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동산 PF 부실 떠안는 시공사 하청업체…“계약서 보지도 못했는데 돈 못 받는다고?” [허란의 판례 읽기]

신탁사 손 들어준 대법원 판결 논란
관리형 토지신탁계약 따른 자금집행순서가 문제

[법알못 판례 읽기]

그래픽=게티이미지뱅크



최근 부동산 프로젝트파이낸싱(PF) 사업의 부실로 인한 피해를 ‘가장 약체’인 건설 하청업체들이 떠안고 있다. 그 이유는 PF 사업장에서 체결되는 ‘관리형 토지신탁계약’ 때문인데, 이 계약에 따르면 PF 대출금의 이자 비용이나 보존등기 비용 같은 것들이 수급사업자(하청업체)에 지급돼야 할 공사대금보다 우선순위에 있게 된다.

부동산신탁사는 자금 사정이 좋지 않다는 이유로 신탁계약상의 자금집행순서에 따라 하청업체의 공사대금 지급을 거절하거나 추가 담보를 요구할 수 있다는 얘기다.

이에 신탁사가 신탁계약상 자금집행순서를 근거로 수급사업자에게 직접 공사대금을 지급해야 하는 ‘직접지급청구권’을 거절할 수 있는지를 놓고 법정 공방이 이어졌다.

하청업체 입장에서는 억울한 측면이 있는데 하도급대금 직접지급청구권은 법에서 보장하고 있는 권리이기 때문이다.

부동산 경기가 위축되고 미분양이 쌓이는 상황에서 신탁사가 자금집행순서를 이유로 하청업체에 공사대금 지급을 거절할 수 있는지를 두고 하급심 판결이 엇갈려온 가운데 최근 신탁사의 손을 들어준 대법원의 판결이 주목받고 있다.

대법원, 신탁사 손 들어줘

대법원 1부(주심 김선수 대법관)는 2023년 6월 29일 하수급업체인 반도엔지니어링이 발주자인 코람코자산신탁을 상대로 직불합의에 따라 공사대금을 직접 달라고 소송을 낸 사건에서 원고의 청구를 기각하는 취지로 사건을 파기환송했다(사건번호 2023다221830).

대법원은 하도급법상 발주자의 직접지급 책임 범위가 원사업자(시공사)에 대한 대금지급 의무 한도라는 점, 신탁계약상 자금집행순서는 선순위 채권에 대한 변제가 끝나지 않으면 후순위 채권을 갚지 않겠다는 취지로 봐야 한다는 점 등을 근거로 들었다. 특히 대법관들은 신탁계약상 자금집행순서가 도래했다는 사실을 입증할 책임은 직접 지급을 요구하는 하청업체에 있다고 봤다.

앞서 원심인 대전고등법원 제3민사부(재판장 이준명)는 직불합의 당시 하수급업체가 신탁자금 집행순서를 예측할 수 없었으므로 코람코자산신탁의 자금집행순서 미도래 항변을 배척하고 하수급업체의 청구를 인용하는 판결을 선고했다.

원심 재판부는 “민법상 공사대금채권의 소멸시효는 3년임에도 불구하고 미분양이 해소되지 않는 한 준공 이후 3년이 훨씬 지난 시점까지도 대금지급의 이행기가 도래하지 아니했다고 보는 것은 하수급인들에게 부동산개발사업에 따른 미분양 위험을 떠안게 하면서도 그로 인한 부동산개발이익은 온전히 도급인에게 귀속하게 하는 셈”이라며 “결국 도급인이 하수급인의 정당한 이익을 침해하는 것을 용납하는 결과가 된다”고 판시했다.

그러나 대법원은 “신탁계약 등에서 정한 자금집행순서는 선순위 채권에 대한 자금이 집행되지 않은 상태에서는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후순위 채권을 지급하지 않는다는 취지에서 자금집행순서를 정한 것으로 봐야 한다”며 “해당 자금집행순서는 정지조건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판단했다.

또한 “자금집행순서상 지급순서가 도래했다는 정지조건이 성취됐다는 사실은 직접청구권의 효력을 주장하는 하수급업체 측이 부담한다고 봐야 한다”고 판시했다.

상고심에서 코람코자산신탁을 대리한 법무법인 율촌의 김성우 변호사는 “신탁계약에서 정한 자금집행순서의 법적 성격에 관해 하급심 판결이 엇갈리는 가운데 신탁계약에서 정한 자금집행순서는 ‘정지조건’에 해당하고 자금집행순서 도래에 대한 증명책임은 신탁회사를 상대로 자금 지급을 청구하는 자에게 있다는 점을 대법원이 명시적으로 판단한 선례의 의미가 있는 판결”이라고 말했다.

