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산 주민들을 분노하게 한 ‘평화누리도’ 논란[비즈니스 포커스]

쾌적해서 왔더니…서울·경기 남부와 집값 차이에 ‘민감’

5월 1일 경기도청 북부청사 평화누리홀에서 열린 경기북부특별자치도 새 이름 대국민 보고회에서 석창우 화백이 새 이름 공개 서예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사진=경기도

“집값 차이가 너무 벌어져 다시는 강남으로 돌아가지 못하리란 생각이 든다. 이제는 강남뿐 아니라 서울 자체가 멀게 느껴진다.”

1990년대부터 서울 강남권을 떠나 일산신도시에 거주해왔다는 A 씨의 말이다. 지난 4월 27일 ‘노후계획도시 정비 및 지원에 관한 특별법’(노후계획도시특별법) 시행과 함께 활기를 찾아가던 일산 부동산 시장이 새로운 암초를 만났다. 경기도가 공모를 통해 ‘평화누리특별자치도’를 일명 ‘경기북부특별자치도(경기북도)’의 새 이름으로 선정하는 등 김동연 경기도지사의 민선 8기 공약이던 북부 지역 분도 추진에 박차를 가하고 있어서다.

현재 한강과 북한강을 기준으로 서울 북쪽에 위치한 8개 시와 2개 군이 경기북도에 속하는 방안이 유력하게 논의되고 있다. 그중 서남쪽 끝에 자리한 고양시는 올해 4월 기준 인구 107만1272명으로 압도적인 선두를 달리고 있으며 경기 북부지역 시군 중에서 유일한 ‘특례시’이다. 2021년 기준 지역내총생산(GRDP)은 22조6170억원으로 LG디스플레이 공장 등이 위치한 파주(23조9321억원) 다음 가는 규모다. 고양시를 대표하는 일산신도시가 경기북도 탄생에 중요한 키를 쥐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일산 주민들은 ‘평화누리’라는 이름에 격한 거부감을 나타내고 있다. 5월 15일 오전 기준 “평화누리자치도(경기북도 분도)를 반대합니다”라는 경기도민청원에 참여인원이 4만7000명에 육박하고 있는 가운데 일부 지역 커뮤니티에선 이에 대해 항의하는 내용의 게시글이 다수 올라온 상태다. 이를 두고 이번 경기북부 분도 논의와 새 이름이 일산을 비롯한 경기북부 신도시의 ‘아킬레스건’을 건드렸다는 분석이다. 전성기 지나자 추월당한 집값
서울 은평구, 일산 문촌마을 중소형 아파트 시세 변화 추이

서울 등 다른 수도권 이주민이 많은 특성상 신도시 주민들이 상대적인 주택 시세에 민감한 편이다. 특히 일산에 주택을 장기 보유한 주민들은 서울이나 경기 남부 집값을 보며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는 경우가 많다. 2000년대 들어 일산신도시의 집값 상승폭이 다른 지역에 비해 워낙 작았기 때문이다.

1990년 후반 일산신도시는 특유의 쾌적한 환경으로 전성기를 누렸다. 기존 구시가지가 인접하지 않은 15.7㎢ 대규모 부지에 랜드마크인 호수공원을 중심으로 녹지가 풍부한 ‘전원도시’로 계획됐기 때문이다. 한국항공대학교 비행장 고도제한 문제로 1기신도시 중 가장 낮은 용적률(169%)로 아파트가 지어지기도 했다. 당시 성남 분당신도시 등 다른 1기신도시와 함께 수도권 ‘중산층의 상징’으로 여겨지며 많은 서울시민들이 일산을 택했다.

그러나 일산 집값은 비교적 주거 선호도가 낮은 서울 서북부에도 추월당한 지 오래다. 일산신도시 중심 입지를 차지한 문촌마을 우성1단지 전용면적 84㎡ 타입 시세(KB부동산 일반평균가 기준)는 2004년 2억5000만원에서 20년이 지난 올해 약 5억원으로 2배가량 올랐다. 같은 시기 서울 은평구 불광동 소재 미성아파트 전용면적 66㎡ 타입은 1억9000만원에서 7억~8억원대를 기록하며 4배까지 올랐고 문촌 우성보다 시세가 높아졌다.

한 일산 주민은 “잠실 등 서울 강남권에서 강촌마을, 문촌마을 등 일산 대형 아파트나 전원주택으로 온 경우도 간혹 있지만 서울 강북에 직장이 있거나 가까운 은평구에서 살다가 이사한 사례가 가장 흔하다”고 설명했다. 이 주민은 “강남에서 이사한 극단적인 사례가 아니더라도 일산 집값이 서울은 물론 다른 수도권 지역과 비교하면 떨어진 것이나 다름없어 일산에 집을 산 것을 후회하는 주민들이 많다”고 덧붙였다.

