했다. 엔화 값은 1990년 4월 이후 34년 만의 최저치를 기록했다. 이른바 ‘슈퍼(super) 엔저’다.
미국의 금리인하가 지연되는 가운데 일본과 미국 기준금리 간 격차가 줄어들지 않을 것이란 전망이 지배적이라 엔화 가치가 폭락한 것이다.
결국 일본 정부가 외환 시장에 개입했다. 시장에서는 일본 정부와 중앙은행인 일본은행이 엔·달러 환율을 방어하기 위해 최소 8조 엔(70조원)을 사용했다는 추산이 나왔다.
엔저는 일본을 위한 정책이었다. 기업의 수출 경쟁력을 올리고 돈을 풀어 소비와 투자를 늘리겠다는 전략이었다. 하지만 일본 내부에서 엔저에 대한 불만이 터져나오고 있다. 수입물가가 오르며 부담이 커진 가계는 물론이고 엔저 효과를 톡톡히 봤던 기업들까지 우려하고 있다. 1. 불안해하는 기업들 “엔화 약세를 기뻐하는 사람이 이상하고 있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엔저는 우리 기업뿐만 아니라 일본에 좋을 리 없다.”
유니클로의 모회사 패스트리테일링의 야나이 다다시 최고경영자(CEO)는 엔저에 대해 꾸준히 지적했다. 역사적으로 엔화 약세는 수출기업에 호재로 작용했다. 그래서 이 말이 ‘립서비스’에 불과하다는 지적도 나왔다.
일본 제품을 한국이나 중국보다 저렴하게 팔고 수익은 달러로 잡히기 때문에 일본의 수출경쟁력을 높였다. 실제로 2022년부터 자동차, 반도체, 상사 등 일본 대표 기업의 실적과 주가는 크게 뛰었다. 도요타의 지난해 연간 영업이익은 사상 처음 5조 엔(약 44조원)을 넘겼다.
수출도 크게 늘었다. 일본의 2023회계연도(2023.4∼2024.3) 수출액은 102조8983억 엔을 기록하며 1979년 이후 역대 최대를 기록했다.
하지만 이제는 기업도 우려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원자재 가격이 상승하고 환율 급등락이 그 자체로 불확실성을 키워 기업의 투자를 더 어렵게 만든다는 이유에서다.
일본항공(JAL) 사이토 유지 부사장은 최근 기자회견에서 엔화 약세와 관련해 “지금 수준, 더욱이 엔화 약세가 진행되고 있는 수준에서는 여러 가지 대책을 실시한다 하더라도 (항공기를 타는 고객이) 돌아오기 어렵다”고 우려했다.
그는 엔화 약세의 악영향이 일본에서 출발하는 국제선에서 크게 나타나고 있다고 밝혔다. 항공기 탑승객이 코로나19 사태 전에 비해 50~60% 수준이라고 설명했다.
미쓰비시상사의 나카니시 가쓰야 사장도 “엔이라는 것은 국력을 나타내는 것이다. 엔화 약세가 진행된다는 것은 국력이 약해지는 측면도 있다”고 밝혔다. 나카니시 사장은 엔화 약세가 수입 에너지 가격, 외국기업 인수 시 가격 등 상승으로도 이어진다고 지적했다. 2. ‘가난한 관광객’ 반갑지 않다
기업이나 거시경제 얘기가 아니더라도 엔저의 효과를 제대로 느낄 수 있는 장면이 있다. 지난 3월 일본을 찾은 외국인 숫자가 월간 기준으로 사상 처음 300만 명을 돌파했다. 한국인이 일등공신이었다. 소비도 늘었다. 올해 1~3월 여행소비액(추계)은 1조7505억 엔이었다. 코로나 이전인 2019년 같은 기간과 비교해 50% 늘어난 수치다.
하지만 일본 내부에서 관광 효과가 ‘착시’에 가깝다는 비판이 나왔다. 도쿄게이자이는 최근 ‘일본은 가난한 사람이 가는 나라’라는 제목의 칼럼을 실었다.