하도급대금 직접청구권 사실상 무시돼

이번 대법원 판결로 관리형 토지신탁 방식의 PF 사업장에서 벌어지던 혼선은 일단락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법에서 하청업체 보호를 위해 특별히 마련한 하도급대금 직접지급청구권이 사실상 무시됐다는 점에서 논란이 남는다.

하도급대금 직접청구권은 약자인 하청업체를 보호하기 위해 법에서 보장한 권리다. 건설사업장에서 하도급거래 공정화에 관한 법률(이하 하도급법) 제14조 제1항 또는 건설산업기본법 제34조 제2항에 따른 하도급대금의 직접지급 사유에 해당하면 발주자는 수급사업자에게 하도급대금을 직접 지급해야 한다.

PF 사업장의 경우 ‘관리형 토지신탁계약’에 따라 시행사로부터 공사도급계약의 발주자 지위를 승계한 신탁사도 마찬가지다. 이 경우 신탁사가 신탁계약 후에 별도로 원사업자, 수급사업자와 하도급대금의 직접지급 합의를 한다.

문제는 신탁계약서상의 자금집행순서다. 신탁계약에는 시행사와 신탁사가 위탁자와 수탁자로서, 대주단(채권자)과 시공사가 우선수익자로서 각각 참여하고 분양수익금 등의 자금집행순서를 미리 정하고 있다.

하청업체로서는 자신들이 직접 관여하지도 않은 신탁계약 때문에 애를 먹게 된 셈이다. 이들은 관리형 토지신탁 계약에 따라 하도급대금 직접지급권 행사가 제한되고 관리형 토지신탁계약하에서는 그렇지 않은 경우보다 하도급대금의 직접지급과 관련해 불리한 지위에 놓일 수 있다.

물론 수급사업자의 직접지급청구권을 제한 없이 인정하면 신탁사가 부동산개발사업의 위험을 일방적으로 떠안는 부작용도 우려된다. 자칫 해당 사업의 신탁계정이 아닌 고유계정으로 공사대금을 지급해야 하는 문제가 발생할 수도 있다.

다만 신탁계약이라는 잣대로 직접지급청구권을 판단하는 것이 정당한가에 대한 의문이 불거진다. 법무법인 바른의 김용우 변호사는 “대법원 판결이 정당한지 여부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을 수는 있지만 이번 판결의 영향을 무시할 순 없다”며 “관리형 토지신탁사업에 참여하는 하도급업체는 신탁계약상의 자금집행순서로 인해 직접지금청구로 인한 기성금이 언제든 지급 거절될 수 있음을 고려해 신중히 입찰 참가를 결정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돋보기]
‘직접지급청구권’ 놓고 엇갈리는 대법원 태도

한편 직접지급 청구권을 둘러싼 대법원의 태도가 일관적이지 않는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과거 대법원은 영세한 수급사업자 보호를 위해 원사업자에 대한 회사정리 절차에 들어갔다고 해서 하도급대금 직접지급이 배제될 이유가 없다고 판시한 바 있다(대법원 2007. 6. 28. 선고 2007다17758 판결). 하도급법상 하도급대금 채권액에 상당하는 부분에 관해서는 일반채권자보다 수급사업자를 우대한다는 의미를 가지기 때문이다.

그런가 하면 원사업자의 지연손해금 지급 의무 규정은 발주자에겐 적용할 수 없다고 판단하기도 했다.

대법원은 하도급법상 정하고 있는 원사업자가 하도급대금을 목적물의 수령일로부터 60일을 초과해서 지급한다면 그 초과 기간에 대해 지연이자를 지급해야 한다는 규정은 원사업자가 수급사업자에 대해 대금을 지급하는 경우에 관한 규정으로 발주자가 원사업자의 파산 등으로 수급사업자에게 하도급대금을 직접 지급하는 경우라면 적용할 수 없다고 판시했다(대법원 2005. 7. 28. 선고 2004다64050 판결).

하도급법상의 직접지급청구권을 원사업자의 공사대금청구권과 달리 취급한 것인데, 이는 지난해 대법원 판결에서 하도급법상 발주자의 직접지급 책임 범위를 원사업자에 대한 대금지급 의무로 한정한 것과 논리적으로 모순된다는 지적이 있다.


허란 한국경제 기자 why@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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