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략의 삼성은 없었다"…반도체를 흔든 30년 1위의 자만[K기업 고난의 행군②]

1974년 이건희 선대회장 사재 털어 한국반도체 지분 인수한 지 50년
변화하는 반도체 산업 본질 따라잡지 못해
메모리 시장, 양산업에서 수주업으로 전환 본격화

차세대 리더 육성하지 못해
최근 1960년생 전영현 부회장 복귀해 사업 총괄

[커버스토리 - K기업 고난의 행군]

2021년 5월 27일 주가 7만9600원(장 마감 기준). 3년이 지난 2024년 5월 28일 주가 7만7600원.

삼성전자의 주가는 한발도 앞으로 나가지 못하고 있다. 연일 ‘AI 봄바람 탄다’, ‘이번엔 진짜 간다(오른다)’ 등의 말이 나오고 있지만 주가는 이 같은 기대를 반영하지 못한다.

세계 1위 타이틀이 익숙하지만 그 위상은 예전만 못하다. ‘초격차’로 표현해온 기술 리더십과 경쟁사가 따라올 수 없는 혁신은 과거의 영광이 됐다. 한때 ‘외계인을 고문해 반도체를 만든다’는 우스갯소리까지 나왔지만 2024년의 삼성에는 ‘역초격차’ 위기감마저 감돌고 있다. ◆ “수주업은 자기가 먹던 감이라도 내줘야 한다” 1974년 이건희 선대회장이 사재를 털어 한국반도체 지분을 인수한 지 50년이 흘렀다. 경쟁사보다 빠른 기술개발을 최우선 과제로 삼고 적극적으로 투자해 반도체 산업 리더가 됐다. 특히 메모리 시장에서는 1993년 세계 1위를 석권한 이후 최근까지도 이 자리를 뺏기지 않고 있다. D램에서는 40%가 넘는 점유율을 유지하고 있으며 낸드플래시 시장에서도 30% 이상의 점유율을 기록하고 있다.

너무 오랜 기간 1위 자리에 있던 게 오히려 문제였을까. 과거 삼성전자는 한국 산업에서 혁신의 상징과 같았지만 요즘은 다르다. 삼성전자에서 혁신을 떠올리는 사람은 많지 않다. 삼성전자의 핵심사업인 반도체 부문에서 뒤처지고 있다. 지능형(AI) 반도체 시장에서 경쟁사인 SK하이닉스에 밀려 고전하고 있다. 세계 최대 AI 반도체 제조사인 엔비디아를 고객사로 확보하지 못해 고대역폭메모리(HBM) 매출이 거의 일어나지 않는 것도 이 때문이다. 삼성전자를 둘러싼 가장 큰 이슈가 ‘HBM 납품 루머’일 정도로 기술적 리더십을 상실한 지 오래다. 대만 TSMC를 따라잡겠다고 했던 시스템반도체 부문 글로벌 시장점유율도 오히려 떨어지고 있다.

삼성전자도 이를 인정하는 듯한 발언을 했다. 지난 3월 정기주주총회에서 경계현 전 사장은 “우리가 준비하지 못해 사업을 잘하지 못한 것이 있다”며 “근원적인 경쟁력이 있었더라면 시장 상황과 무관하게 더 잘할 수 있었을 텐데 그러지 못했다”고 언급했다. 경 전 사장이 말한 근원적 경쟁력이란 HBM 경쟁력으로 해석할 수 있다.

삼성전자에서 사라진 혁신에 대한 다양한 의견이 나온다. 첫 번째 지적은 바뀐 반도체 산업의 본질을 따라잡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D램은 양산업이었다. 좀 더 빨리, 좀 더 싸게 제조해 쌓아두면 고객사들이 와서 사갔다. 이건희 회장이 ‘타이밍’이 중요하다고 말한 이유다. 수요가 한꺼번에 몰리면 ‘슈퍼 사이클에 올라탔다’고 했다. D램 기술 경쟁력 지표인 ‘나노 경쟁’에서 삼성전자를 따라올 회사는 없었다. 기술 리더십의 힘이었다. 2000년대 이 기술력을 바탕으로 삼성전자만 이익을 보고 다른 기업은 손해를 보는 선에서 가격을 책정하는 ‘골든 프라이스 전략’으로 독일, 대만, 일본 반도체 업체들을 역사 속으로 보내버렸다.