이 같은 현상은 금융위기를 기점으로 본격화했다. 1991년 첫 입주를 시작한 분당신도시 아파트부터 1기신도시는 서서히 준공 20년 차에 접어들었다. 주거 트렌드도 변했다. ‘역세권’, ‘직주근접’ 등 서울 업무지구 접근성이 입지를 평가하는 주요 기준이 된 한편 인구구조 변화로 인해 대형보다 중소형 면적 아파트 선호도가 높아졌다. 부동산 하락기에 매수 수요가 없던 ‘신도시 대형 아파트’는 중산층을 상징하던 위치에서 내려와야 했다.

그런 가운데 정부는 수도권 주택공급을 위해 뉴타운(재정비촉진지구)과 2기신도시 정책을 추진했다. 이런 흐름 속에서 가장 큰 타격을 받은 곳이 일산신도시였다. 경기도 서북부에선 파주 운정이 2기신도시로 개발됐고 고양시 내에서도 서울과 가까운 덕양구 소재 삼송지구, 원흥지구 등에 아파트 단지가 대거 들어섰다. 새 아파트가 우후죽순 들어서는 사이 일산신도시 아파트들은 역전세에 시달리기도 했다. 경기 북부 약점 건드린 ‘평누도’
1기신도시 별 주택 용적률

이 과정에서 일산신도시의 가장 큰 약점으로 지적된 것이 바로 일자리 접근성이다. 무엇보다 경기 북부에 위치해 서울에서 가장 많은 일자리가 집중된 강남 업무지구(GBD)에서 멀다. 서울시 사업체 현황 통계에 따르면 2022년 기준 강남구 소재 사업체 수는 10만7804개로 여의도가 속한 2위 영등포구(7만5470개)와도 차이가 크다.

‘경기북도’는 물론 북한 접경지역과 가깝다는 인상을 주는 ‘평화누리’라는 이름 역시 경기 북부 신도시의 이 같은 콤플렉스를 자극하는 셈이다. 이동환 고양시장이 지난해 이미 분도에 대해 회의적인 입장을 밝힌 가운데 파주시 시민단체인 ‘운정신도시연합회’와 남양주 ‘다산신도시 총연합회’가 최근 경기북부특별자치도 특별법 제정을 반대하는 성명을 낸 배경도 여기 있다.

고영희 일산재건축연합회 회장은 “일산은 물론 더 북쪽인 파주에서도 서울 강북뿐 아니라 강남으로 출근하는 주민들이 있는 것을 보면 강남에 일자리가 유독 많은 것은 맞는 것 같다”고 말했다.

반면 일산의 경기 남부 라이벌이었던 분당은 기존에도 강남과 가까웠지만 2011년 신분당선이 개통하며 대중교통 접근성까지 대폭 개선됐다. 주변에 2기신도시는 오히려 일자리를 제공하며 기존 분당신도시와 시너지를 냈다. 판교, 동탄은 조성 초기에 금융위기 여파로 인해 미분양에 시달리기도 했지만 곧 판교에는 네이버, 넥슨을 비롯한 IT 대기업이 입주한 테크노밸리가, 동탄에는 삼성 반도체 등 산업단지가 조성되면서 일자리를 제공했다.

학령기 자녀를 둔 일부 동탄 주민들이 분당으로 이사하면서 동탄신도시는 오히려 분당의 배후 수요를 형성하기도 했다. 경기 북부 신도시인 일산과 파주가 함께 ‘베드타운’ 역할을 하는 것과 대조되는 부분이다.

고양시 주민들과 지역 전문가들은 지금 상황에서 경기북도로 분도하는 것이 지역발전에 도움이 안 된다는 입장이다. 노후계획도시특별법에 따라 재건축 선도지구 지정을 앞두고 있는 일산신도시 입장에선 경기북도 편입으로 인해 재건축 사업에 부정적 영향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일산은 현재 1기신도시 중 가장 기존 용적률이 낮아 그만큼 일반분양 세대 수를 늘릴 수 있지만 결국 주택시세가 떨어져 분양수요가 감소하면 사업성이 떨어지게 된다.

또 오히려 재정자립도가 낮은 경기 북부가 따로 독립한다면 세수 부족 등으로 지역발전의 동력이 떨어질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한 전문가는 “분도에 찬성하는 의정부는 경기도청 북부청사가 위치해 ‘경기북부 중심’으로서 위상이 높아지는 것을 노리고 있으며 다른 시군은 행정 자율성을 확보해 개발사업 인허가를 늘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고 분석했다. 이 전문가는 “단순히 개발 인허가를 내준다고 해서 과연 기업이 오겠나”라고 지적하며 “경부고속도로 등 동남권 물류 거점을 끼고 있어 자연스럽게 제조업이 발달한 경기 남부와 달리 경기 북부는 세제 혜택, 시설 지원 등을 통해 적극적으로 첨단산업을 유치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민보름 기자 brmi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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