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콘텐츠 대표주자'가 어쩌다…CJ ENM, 무리한 투자로 '한류 덕' 못봤다[K기업 고난의 행군④]
입력 2024-06-03 06:30:01
수정 2024-06-03 06:30:01
2021년 18만원까지 갔던 주가 곤두박질
티빙·피프스시즌 적자에 재무적 부담 가중
넷플릭스 공세에 콘텐츠 시장 타격
지난 몇 년간 K-콘텐츠는 전성기를 누렸다. 드라마와 영화, 음악으로 시작한 한국 콘텐츠 붐은 한국 음식과 한국어에 대한 관심으로까지 확대됐다. 그런데 막상 드라마, 영화, 음악, 커머스 사업을 모두 갖고 있는 ‘콘텐츠 왕국’ CJ ENM은 고난의 행군을 이어가고 있다.
CJ ENM의 주가는 2021년 한때 18만원대까지 갔었다. K-콘텐츠 선두주자의 대접을 받았다. 하지만 이후 주가는 곤두박질쳤다. 부침은 있었지만 줄곧 내리막을 걸으며 작년 10월 5만원대까지 미끄러지기도 했다. 최근 ‘선재 업고 튀어’ 등 연이은 드라마 히트에 힘입어 주가 8만원대를 회복했지만 이름에 걸맞지 않는 수준이다.
주가가 5년래 최고치를 기록했던 2021년 실적도 좋았다. 코로나19가 한창이던 그해 CJ ENM 영업이익은 2969억원을 기록하며 사상 최대치를 찍었다. 그것도 잠시 지난해 적자로 돌아섰다.
‘K-콘텐츠 대표주자’ CJ ENM의 위기를 촉발한 요인은 크게 3가지였다. 무리한 투자로 인한 후유증으로 재무적 부담이 증가한 것이 첫째 요인이다. 또 콘텐츠 시장 환경 변화로 넷플릭스가 패권을 잡으며 TV 광고비가 감소하면서 타격을 입었다. 마지막으로 배우들 몸값이 천정부지로 치솟으며 제작비가 증가해 뜨는 콘텐츠를 만들어도 거둬들이는 돈은 얼마 되지 않았다.
2021년 2969억원이었던 영업이익은 2022년 1374억원으로 줄었고 지난해에는 146억원 적자를 냈다. 당기순이익은 출혈이 더 컸다. 2021년 2276억원에서 2022년에 1768억원 당기순손실로 돌아섰고 지난해에는 3968억원에 달하는 당기순손실을 냈다. 실적이 크게 악화하자 회사는 대대적인 조직 개편과 구조조정을 단행했다.
피프스시즌·티빙으로 쌓인 적자
문제는 장사가 가장 잘되던 2021년에 터졌다. CJ ENM은 2021년 11월 미국 영화 제작사인 피프스시즌(당시 엔데버 콘텐트)의 지분 80%를 인수했다.
인수금액만 1조원에 달했다. 영화 ‘라라랜드’ ,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을 비롯해 드라마 ‘킬링 이브’, ‘더 나이트 매니저’ 등의 제작과 유통·배급에도 참여한 피프스시즌을 교두보로 삼아 글로벌 콘텐츠 기업으로 거듭나겠다는 계획이었다.
통 큰 베팅이었다. 인수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9000억원을 차입하면서 CJ ENM의 재무부담은 급격하게 불어났다.
‘신의 한 수’인 줄 알았던 M&A는 ‘악수’가 돼 돌아왔다.
피프스시즌은 2022년 연간 692억원 적자를 본데 이어 지난해에도 1179억원의 적자를 냈다. 코로나19 여파로 제작 일정이 밀렸고 인수 도장을 찍자마자 미국의 배우·방송인노동조합과 작가조합이 동시 파업에 나섰다.
고정비는 느는데 가동률은 나오지 않아 손실이 쌓였다. 본사에서 임원을 파견했지만 자존심이 강한 현지 작가와 배우를 자극할까 봐 적극적으로 경영에 나서지 못한 채 상황을 관망할 수밖에 없었다. 차입한 자금에 대한 이자는 고금리로 인해 더 큰 부담으로 돌아왔다.
국내 최초 아레나 공연장인 CJ라이브시티 사업이 표류하는 점도 회사의 발목을 잡았다. CJ라이브시티는 2021년 4분기 착공했지만 여러 차례 사업계획이 변경되면서 착공이 늦어지고 사업 비용은 불어났다. CJ ENM이 CJ라이브시티에 지급 보증한 규모가 3000억원을 넘는 점을 고려하면 개발사업이 좌초될 경우 자칫 CJ ENM의 재무 안정성에도 악영향을 미칠 수 있는 상황이다.
현금이 부족한 상황에서 무리한 투자로 수익을 내지 못하자 빚만 늘었다. 2020년 말 7900억원이었던 총차입금은 2021년 말 1조 5300억원으로 불었다. 일회성일 줄 알았던 손실은 코로나19 여파로 지속됐다. 올해 1분기 말 CJ ENM의 연결기준 총차입금은 3조6058억원으로 나타났다. 2023년 말 3조2573억원에서 3개월 새 10.7%가량 증가했다.
만기가 1년이 채 남지 않은 차입금도 불며 재무건전성에 빨간불이 들어왔다. 올해 1분기 말 기준 CJ ENM의 단기차입금은 1조338억원으로 2023년 말 대비 13.2% 늘어났다. 만기가 1년이 채 남지 않은 장기차입금인 유동성장기부채도 8533억원으로 80%가량 늘었다.