그러나 AI 반도체 사업은 타이밍이 중요한 양산업과는 다르다. 만들어 쌓아놓으면 고객들이 사가지 않는다. ‘선 생산, 후 주문’ 방식이 아닌 ‘선 주문, 후 생산’ 방식, 즉 고객사가 원하는 대로 반도체를 설계해 납품해야 한다. 커스터마이징(맞춤형) 반도체를 만들어야 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파트너십이다. 변화된 반도체 산업의 본질이기도 하다. 기술은 기본이고 여기에 고객과의 파트너십이 중요해지면서 ‘수주업’에 가까운 방향으로 변하고 있다.

하지만 삼성전자는 이런 수주업을 해본 적이 2000년대 이후로는 거의 없다. 오랜 기간 시장에서 1위를 독주해온 영향이다. 이건희 회장은 이와 관련 “수주업은 자기가 먹던 감이라도 내어줘야 한다. 일부 사업에서 초기에 실패한 것도 여기에 원인이 있다”고 말한 적이 있다. 조선업에 대한 얘기였지만 현재 AI 반도체 사업에 대입해도 크게 틀리지 않을 듯한 말이었다.
◆ 리더는 어디에 있었나 중요한 연구개발과 투자를 결정할 리더십에 대한 문제제기도 나온다. 지난 5월 24일 삼성전자 서초 사옥 앞에서 열린 전국삼성전자노조 집회에서 노조 측은 경영진의 판단을 문제 삼았다. “HBM 경쟁력이 하락한 것은 과거 경영진이 사업 중단을 지시했기 때문”이라며 “리더의 잘못된 판단으로 직원들의 피해만 커졌다”고 주장했다. 2017년부터 2021년까지 기술개발에 주력하지 않고 반도체 슈퍼 사이클의 수혜만을 겨냥해 생산 쪽에만 치우친 의사결정이 이뤄졌다는 게 삼성전자 주변의 분석이다.

익명을 요구한 삼성 관계자는 “이건희 회장은 항상 ‘10년 후 무엇을 먹고살 것인가’라는 질문을 했지만 최근 몇 년간 회사 내에서 이런 질문이 중요하게 다뤄진 것을 보지 못한 것 같다”고 말했다. 단기성과주의에 매몰된 결과라는 설명이다.

인재 영입의 문제점도 지적됐다. 2020년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은 ‘뉴 삼성 비전’의 일환으로 2020년 뇌 신경공학 기반 AI 분야의 최고 석학인 세바스찬 승(승현준)을 삼성리서치센터 소장(사장)으로 영입했다. AI 분야에서 뚜렷한 성과를 내지 못했던 삼성전자의 회심의 선택이었다는 평가가 있었다. 세바스찬 승은 ‘이재용 회장의 1호 인재’라는 별칭을 얻고 CES 2021에서 주요 연사로 서는 등 삼성전자의 얼굴 역할도 했다.

그러나 승 사장은 지난해 말 삼성전자를 퇴사했다. 최근 공개된 삼성전자 사업보고서에서 승 전 사장은 사임한 임원 명단에 올랐고 사직 후 미국 프린스턴대 교수로 복귀한 것으로 알려졌다. 삼성이 기대를 걸었던 영입인사의 퇴사에 많은 직원들은 실망했다. 인재관리도 제대로 안 되는 듯한 인상을 줬기 때문이다.