일본이 ‘동경’의 나라에서 ‘가성비 좋은’ 나라로 변했다는 내용이었다. 관광객들이 유니클로에서 쇼핑을 하고 편의점에서 음식을 사먹으면서 지갑을 열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칼럼에 따르면 방일 외국인 관광객의 소비액 추이를 엔화가 아니라 달러로 환산했을 때는 2014년과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소비가 증가했다는 통계가 착시에 불과하다는 말이다.
세수 증가 등 국익 측면에서는 수혜는 크지 않아 불만은 더 커지는 분위기다. 블룸버그통신은 “엔·달러 환율이 올라 외국인들이 돈을 전혀 쓰지 않고도 왕처럼 살 수 있다”며 “실질임금이 감소하고 있는 국가의 좌절감을 더욱 악화시키고 있다”고 분석했다.
관광객들이 돈은 쓰지 않고 혼잡도만 높인다는 불만이 번지면서 일부 식당에서는 외국인 관광객에게 요금을 더 받는 이중 가격제를 적용했다. 도쿄도, 오사카부, 교토시 등이 시행 중인 숙박세와는 별도로 당일치기 여행객에게 세금을 걷는 지자체도 생겨나고 있다.
3. 리먼 사태 이후 최악의 임금 감소
대신 물가가 올랐다. 2022년 4월부터 꾸준히 2% 넘는 물가상승률을 기록하고 있다. ‘2% 물가상승률’은 일본 정부의 목표였다. 임금과 물가가 제자리걸음을 걸었던 ‘잃어버린 30년’을 벗어났다는 하나의 신호였다.
17년간 마이너스 금리를 유지하며 돈을 풀어도 꿈쩍 않던 일본도 최근 2년간은 다른 모습을 보였다. 물가는 오르고 증시는 뜨거웠고 기업은 투자를 늘렸다. 그런데 아이러니하다. 일본 국민들의 생활 수준은 나아지지 않았다. 엔화 약세가 물가는 끌어올렸지만 소비 증가에는 걸림돌로 작용했다.
일본 노동자의 실질임금은 리먼브러더스 사태 이후 15년 만에 처음으로 23개월 연속 감소한 것으로 조사됐다. 일본 후생노동성에 따르면 5인 이상 업체의 노동자 1인당 월평균 명목임금은 전년 같은 달보다 1.8% 오른 28만2265엔(약 252만원)이었으나 물가 변동을 고려한 실질임금은 오히려 1.3% 감소했다.
엔화 약세가 수출에는 도움이 됐지만 원유나 농산물, 제조기업의 부품 등 수입물 가격은 끌어올렸기 때문이다.
10년 넘게 물가상승을 기다려 온 일본 정부에도 반갑기만 한 소식은 아니다. 1000조 엔이 넘는 국가부채를 보유한 일본 정부로서는 금리인상으로 인한 이자가 부담이 될 수 있다.
일본이 발행한 국채의 50%가 넘는 약 580조 엔을 일본은행이 떠안고 있는데 금리가 1% 오를 경우 약 29조 엔, 2% 인상 시에는 약 53조 엔의 추가 부담이 필요하다. 올해 1분기 기준 국내총생산(GDP) 대비 국가부채 비율은 231%로 선진국 중 가장 높다.
재무성도 일본 사회의 눈치를 보고 있다. 간다 마사토 재무성 재무관은 지난 4월 30일 “거시경제의 인플레이션보다 마트의 식료품 가격이 크게 비싸졌다”며 “엔화 약세의 영향에 대해 플러스도 마이너스도 있다”고 말했다.
물가상승을 경험해보지 못한 디플레이션 국가 일본. 슈퍼 엔저로 인한 물가상승은 기시다 정부의 지지율도 10%대로 추락시켰다.
김영은 기자 kye0218@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