토종 OTT 1위 티빙 역시 CJ ENM 실적 악화에 한몫했다. 작년까지 4년 연속 적자를 낸 티빙은 2020년 CJ ENM이 티빙사업본부를 물적 분할하며 탄생했다. 티빙은 KT의 OTT 시즌을 흡수합병하며 몸집을 키웠다. 토종 OTT 플랫폼 중 가장 많은 이용자를 보유했지만 매 분기 적자폭만 늘었다. 콘텐츠 제작비가 치솟고 광고 시장까지 위축한 탓이다.
K-콘텐츠의 위상이 높아졌어도 티빙이 넷플릭스의 대항마가 되기는 힘들었다. 지난해는 1420억원의 영업손실을 기록하며 사상 최대 규모의 적자를 냈고 올 1분기에도 385억원의 영업적자를 기록했다. 제작 비용이 너무 올라 시청률이 잘 나와도 손해를 봤다. 지난 4월 종영한 CJ ENM tvN과 티빙이 공동으로 선보인 ‘눈물의 여왕’ 은 16부작에 총 560억원, 회당 35억원 정도의 제작비를 사용한 것으로 알려졌다.
지인해 신한금융투자 연구원은 “재무적으로 현금성 자산이나 영업이익이 많지 않은 회사가 무리한 비용을 투자했지만 티빙과 피프스시즌 등 신사업 두 곳에서 너무 큰 손실이 나면서 기존 캐시카우였던 커머스(CJ오쇼핑)에서 벌어들인 돈까지 까먹었다”고 설명했다.
지 연구원은 드라마 제작 시장 환경의 변화도 위기의 요인이 됐다고 덧붙였다. 그는 “드라마는 제작비 대비 수익을 얼마나 올리느냐의 싸움인데 1차 수익이 되는 TV채널 광고비, 협찬 PPL, 해외 OTT판권 수익이 받쳐주지 않으면서 자회사인 스튜디오드래곤도 투자 대비 성과가 나지 않아 CJ ENM의 수익이 악화했다”고 말했다. 애물단지가 보물단지 될까?적자 터널을 걸어온 CJ ENM에도 반전 카드는 있다. 기존 수익성의 발목을 잡아온 피프스시즌과 티빙의 분위기가 달라졌기 때문이다. 우선 지난 1분기 티빙의 이용자가 크게 늘었다.
모바일인덱스에 따르면 올해 1월 1일~3월 26일 티빙의 평균 일간활성화사용자수(DAU)는 162만7000명을 기록했다. 티빙의 지난해 전체 평균 DAU(132만8000명) 대비 22.5% 증가했다.
최근 국내 프로야구(KBO) 독점 중계를 시작했고 광고요금제인 ‘광고형 스탠다드’ 상품을 출시하면서 수익성을 크게 개선할 수 있을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지난해 제작이 멈췄던 피프스시즌도 올해 정상화되면서 25편 이상의 콘텐츠를 선보이겠다고 선언했다.
지 연구원은 “이번 1분기 숫자가 연내 가장 저점으로 2분기부터 실적이 개선될 것”이라며 “점진적인 실적 턴어라운드 투자포인트가 있다”고 설명했다.
또한 일각에서는 티빙의 경우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가치는 인정해줘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K-콘텐츠가 전 세계적인 유행이 되고 있는 상황에서 한국에서 독자적인 스트리밍 서비스 하나 정도는 갖고 있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와 함께 지난해 구조조정으로 직원들의 사기가 꺾이고 로열티가 떨어진 것을 새로운 CEO가 어떻게 만회할지도 회사의 미래와 관련된 중요한 포인트다. 회사 사정에 밝은 콘텐츠 업계 관계자는 “콘텐츠 업계 특성상 신나게 일하는 분위기가 중요한데 작년 구조조정으로 많은 직원들이 자의 반 타의 반으로 회사를 그만뒀고 이에 따른 사기저하로 회사의 생산성이 떨어질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그동안 회사의 커머스(홈쇼핑) 부문만 담당하다 올해부터 엔터테인먼트 부문까지 책임지게 된 윤상현 대표는 단기적으로는 재무적 안정과 함께 조직을 안정시키는 두 가지 과제를 동시에 갖게 된 셈이다.
장기적으로는 넷플릭스가 파괴한 한국의 콘텐츠 제작과 유통 시스템을 복원하는 것도 윤 대표에게 주어진 과제다. 한국뿐 아니라 넷플릭스가 가는 곳이 어디든 그 시장의 고유한 질서는 무너졌다. 막대한 자본과 세계 시장을 갖고 있는 넷플릭스에 콘텐츠를 판매하기에 급급한 게 현실이다.
한국이 다른 나라와 다른 점은 글로벌 시장에서 통할 수 있는 콘텐츠를 갖고 있다는 점이다. 세계 최대의 콘텐츠 유통 플랫폼인 넷플릭스와 경쟁과 협력 사이에서 미묘한 줄타기가 필요한 이유다. 이를 통해 독자적인 콘텐츠 생태계를 복원시키는 것도 K-콘텐츠의 선두주자 CJ ENM에 주어진 숙제라고 할 수 있다.
김영은 기자 kye0218@hankyung.com