삼성전자는 1990년대부터 ‘S급 인재’를 강조했다. ‘한 명의 천재가 1만 명을 먹여 살린다’는 이건희 회장의 철학에 따라 계열사 사장들은 S급 인재들을 찾아 다녔고 이들을 영입하는 데 인건비를 고려하지 않을 정도로 인재에 집착했다. 하지만 요즘은 이런 분위기도 퇴색한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익명을 요구한 증권사 애널리스트는 지난 3월 출범시킨 ‘HBM 태스크포스(TF)팀’에 대해 삼성전자가 ‘보여주기식’ 경영을 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그는 “반도체는 일반 직원 100명보다 리더급 직원 1명의 능력이 더 중요한 곳”이라며 “100명을 모아두면 새로운 게 나올 것이라는 결정은 누구 생각인지 황당할 따름”이라고 말했다.

이 같은 인재 양성과 영입인재에 대한 관리 실패는 차세대 리더 실종으로 이어졌다. 삼성전자는 최근 반도체 사업을 담당하는 DS부문의 경계현 사장(1964년생)을 미래사업기획단으로 보내고 후임으로 1960년생 전영현 부회장을 불렀다. ‘반도체 사업에서 후계자 양성에 실패한 사례’라는 지적이 나오는 배경이다.

더 본질적인 문제제기를 하는 직원도 있다. 최고경영진이 삼성전자가 무엇을 지향하는지에 대한 방향성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기업의 핵심가치는 직원들을 하나로 모으는 역할을 할 뿐 아니라 어려운 경영 판단의 기준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삼성은 현재 이 가치가 제대로 제시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이재용 회장의 이어지는 재판 때문에 제대로 경영을 하지 못한 게 가장 중요한 원인이다. 2017년 이후 이 회장의 공백기에 그룹을 이끄는 경영진은 바뀌지 않고 있다. 이들도 삼성의 미래에 대한 어떠한 비전도 보여주지 못했다.

삼성은 과거 ‘관리의 삼성’으로 불렸다. 비약적으로 성장했던 1990년대와 2000년대는 ‘전략의 삼성’이 그 타이틀이었다. 그다음 삼성이 지향한 것은 ‘창의의 삼성’이었다. 하지만 지난 수년간 삼성은 보수적 경영으로 “다시 관리의 삼성으로 돌아갔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이 같은 가치의 상실과 리더십에 대한 신뢰의 실종뿐 아니라 2017년 이후 경영진이 그대로 자리를 지킴에 따라 삼성이 오랜 기간 전통으로 유지해왔던 ‘신상필벌에 따른 성과주의 인사’란 원칙도 희미해지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비밀 병기, 마하1그럼에도 반도체 사업에서 반전의 카드는 있다. 삼성전자는 HBM 없이도 AI 반도체 시장에서 영향력을 높일 수 있는 제품을 개발하고 있다.

AI 가속기(AI 학습과 추론에 특화한 반도체 패키지) ‘마하1’을 통해서다. 메모리 병목 현상(기능이 저하되는 문제)을 8분의 1로 줄이고 전력 효율을 높인 마하1을 올 연말까지 출시하기 위해 나선다. 마하1에는 기존 HBM 대신 범용 메모리인 저전력(LP) D램 제품이 사용된다. 삼성전자는 올해를 AI 반도체 경쟁력 확보 원년으로 삼고 주도권을 되찾을 계획이다.

동시에 HBM도 놓지 않고 있다. 2030년까지 경기도 용인 R&D단지에 20조원을 투입하고 기술개발을 담당하는 반도체연구소 규모를 2배로 키울 계획이다. 현재 삼성전자는 6세대 HBM인 ‘HBM4’ 개발도 진행 중이다. 내년 양산이 목표다. 삼성전자는 HBM 개발팀을 두 개로 나눠 새로 조직한 HBM 개발팀이 HBM4를 전담하게 했다. HBM3E까지는 기존 개발팀에서 담당한다.

이 같은 계획이 제대로 이행되면 삼성전자는 기술적 리더십을 입증함으로써 고객과 직원들로부터 신뢰도 동시에 되찾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최수진 기자 jinny0618@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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